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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그리스도인의 비전 책 서평

훈나겸 2018. 1. 6. 05:00

그리스도인의 비전

 

그리스도인의 비전

 

 

 

 

~~”라는 탄식과, “~~”라는 질문 속에서 왈쉬와 미들톤은 이 책을 써 내려간다. “북미의 기독교가 왜 그렇게도 사회와 문화 속에서 구현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가?”라고 저자들은 질문한다.

이 대답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 세계관의 철저한 포괄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라고 저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 대답을 통해 이 책을 읽고 있는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과연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또 성경적 세계관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성경적 세계관이 이 세상의 어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런 질문들이 떠오른다면 이 책을 더욱 주의 깊게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 책이 나온 배경은 두 저자가 1977년부터 1983년 사이에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하여 가르쳤던 이십여 개의 강의를 기초로 해서 저술되었다.’아마도 이들은 이 기간을 통해서 수많은 고뇌를 했을 것이며, 좀 더 정확하고 바른 것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도 그 몸부림이 멈추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흔적들은 책을 통해서 묻어 나올 것이다.

지은이 소개

브라이안 왈쉬박사는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기독교 학문 연구소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철학석사),1987년 몬트리올에 있는 McGill 대학교에서 박사학위(종교철학전공)를 받았다.한때 토론토 대학교에서 IVF 간사로도 활동한 바 있는 저자는, 현재 모교인 ICS에서 세계관 연구 주임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리처드 미들톤은 자메이카인으로 Guelph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 IVF 간사로도 활약한 바 있다. 현재는 뉴욕의 로체스터에 있는 Colgate Rochester Divinity School에서 구약학을 연구하고 있다.

이 책의 구조와 증명방법을 보면 문제제기와 답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문제 제기속에 새로운 용어들을 정의하고 비교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답변을 제시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맞는지 다시 한번 묻는 방법을 사용한다. 또한 앞의 내용들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반복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 방법 등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더욱 명확히 한다.

이 책의 목표는 성경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세속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종의 삶을 살도록 유도하는 통일된 기독교 세계관을 학생들이 계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서문에 쓰여 있다. 또한 혼자가 아닌 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영향력 있는 공동체를 각 영역 가운데 만드는 것을 꿈꾸고 있다. 이 두 저자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서 과연 바른 해답과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가?” 라고 나도 고민할 것이다. 또 다른 해답은 없는지 고민하려 한다.

특히 이 책을 통해서 보게 된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세계관이 과연 세상 가운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성경적 세계관을 정확히 가지기 위해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원론은 무엇인가? 기독교 속에 침투한 이원론은 어떤 것이며,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기독교 세계관을 교육시키기 위해 대학을 훈련기지로 생각하는 것과 모든 학문에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시키려고 하는 원대한 계획들을 볼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세상 가운데 이루기 위해 영향력 있는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현실적으로 지금 세상 가운데 보냄 받은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 얘기할 것이다.

 

 

 

 

1부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1장 세계관과 문화

 

안토니오 라는 청년의 사건을-여자 친구와 결별하게 되는 사건-통해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각(seeing), 바로 두 개의 세계관을 발견하게 된다.

세계관은 인식의 틀이며,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이다. 그 문화생활에 있어서 지도적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세계관의 차이에서 오는 일본과 케나다의 자녀 양육하는데 오는 문화적 차이를 보여 주며, 세계관으로 인해서 북미인과 딘족간에 땅을 보는 관점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과연 이 차이를 어떻게 분별할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일본의 생활 방식과 케나다의 생활 방식 사이의 대조를 볼 때, 한 쪽의 세계관은 단체, 조상 ,태양신, 충성과 감사에 대한 불교, 신토, 그리고 유교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반면, 또 한편의 세계관은 개인, 자율성 , 그리고 경제적 진보에 대한 기독교 신앙과 인본주의적 신앙의 혼합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두 인생관은 그 각각의 인생관의 추종자들을 전혀 다른 생활 방식으로 이끈 것이다.

