신학

성화란 무엇인가 서평

훈나겸 2018. 3. 16. 05:00

성화란 무엇인가

 

 

.요약

1장   루터주의적 관점-게르하르트 포드

 성화는 단순히 칭의에 익숙해지는 기술일 뿐이다. 성화는 칭의에 추가된 어떤 것이 아니다. 구원에 있어 칭의가 너무 관대하게 주어지지 않도록 성화가 최종적으로 방어하는 것도 아니다. 성화는 의롭다고 여김 받는 삶이다. 옛 사람이 아무리 경건할지라도 자기 정당화와 자기만족의 결과에 충돌할 때 성화가 일어난다. 성화는 부활을 기대하며 사는 삶이다. 성화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성화가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성화는 주님이시며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의 사역이다. 성화는 슬픔과 기쁨과 고통 그리고 일상적인 삶의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한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 단지 듣기만 하라! 믿음 역시 조건이 아니며 우리가 결정을 하지도 말고 회개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 믿음은 선물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믿음은 무조건적인 약속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히는 것이며 완전한 새로움과 그에 따른 즐거움으로 사로잡히는 것이며 은혜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조건적 약속은 위험하지 않은가? “!” 이렇게 악한 세대에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예수님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을 내리셨고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셔서 당신의 결정을 확고히 하셨다.

성화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심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는 총체적으로 죄인으로 드러나는 동시에 총체적으로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성화는 총체적인 상태로서 칭의에 포함되어 있다. 진정한 성화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성화의 문제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단순하게 믿는데 있다.

그러나 성화에 있어서의 성장, 즉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진보라는 것은 없을까? 옛 것에서 새 것으로 즉 죽음에서 삶으로 변하는 그리스도인의 변화에 대한 진보와 성장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일반적인 관점을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는 우리가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우리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의 메시지의 종말론적 특성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은혜 안에서의 성장이지 우리 자신의 선행이나 도덕성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보를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진보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혜의 총체성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점점 더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진보는 새로운 것이 안정적으로 침입해 오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이러한 진보는 우리의 자체적인 노력은 점점 더 벗어 버리고 자신에게서 더욱더 멀리 떨어져 나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개념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성화란 단지 칭의를 통해 구체화하거나 칭의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

이미 죽었다가 새로워진 사람, 즉 자신의 노력에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의 싸움에 뛰어들 수 있을까? 답은 일상생활 업무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소명을 수행한다는 개념 안에 있다. 우리는 항상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긴장한다. 거대한 열기구 신드롬 때문에 성화는 경건한 행위를 수행하고 금기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인위적으로 특별하게 노력하는 것이 더욱 거룩해 보인다. 그러나 성화는 기본적인 일상생활과 업무 가운데 이루어진다.

2장   개혁주의적 관점-싱클레어 퍼거슨

  개혁주의 신학은 항상 성화라는 주제를 특별히 강조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개혁주의 설교에 가장 중심이 되는 원리는 신학과 실천 즉 교리와 삶의 방식이 하나님이 연결한 동반자라는 것이다. 교리와 삶의 방식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퍼거슨은 성화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 주는 것이다.”라고 언명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도달해 놓은 성결이나 성화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을 근거로 한다. 개혁주의 신학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의 진보라는 소우주적 상황에서 그들을 보기보다는 우선은 구속의 역사에서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대우주 안에 그들을 배치해 놓는다. 이렇게 배치하면 그리스도인 각각이 진정으로 성결하게 성장할 수 있는 대우주적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심, 도래할 영광 등을 통해 그리스도에 연합된 사람은 정신적 행동이 되었든 육체적 행위가 되었든 이 땅에 속한 것은 무엇이나 죽여야한다. 은혜는 고행을 필요로 한다. 고행 없이는 거룩함도 없다. 고행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과다. 그러나 우리는 고행을 우리의 내적 생활에만 제한해서는 안 된다. 신약에는 칼빈이 내적 고행과 외적 고행이라고 부른 것이 나와 있다. 신자에게 해당하는 책임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개념은 고행처럼 남용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종종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 중에서는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성경적이다. 성화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성화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해 되찾게 되는 참사람이다. 이것이 성황에 대한 개혁주의 교리의 핵심이라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성화는 철저하게 인간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육적인것은 영적으로 수행하고 영적인것은 육적으로 수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개혁주의의 신학에서 성화는 노력하지 않고도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신비한 체험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의지, 감정, 행동에 관여함으로 우리를 성화시켜 나가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화시켜 가시는 과정에 가담한다. 성황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이 직설법(“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주다.”)과 명령법(“이제 너희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두 가지 모두의 화법으로 나타나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3장   웨슬리주의적 관점-로렌스 우드

