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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상사
Ⅰ.서론
저자는 신학을 세 가지 A,B,C유형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B유형”의 신학들뿐만 아니라 “A유형” 신학들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계를 지적한다. 후자는 너무 엄격하고, 너무 과거에 묶여 있으며, 하나님이 하시는 새로운 것들을 보려는 데에 너무 반항적이다. 전자는 이성적이고, 미래에 관하여 너무 낙관적이며, 악의 세력을 너무 감지하지 못한다. 이 두 유형들은 너무 정적이고, 너무 비역사적이어서, 21세기의 새로운 세계를 다룰 수 없다. 그러한 위기 가운데 종종 잊혀졌던 C유형의 신학은 시사하는 바가 많으며, 이 책에서 약술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은 현재의 위기나 미래의 위기들을 위한 신학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21세기를 직면할 때 복종, 희망, 그리고 위탁의 정신으로 직면할 수 있도록, 초기 기독교 전통에는 우리 모두를 도와줄 수 있는 자원들과 패러다임들 있다는 것을 단지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Ⅱ.본론-요약
제 1부 고전적 형식의 세 가지 유형
제 1장 지역과 인물
1. A유형-카르타고에 터툴리안은 처음으로 기독교 신학 용어를 라틴어로 발전시켰다. 또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용어도 만들어냈다. 터툴리안의 기본적인 신학적 관심을 특징지을 하나의 단어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법일 것이다. 그가 보았던 것처럼, 기독교는 그 안에서 궁극적인 우주의 법, 즉 하나님의 법에 대한 계시를 받기 때문에 어떤 인간적 철학보다 우월하다.
2. B유형-알렉산드리아는 플라톤 철학이 우세해서 오감으로 지각되는 가변적 실재들 배후에 놓인 불변의 진리를 발견하는 데 관심 있었다. 오리겐의 사상에 중심 되는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오리겐의 신학은 진리라는 용어로 가장 잘 특징지을 수 있다. 오리겐의 주요한 과제는 철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일치점을 발견하여 드러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3. C유형-이레네우스는 하나님을 신적인 목적들 방향으로 양떼를 인도하시는 위대한 목자로 보았다. 이레네우스의 중심 주제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에 대한 신실한 이야기라는 의미에서의 역사가 아니라-비록 그러한 사건들이 실로 역사의 부분일지라도-, 오히려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미래를 향하여 인도된다는 의미에서의 역사이다.
제 2장 하나님, 창조, 원죄
이 신학자들의 시대에, 교회는 이단들의 내적 도전 외에 이교주의의 도전-그리고 이교의 구체적인 정치 형태인 박해-에 직면하였다.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오리겐의 신학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정황 안에서이다.
1. A유형-비록 터툴리안이 그의 시대에 있었던 다양한 이단들에 반대하는 여러 저작들을 저술했을지라도, 가장 방대한 저작은 바로 마르키온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상당한 양의 신론과 창조론은 마르키온파의 가르침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터툴리안은 하나님을 심판관과 입법자로, 창조를 완전하고 완성된 질서로, 원죄를 우리가 물려받는 것으로 주장했다.
2. B유형- 오리겐은 하나님을 이교도들이 생각하는 지극히 선한 존재와 같다고 설명하길 원했고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불변적인 존재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부정신학의 배경) 또한 우리의 존재의 목적은 이 진리 되신 하나님을 명상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창조에 있어서도 두 개의 창조를 본다. 영혼만 있었던 완전한 상태 그곳에서 일자의 하나님과 교제함 하지만 죄로 말미암아 두 번째 창조가 필요하게 되어서 육체를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두 번째 세상의 창조에서 원창조의 곳으로 가기 위한 장소이다라고 생각한다. 죄는 하나님 명상하기를 중단한 것이다.
3. C유형- 이레내우스는 하나님을 다른 두 유형과 다르게 아버지시라는 관점으로 보았다. 이레내우스에게 원창조는 하나님과 인간 피조물 관계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다. 역사는 이레내우스의 근본적인 사고 범주이기 때문에, 그는 바로 그 창조에서 역사의 시작을 보는데, 역사는 그러므로 죄의 결과가 아니다. 죄가 없었을지라도 역사는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다른 과정을 취했을지라도 말이다. 이레네우스는 죄를 정의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이 결국 선과 악을 알아서 영원히 살고 “신들처럼” 되도록 의도하셨는데 뱀의 자극으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계획들을 중단시키려 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앞서간 불순종이다. 원죄에 있어서 이레네우스는 모든 인류는 그 머리가 아담인 하나의 몸과 같다고 믿었다. 머리인 아담이 범죄했을 때, 전체적인 몸-즉, 우리-은 그와 함께 범죄했다고 주장한다.