북미인과 딘족간에 땅을 보는 관점을 보면 케나다인들은 그 땅을 변경으로 인식한다. 서구 문화의 특징적인 견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대립으로 보는 것이다. 자연은 하나의 위협이다. 난폭하고 비이성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 이성적인 지배에 의하여 길들여지고, 순화되고, 복종되어야 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사상은 이용이다.

딘족은 자기들을 땅과 끊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들은 땅을 사용하며 그것의 관리이이 되어야 한다. 땅은 자기의 정체와 자존심의 원천이다. 땅은 마치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와 같다. 이렇듯 똑같은 사물을 보는데도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그것에 결과는 천지 차이다.

 

2장 세계관 분석

 

모든 사람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세계관은 우리의 가치 기준을 결정하고, 우리 주위의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게 하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가장 가치 있는 것과 무가치 한 것을 구분하게 한다. 세계관은 언제나 공유 되는 것이며, 공동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세계관들은 극히 정신적이다. 그것들은 종교적인 현상들이다.

 

세계관은 궁극적인 신앙의 결단을 기초로 하고 있다. 신앙의 결단이란 무엇인가?

(1)나는 누구인가? (2)나는 어디에 있는가? (3)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4) 그 치료책은 무엇인가?

바로 이 물음의 답을 통해 우리의 세계관이 형성된다. 좋은 세계관을 만들기 위해서 이 세계관을 평가하는 방법이 있다.

첫째는 현실성이다. -세계관이 달성해야 할 것을 달성하고 있는가? 그 세계관은 그 세계관의 추종자들에게 삶 전체를 열어 주는가?

둘째는 내적인 통일성이다. 세계관이란 제멋대로 모여진 일련의 신념들이 아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통일적인 시각이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논리적인 일관성이 라는 점보다는 결단의 통일성이다.

셋째는 개방성이다. 다른 세계관 속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우리 모두는 그것을 배우고 그것에 비추어서 우리의 세계관을 수정할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세계관을 판단하는 기준은 성경이다.

여기서 저자도 주장하듯이 성경을 올바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 성경적 세계관을 발견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종종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볼 때가 많다. 그리고 지적인 부분과 계시적인 부분을 균형 있게 사용하는 훈련이 안 돼있다. 아쉬운 부분이라면 저자가 올바른 성경 보는 법과 해석하는 법을 보충해 주었으면 좋겠다.

 

 

 

2부 성경적 세계관

 

 

3장 창조

 

하나님이 말씀과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말씀하시매 피조물이 순종 하였다. 지혜를 통하여 계획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을 만드셨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

성경의 세계관은 그리스도 및 구원과 함께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창조와 더불어 시작한다. 창조는 성경의 출발점이다. 우린 십자가와 구원의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죄와 구원의 이야기를 하려면 창조를 알아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 나란 피조물의 존재의 의미는 완전히 의존적인 것이다.’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또 하나님과 피조 세계는 언약적인 관계다.

창조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 책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 속에는 땅을 다스림, 하나님을 섬기느냐 우상을 섬기느냐 라는 종교적인 선택이라는 두 개의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 이 말을 요약한다면 이렇게 쓸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청지기로써 땅을 개발하고 보존하고 그 가운데 공동체를 이루어 문화를 발전시키는 사명을 받은 존재라고 말한다. 또 이것을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신분으로써 이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말씀과 법에 의존하는 것이다.

 

4장 타락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라는 질문의 대하여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순종이라는 해답을 저자는 제시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뿐이다. 주님을 섬기고 그의 뜻에 순종하든지, 아니면 주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든지 하는 것이다. 이 영적 대립의 문제는 ,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하나님의 형상의 기본적인 원리는, 야웨를 대신해서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은 문화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성격이지만, 성경은 그 용어를 무엇보다도 타락 이후의 인간과 연결시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현상이라는 말의 충만한 의미는 인간의 불순종, 특히 우상 숭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를 분석해 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 본질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우상 숭배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 대신으로 하는 어떤 이이다. 우상 숭배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로부터 독립적이며 자율적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며, 그의 정당한 왕권을 배격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 활동의 전 영역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그의 왕권을 인정하도록 부름 받았다. 성경적인 세계관에 있어서는 우리의 모든 생활, 그 모든 국면들이 종교로 구성되어 있다.