 웨슬리는 바울이 의롭다 여김을 받은 모든 신장게 성화되라고가르쳤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성화와 온전한 성화 사이를 구별해야 하다고 지적했다(웨슬리는 항상 구별해야 한다고 가정은 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따르고 있지 않았다.) 성화는 거듭나는 순간에 시작된다. 온전한 성화는 사랑이 온전해지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평이한 해설』에서 온전한 사랑을 성령 충만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정직하고 진솔한 관계를 진정으로 맺게 해 줄 수 있는 사랑의 완전함을 말한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우리는 은혜 안에서 성장할 수 있으며 인간적 삶에 계속해서 나타나 혼란을 주는 부정적이고 상한 감정에서 내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매우 포용적이고, 매우 믿을 만하며, 매우 수용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다.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심리적 콤플렉스 중의 하나는 온전한 성화라는 용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온전한 성화라는 용어는 완전무결이나 천사적 완전처럼 들릴 수 있으나 이 두 용어는 모두 웨슬리가 그리스도인의 완전과는 다르다고 구별시켜 놓은 용어다. 확실히 온전하게 성화되었다면 삶에서 아무 것도 잘못되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한이라는 단어를 고정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온전한이라는 단어는 추상적이고 수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속성을 나타낸다.

 웨슬리는 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설명하면서 할례의 언약적 언어를 사용했다. 웨슬리는 마음의 할례가 영혼의 습관적인 기질로 종교적 작품들에서는 성결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마음의 할례는 죄에서 깨끗해짐 즉, ‘육체와 영혼의 모든 더러움에서깨끗해짐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공로가 주어졌으며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될 수 있도록 우리 심령이 새로워졌다는 사실을 마음의 할례가 직접적으로 함축한다고 정의했다.

4장   오순절주의적 관점-러셀 스피틀러

 스피틀러 박사는 그리스도인의 다양한 체험으로서 방언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심지어는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오순절 전통과 웨슬리주의 성결교 전통이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 차이를 제외하고 오순절교는 성화에 대한 관점에서 웨슬리주의와 같다.

 오순절 운동은 방언이 성령 충만의 외적 필수 증거라고 주장한다.

스피틀러의 발제문은 영적 성장과 발달 혹은 성화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오순절 영성에 대해서는 탁월하게 소개하고 있다.

 오순절교의 내적 실재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보다 오순절교의 영성이 절제되어 있지 않고 부적절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확실히 약점과 강점이 모두 드러나 있다.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면 개인에 맞는 그리스도인으로 다듬어진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또한 이 때문에 영적 우월성을 억지 주장하는 근거 없는 자화자찬격인 엘리트주의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된다. 개인적 체험의 강조는 삶과 사역 속에서 잠재적인 은사에 열려 있도록 개인의 영적 성장에 많은 역할을 하는 반면, 신앙생활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항상 믿음, 소망, 사랑이 될 것이다. 은사로 받은 재능을 발휘해야 신앙의 여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5장   신비주의적 관점-글렌 힌슨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소통하고 대화한다. 관상 기도는 하나님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는 것이다. 관상 기도는 하나님이 창조된 질서 안에, 특히 인간 질서 안에 내재한다는 전제에 근거한다.

 우리가 현재 상태로 살아가면서도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볼 수 있거나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신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경우 신비주의자들이 영적 통로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겸손 또는 온유함을 우리 문화에서는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며 아마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게 되면 우리를 정화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도록 우리의 마음이 열린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유하지만 모든 성장이 고통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정화와 회복의 과정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이 고통을 정련사의 불이라고 말한다.