제 3장 구원의 길
1. A유형- 터툴리안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이며 복음은 새 율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주된 목적은 우리에게 회개의 율법을 주시는 것이었다. 그 율법에 따라 회개하는 자는 누구든지 세례 받고, 더 이상의 죄를 짓지 않고, 구원받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세례는 회개를 확인하고 또한 죄인을 씻어주는 행위이다. 그러나 세례 받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적이다. 당시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터툴리안은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이 후에 순교로 그들의 신앙을 증언하고 회개하면 그들을 하나님이 진정 용서하신다고 믿었다. 터툴리안은 세례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으로 보았기 때문에 세례 받은 후에 죄를 짓는 문제의 있어서 경고한다. 하지만 이러한 초대교회의 관점 세례 후의 죄의 문제의 해결로 인해서 후대의 신학은 연옥이 있다고 주장했고, 이것을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이며, 고해제도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
2. B유형-B유형의 신학은 우리의 무지를 일차적인 문제로 본다고 말하면 정확하다. 즉 일자에 대한 명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천상에 있는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필수적 비전인 조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육신한 말씀, 혹은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구원 과정에서 예수님의 주된 기능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조명을 전달해 주시는 것이다.
3. C유형-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의 주된 사역을 우리를 정복한 권세들을 대항한 승리로 묘사한다. 그리하여 해방 후에, 갱신된 성장 속에서 창조주와의 더 위대한 교제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하나님으로 인식한다. 총괄갱신으로 이레네우스가 의미하는 바는, 인류의 역사를 재연하여 사단의 사역을 원상태로 돌리는 것과, 새로운 머리 아래 새 인류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레네우스는 세례를 포도나무의 가지들, 즉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게 하는 접붙임이다라고 한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에 우리의 죄가 씻겨 없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히 그 접붙임 때문이다. 즉, 그 물이 우리를 씻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에 의해 그분의 승리의 참여자가 되고, 그러므로 죄의 권세와 옛 창조의 예속으로부터 자유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레네우스의 인간 현존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성화”이다. 이 의미는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이 영원히 성장하여 언제나 그들의 창조주에게 접근하여, 언제나 하나님과 더 가까운 교제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들처럼 되도록”만들어졌다.
제 4장 성경의 사용
1. A유형-성경에서 터툴리안은 예언뿐만 아니라 율법도 본다. 신학의 근본적인 주제는 성격상 도덕적이다. 그의 일차적인 질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이다. 성경이 무엇보다도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은 우선 법률임에 틀림없다. 신약성경에서 터툴리안은 복음을 “그리스도의 율법”이라고 언급한다.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성경을 엄격하고, 문자적이고, 교화적인 자세로 읽게 된다 이것은 분명히 전체의 모습이 아니다. 왜냐하면 터툴리안의 저작들 안에는 보다 깊고 보다 역동적인 성경 이해를 보여 주는 구절들이 있기 때문이다.
2. B유형-오리겐은 성경에서 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들 너머로 관통하여, 불변의 것들 것 도달하는 길을 성경에서 찾는다. 오리겐은 성경 본문이 적어도 두 가지의 의미, 즉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보통이라고 생각한다. 오리겐은 문자적인 의미 보다는 영적인 의미를 더 가치 있게 보았다. 그리하여 알레고리적인 해석 방법을 통하여 상징적인 의미를 발견하려고 했다.
3. C유형- 이레네우스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증언하는 내러티브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들은 역사 속에서 전개된다고 한다. 성경은 신적인 경륜이다. 즉 하나님이 인류와 맺으시는 관계의 역사를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성경 내러티브에는 진보가 있고, 또한 연속성이 있다. 이러한 종류의 성경 해석은 보통 유형론적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사건들 속에서 후대 사건들, 특히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또한 교회와 마지막 완성의 “유형들”과”표상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제 5장 관점의 문제
1. B유형-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엘리트주의이다. 이 신학 덕택에, 제국이 그리스도인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을 때, 그 중대한 진보를 위해 기초 작업 중 많은 부분이 놓여졌었다. 상류층 사람들은 자기들이 속한 계층과 문화의 최선의 성취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교회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것이 B유형 신학이 기독교 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주된 이유였고, 왜 그것의 연속적인 변형들이 다른 여러 시대에 나타나게 되었는지의 이유였다.