그 예로 성경은 바른 농사법에 대한 농부의 지혜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적인 삶의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그 부분에 있어서도 농부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법, 그의 창조의 규범을 분별하고 그것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향해 사랑이 충만한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의 종교적인 본선이다. 우리의 모든 문화적 삶은 야웨의 규범에 종속되는 것이며, 우리는 그에게 순종의 응답을 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하지만 타락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기 보다는 우상을 섬겨온 파산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피조 세계는 타락되어서 구속을 바라며 신음하는 세계이다.

 

 

5장 구속

 

무엇이 치료책인가?”라고 질문하면서 타락으로 인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 나가고 있는지 쓰고 있다. 그 근거는 창세기 3장을 통해서 심판의 선언 한 가운데 구속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창조와 마찬 가지로 구속도 본질적으로 언약적 이다. 여기서 노아와의 언약을 통해 최초의 언약을 보게 되며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와 맺으신 언약 관계의 기초 위에서 맺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 하나님께서 잠정적으로 자신의 언약을 한 곳으로 집중하심을 볼 수 있고, 잠정적인 거룩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창조하시고, 잠정적으로 정결케 된 땅 가나안에 살게 하심을 볼 수 있다. 이 땅에서 메시아를 탄생시키고 전체적이고 완전한 창조의 구속을 가져 올 그 분이 오실 배경을 마련한다. 또 하나님 나라 새 언약을 보게 된다.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일들을 이야기하며 성령이 하실 일들을 기록하며 성령을 통해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것을 설명한다. 이것은 단지 우리 영혼뿐만이 아닌 문화 전체의 창조시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통하여 하시는 일은 우리의 삶의 흐름의 방향을 다시 정해 주는 것이다. 구속이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회복시키는 것으로서, 이것은 본질적으로 우리를 재창조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원래 의도된 대로의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그 흐름이 원래의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의 모든 측면들이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또한 모든 측면이 타락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구속될 것이다.

 

2부를 통해서 고민 되는 것은 과연 믿지 않는 자들이 이 성경적 세계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왜냐하면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부분이 명확히 이해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라는 것이다. 이 책이 먼저는 믿는 자들이 보면서 공감하고 저자의 주장대로 바른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공동체가 만들어져야겠지만 종국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이 진리가 들어가서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도 제 2부를 통해서 새로운 시각의 용어들을 접하게 되어서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3부 현대의 세계관

 

6장 이원론의 문제

 

왜 우리는 우리의 생활 방식과 성경적 세계관 사이에 상당한 간격을 발견하는가?”왜냐하면 이원론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관은 삶의 대부분의 영역에 대하여 무관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런 무관함은 성경에 대한 배신이면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전 영역의 주인이시라는 우리의 신앙 고백에 대한 배신이기도 한 것이다.

이원론은 현실을 근본적으로 분리된 두 개의 범주, 곧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혹은 성스러운 것)는 일차적으로 교회와 동일시되고, 삶의 나머지 부분은 세속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 문화, 성경을 보는 우리의 이원론적인 태도들을 설명한다. 왜곡된 시각을 해결하는 방법은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서,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되기만 하면 우리의 피조물로서의 사명은 선한 것 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6장을 통해서 예전에 읽었던 천국만이 내 집은 아닙니다.’(폴마살지음),‘평신도 신학’(송인규지음) 생각났다. 이 책 속에도 세계관과 이원론에 대해서 나온다. 어쩌면 나처럼 이원론이라는 얘기를 잘 들어 보지 못 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들을 함께 추천해 주고 싶다. ‘천국만이 내 집은 아닙니다.’ 경우 쉽고 재미있게 일상적인 예를 들어가며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오늘을 누리는 법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주신 문화의 회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평신도 신학을 통해선 좀 더 구체적인 우리 속에 침투된 이원론을 보게 될 것이다.