 관상 기도와 행동 사이에는 상호 관계가 있다. 압박과 투쟁이 널리 퍼져 있는 이 세상으로 들어간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의 영성이 깊어지고 개인적 인식이 성숙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관상 기도는 우리의 의도를 정화해 준다. 우리가 어려운 과업에 직면할 수 있도록 내적 재원을 집중시켜 준다. 관상 기도를 통해 세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이 변화된다. 관상 기도는 우리의 우선순위를 정해 준다.

.느낀점

 필자는 최근에 북한산에 올라갔다. 북한산에 올라가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고 또 각 봉우리를 올라가는 코스도 여러 가지다. 이와 같이 이 책에서도 성화라는 산을 올라가는 방법을 다양한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가 예전에 성화에 관한 개념으로 가졌던 것은 신비주의적 관점에 가까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더 깊이 친밀해지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공동체 생활도 해보았다. 하지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매일 예배드리고 오랜시간 기도해도 필자가 원하는만큼의 성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해서 제자리 걸음이었다. 어쩌면 변화가 없었던 것은 필자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뒤돌아보면 신비주의적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이 땅에서 어떻게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필자에게 있어서 해결해야 할 숙제이고 답답한 고민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이 필자의 답답한 고민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참으로 아쉬움이 남지만 그것이 당연한 것 같다. 성화란 이 땅에서 필자에게 있어서 완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루터주의적 관점과 개혁주의적 관점이 왜 완전할 수 없는지 좀 더 객관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완전한 성화를 구하는 것에 있어서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잘 지적해주고 있다. 필자의 경험을 미루어보아 완전한 성화를 이루고자 할 때 필자와 같은 잘못된 경험들을 추구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이 시간들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주시고 돌아서게 하신 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그 시간이 인생에 있어서 계속해서 낭비로 아니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위험이 있기에 분별함이 없는 성화를 향한 갈망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싶다.

 또한 필자는 성화에 대해서 너무 섣부른 결론의 모습을 가진 것이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필자는 성화에 대해서 무지함으로 지식 없이 필자가 원하는 성화의 큰 모습을 그렸다. “완전, 온전, 거룩이러한 모습들만이 성화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일상의 삶 가운데 아주 작은 것들을 너무 가볍게 여기게 됐다. 지금 와서 보니 아침에 제 시간에 일어나고 저녁에 제 시간에 자고 하루에 세 끼를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고 해야할 일들을 하고 이러한 일상적인 것들도 성화의 모습이라는 것을 미쳐 몰랐다. 감사한 것은 루터주의적 관점에서 성화는 기본적인 일상생활과 업무 가운데 이루어진다.”라고 설명할 때 필자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구나라고 확인 받을 수 있어서 기뻤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것은 루터주의적 관점에서 성화란? “우리에게 성화란 단지 칭의를 통해 구체화하거나  칭의에 익숙해져 가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상생활과 업무 가운데 이루어지는지 잘 설명되지 않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필자의 이해력이 부족하여 더 다양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교리와 삶의 방식이 분리되어서는 안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 안에서 성화가 이루어진다.”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루터주의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아쉬움은 구체적인 설명이 덜함에 아쉬움을 느낀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말하는 설명에 대한 문자적인 의미는 아주 조금 이해는 되지만 필자의 삶에 있어서 정확히 해석되고 체현되지 않음에 계속적인 답답함을 느낀다. 아마도 이러한 답답함으로 인해서 웨슬리주의적 관점이나 오순절, 신비주의적 관점의 경험이나 도덕적인 것들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분별없이 균형없이 사용할 땐 항상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교리와 삶의 방식이 분리되지 않는 성화의 삶을 살고 싶다. 일상 생활과 업무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성숙해지는 것을 경험하며 그 기쁨이 무엇인지 맛보면서 살고 싶다.

산의 정상은 아름다운 경치와 마음 속에 상쾌함을 준다. 하지만 그 정상까지 올라갈 때는 다리의 고단함과 목의 갈증 그리고 마음 속의 갈등이 항상 있다. 이러한 길을 혼자 갈 때 더 쉽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날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고단한 나그네길을 함께하심에 감사하며 그리스도 형제들과 함께 가게 하심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