 

7장 이원론의 발전 과정

 

이 장에선 어떻게 해서 이 이원론적 세계관이, 오늘날 서구 문화를 이끌어가는 세속적인 인생관이 되었느냐 하는 것까지 살펴볼 것이다. 교회의 생명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 바로 헬레니즘이었다. 그 중심에는 플라톤이 있다. 플라톤적 사상에서는 이원론이 그 기초가 있다. 불변하는 관념들과 불안정하고 가변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초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플라톤에게서 발견했던 문제들 중 하나는 그가 너무 이성주의적 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계시의 여지가 남지 않게 된다. 영적인 것 대 물질적인 것의 이원론은 이제 서구의 지적인 전통 속에 고정되어 있다.

어거스틴은 인간을 하나의 통일된 존재로 보지 못하고 말았다. 도리어 그는 이성적인 영혼이 육체 속에 거주한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의 이원론은 자연히 그로 하여금 성에 대하여 상당히 부정적이 견해를 갖게 했다. 플라톤주의자인 어거스틴은 영원의(혹은 영적인)영역과 시간의(혹은 물질적인) 영역 사이의 분리를 믿었다. 영호의 고향은 영원한 곳이고, 육체의 고향은 시간적인 곳이다. 어거스틴으로 세계관이 교회화된다. 은혜의 영역이 사람의 영적인 생활로 제한되고, 교회가 그것의 보호자로 이해되는 한 제도적 교회에다가 과장된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아퀴나스는 그들이 선하게 피조되었음을 강조했다.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계시보다는 열등하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성이 비록 불완전하긴 하지만 우리의 자연적 경험에 대한 진리를 얻기 위한 참된 인도자가 된다고 긍정했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와 연합된 이성적 영혼으로 창조되었으나, 또한 그에게는 은혜의 초자연적 산무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창조시에 주어진 이 은사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은 그 위에 덧붙여진 은사를 되찾는 것이다. 아퀴나스에게서 발견되는 문제는 그가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구분함으로써, 또한 타락과 구속의 범위를 초자연적인 것에만 제한함으로써피조 세계의 내적인 분열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아리스톨텔레스적인 것과 플라톤적인 것은 모두 그 근원이 희랍이지 성경은 아니다.

이원론은 우리의 성경 해석을 왜곡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생활을 방해한다. 이원론의 가장 비참한 효과는 필연적으로 이중적인 충성을 가지게 한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두 주인을 섬기도록 강요한다. 영적인 영역인 교회의 일들이 자연적인 세계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피조된 삶의 어느 한 측면을 부당하게 격상시키는 것은, 그 효과에 있어서는 우상 숭배의 한 형태이다. 우리는 삶의 교회적 측면이 전체 삶이라는 참된 배경에서 분리되어서 우상처럼 절대화된 것을 본다. 그런 절대화가 복음을 삶 전체와는 무관한 것이 되게 한 것이다.

 

 

8장 세속적 세계관의 발흥

 

세속적 세계관이 처음 나타난 것은 언제였는가? 이것을 답하려면 질문을 하나 더해야 한다. 근대 유럽의 역사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답은 1470년과 1700년 사이에 근대 세계가 탄생되었다고 말한다면 공정할 일이다.

근대에서 변하게 된 것은 세속주의일 것이다. 근대 세계가 본질적으로 세속적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말은 근대인들이 종교에 대한 그들의 흥미를 상실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근대 세속주의의 핵심, 곧 인간 자율성의 공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근대 세계관 속에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법이 되고 있다. 세속주의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은혜라는 초월적인 영역을 세속적 견지에서 자유라는 인간적 영역으로 환원시켰다.

자기의 자율성과 자유에 대한 교만한 의식 속에서, 근대인은 자연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면, 자신의 자유로운 인간성 개발을 위한 광활한 영역으로, 또한 자연 현상을 완전히 지배함으로써 인간의 주권을 드러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장으로 보았다.

이것은 과학주의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으며 그로인해 인간 자신이 우상이 되고 말았다.

 

 

9장 우리 시대의 신들

 

현재 지배적인 서구의 세계관은 하나님, 혹은 신들의 권위를 거부하고, 이간 스스로 규범을 정하는 인간 자율성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그런 인본주의적이며 세속적인 본질에도 불구하고, 서구 문화는 다른 신들을 섬겨 오고 있다. 그 세 절대자는 바로 과학주의, 기술주의, 그리고 경제주의이다.

 

과학주의: 철로 된 다리

곧 자연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그리하여 지배하는)능력이다. 과학주의는 현대 종교의 첫 번째 절대자이다. 현대 세계관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이성이다. 특히 그것이 과학적 방법이라는 형태로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을 망라해서 제공할 수 있다는 깊은 종교적 신념이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과학을 응용함으로써 지상의 유토피아, 곧 우리가 손수 만들어 가고 있는 천년 왕국 시대를 향하여 꾸준히 전진하고 있다.

기술주의: 힘을 상징하는 놋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니, 곧 효율적이요 생산적인 기술의 놋, 자연에 대한 형성적이요 기술적인 지배이다. 이 기술주의는 과학주의의 성과를 기초로 하고 있다. 과학주의가 전지의 약속을 제시하는 한편, 기술주의는 우리에게 전능을 약속한다.

진보의 궁극적 목표는 경제적 성장과 물질적 번영인 것 이다. 중세인들이 죄악시했던 허욕, 이기심, 탐욕 등이 이제는 경제 체계의 종교적 기초가 되었다.

경제주의: 황금 머리

경제주의는 물질적 부요를 약속한다. 이것이 바로 세속적인 구원이다.

다니엘 2장의 느부갓네살이 본 신상을 부위별로 구분하면서 이것을 세상의 우상으로 연결하는 이 부분은 처음 접해 보는 내용이었다. 매우 신선한 해석이었다.

 

 

4부 성경적 세계관의 적용

 

10장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

 

피조 세계 속에는 자율성이란 없다. 모든 것은 언약에 의하여 창조주에게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언약에는 약정의 내용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 약정들을 순종하면 축복이 넘칠 것이고, 불순종하면 저주가 따를 것이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죽어 가는 문화에게 치료를 제공하라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시키고 자본주의적 생활 방식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의 선두에 복음주의자들이 종종 서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현대 문화의 중심적 특성 가운데 많은 것들을 보호하기를 원하는 입장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우상을 예배하기 위하여 존속하는 문화의 형태들 둘 다 지지하려는 시도이다.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다른 문화적 비젼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적인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비젼이어야 한다. 이 기독교적인 문화적 비젼은 포괄적이어야 한다.

이런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우상을 버려야 하고 삶의 다차원성을 인정해야 하며, 피조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규범에 대하여 순종으로 응답해야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서로서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기 시작해야 한다. 현대의 세계관은 환원주의적이다. 즉 현대의 세계관은 삶의 모든 것을 경제적 차원, 기술적 차원, 혹은 과학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놓는다. 그렇다면 삶의 참된 다차원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다차원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삶의 모든 측면들에 각각의 정당한 위치를 부여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성의 규범들이 비난의 세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문화가 문화생활을 계속 영위하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몇 가지 규범들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 규범에 대한 순종은 기독교의 문화적 증거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다. 문화의 회복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갱신된 응답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피조 세계가 다차원적인 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법도 다차원적이다. 그 법은 인간의 자유에 무엇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롭고 역동적인 응답을 위한 배경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규범의 모든 것을 동시에 실현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우리는 야웨에 대한 언약적 순종 속에서 우리의 문화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우리의 갱신이 공동체적인 것과 똑같이, 기독교의 문화적 비젼을 실행해야 할 우리의 사명도 역시 공동체적인 사명인 것이다. 우리에게 공동체가 필요한 것은 그 문제들이 너무나 크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공동체를 기독교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예배이다. 그 공동체의 예배는 단순한 의식적 활동 정도로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의 전 생활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11장 세계관과 학문

 

대학은 문화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대학은 치료의 능력을 발휘하는 기독교적 증거를 위한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대학은 서양 문화의 신경 중추이므로,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 곳에서 증거하며 공헌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쇠퇴하는 우리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치유의 왕국의 매우 유능한 일군들이 될 것이다.

세계관은 궁극적 질문들에 대한 전이론적인 대답이다. 세계관과 철학 체계는, 비록 이 양자가 실체 전체에 대한 견해이긴 하지만,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세계관이 그런 철할 체계의 기초가 된다.

대학을 전략적인 요충지로 본 이 관점 또한 예리한 통찰력인거 같다. 아마도 이 저자들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접하고 가르치다 보니 발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 저자들의 주장처럼 교육의 영역이 기독교 세계관으로 뿌리가 내려지길 소망한다.

 

 

12장 기독교 철학의 틀을 정립하기 위하여

 

철학화 작업을 위한 기독교적인 시도는, 인간과 그들의 이론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법(혹은 말씀)에 종속되며 또한 그 법에 대한 응답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조망과 함께 시작된다. 모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법에 종속된다는 의미에서 종속적이다.

학문에서는 다차원성이 환원주의에 의하여 흐려진다. 환원주의는 단순히 이론적으로 잘못된 개념 정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상 숭배에 해당된다. 지난 수 년 동안, 심지어 신앙까지도 어떻게 이런 요소 혹은 저런 요소로 환원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마르크스는 종교를 경제생활의 한 요소로 환원시키고 고전적인 자유주의는 종교를 사회생활의 한 양태로 보았다. 리츨의 신칸튼주의 신학에서는, 종교란 가치의 체계였다, 록크의 합리주의는 신앙을 논리의 체계로 환원시켰다. 이런 여러 이론들은 어느 정도의 타당서을 갖는데, 이는 피조 세계가 참으로 다차원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종교를 이런 차원들 중의 어느 하나로 환원시키면, 우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연구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이 제기하게 되는 철학적 질문은, 어떤 근거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환원주의적이라고 판단하는가하는 것이다. 우리가 환원주의를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환원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구를 포함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그의 주되심에 복종시키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또한 우리는 개인적으로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도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학생들은 직업 지향적인 경쟁적 개인주의를 멀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궁극적인 충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함께 공부하고자 하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단순히 전문화된 교육뿐만이 아니라, 참된 교육을 받기에 충분한 시간을 얻기 위하여, 일 년간의 과외 연구를 하는 일까지라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성경적으로 영감된 철학적 틀에 뿌리를 둔 학문 활동을 함으로써 우리는 창조주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육신이 되신 말씀-를 증거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가장 눈에 들어 온 부분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서문에 맨 마지막 문장이다. “ 브라이안 왈쉬, 리챠드 미들톤 1983년 성탄절에, 몬트리올에서

왜 이 문장이 가장 눈에 들어왔냐면 바로 1983년이라는 년도 때문이다. 지금 2006년이다. 이 책이 쓰여진지 23년이 지났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이 생각났다. “과연 현재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23년 이라는 시간 속에서 이 저자들이 말하는 일이 얼마만큼 일어났을까? 교육에는 과연 기독교 세계관이 뿌리로 있는가? 또 영향력 있는 공동체들은 얼마나 생겨났을까? 내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만 느끼는 것은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공감되어진 부분은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지만 이런 바른 생각을 하는 소그룹들이 모여서 각기 세상 가운데 보냄 받은 영역에서 영향력을 나타낸다면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시각이 긍정적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생각과 좋은 일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하나가 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 가운데 창조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다스림의 영역을 완전하게 회복하긴 힘들꺼라 생각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9~12절 말씀

 

이 책을 통해서 우린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가치관을 보았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오랫동안 우리의 삶 가운데 많은 영향력들을 끼쳤음을 알고 있다. 반대로 이것이 잘 못되면 얼마나 위험한지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보냄 받은 자로써 또 청지기로써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공동체적으로 힘써야 한다.

책을 읽고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이 대안들이 나왔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난 배우는 사람이고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솔직히 대안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함께 몸부림 친 다면 작아 보일지라도 변화가 있을 꺼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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