2. A유형-터툴리안의 주된 관심은 기독교적 삶의 올바름을 설명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터툴리안은 그의 신앙이 가장 선한 로마의 도덕적 성취와 모순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원했다. 따라서 일단의 선한 도덕법들로 해석된다면, 기독교는 사회 질서를 지지할 의무가 있는 자들에게 유리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3. C유형-이레네우스는 가장 비천한 자들의 신성화와 위에서 도래하는 새로운 왕국을 약속하는 인간 역사에 관한 관점은, 그들의 권세와 현존하는 질서를 시인할 신학을 추구하는 권력자들이 이레네우스와 절교할 필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제 2부 서구 신학의 과정
제 6장 후기 교부신학: 어거스틴의 역할
참으로 변증론자들은 그들의 적들에게-그리고 사실상 그들 자신들에게-기독교는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투박하고 무질서하며 급진적인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애써 왔었다. 이리하여 B유형 신학이 기독교는 결국 그리스 철학과 양립할 수 있다고 보여 주었던 것과 똑같이, A유형 신학은 로마의 법과 질서에 대해 똑 같은 것을 보여 주었다. 어거스틴은 본질적으로 A유형신학이었던 것을 B유형으로부터 차용한 요소들, 특히 신론과 영혼론과 결합한 것은 중세에 규범적이 되었다. 그 기간 동안, 교회가 법과 질서를 보존하는 과제를 스스로 떠맡았을 때, 어거스틴의 위계적 질서에 관한 이해-다른 원천들로 강화된-와 정당한 전쟁과 같은 항목들에 관한 그의 이해는 매우 유용한 것으로 입증될 것이었다.
제 7장 중세 신학
중세 시대 교회는 사회 질서를 세우는 데 있어서 점점 능동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역할을 위해, 법과 도덕 질서를 강조하는 A유형 신학이 특히 유용했다. A유형의 신학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고해 제도는 중세 시대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그러한 정황 속에서 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갚아야 할 빚이다. 세례는 이전의 모든 죄들-그리고 오직 그 죄들만-을 씻어버린다. 세례 후 저지른 죄들은 오직 고해와 그러한 맥락 안에서 결정된 보상의 행위를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다. 이러한 결과 자기들의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보상을 하지 않은 채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공로의 보고 교리가 발전되게 되었다. 공로의 보고는 직접적으로 면벌부(면죄부) 문제와 관계되었다. 성찬식의 집행은 서구 기독교가 죄의 보상을 제공하려고 시도한 또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A유형 신학자들 사이에서조차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는데, 왜냐하면 가장 일반적으로 견지된 관점은 여전히 예수님을 승리자요 해방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리 보상 이론이 A유형의 틀 안에서 완벽하게 부합하며, 그러므로 조만간 그것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에리게나의 체계는 A유형 신학의 엄격한 율법주의에 대항한 저항의 한 실례이며, 서구 신학자들이 A유형의 대안을 찾았을 때 그들이 보통 B유형이 제공한 선택을 따랐다는 우리의 현 논제를 예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제 8장 종교개혁과 그 이후
루터는 죄란 우리가 선택하는 악한 행위나 우리가 품는 악한 생각 이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죄는 예속이고,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과 우리를 노예로 예속시키는 자보다 더 큰 권세의 개입을 통해서이다. 이 모든 것은 C유형 신학의 특징이다.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그를 C유형 신학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와 구속 활동을 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개혁자는 그의 역사관에서 A유형 신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루터는 역사를 죄의 결과로 보았던 것이다.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이것은 역사의 개입 없이 곧바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이 점에서 루터는 이레네우스와 완전히 다르다. 칭의에 대한 그의 압도적인 강조에서, 루터는 또한 A유형 신학의 틀 안에 머물러 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루터가 행한 C유형 신학의 부분적 재발견은 다른 주요 종교개혁자들에게서는 거의 눈에 띠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에 대한, 그리고 똑같이 엄격한 로마 가톨릭주의에 대한 17세기와 18세기의 응답에서 두 개의 다른 반응들이 일어났는데, 합리주의와 경건주의가 그것들이었다. 이 두 운동들은 모두 많은 점에서 상반되었고, 정통주의의 경직성을 비판하면서 다른 대안들을 추구했다. 합리주의는 다른 세기에 에리게나와 아벨라드와 같이 B유형 신학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성경적 역사관을 희생하면서 개인적 신앙을 주장하는 것에서, 그리고 특히 “경건”을 일련의 행위 규정들로 바꾸려는 후대 세대들의 경향에서, 경건주의는 A유형 신학의 영역 안에 남아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전통적 신학-A유형 신학-의 경직된 자세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확신되어 자유주의로 방향을 바꿨다. 자유주의는 역사적 성경 연구의 피할 수 없는 결과가 아니라, 그러한 연구가 B유형 신학의 정적인 틀 안에서 일어날 때 매혹적인 것이 된다. “현대”시대의 압력뿐만 아니라 역사적 연구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A유형 성경 이해를 계속해서 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B유형으로 주의를 돌렸다. 그들은 그리고 나서 성경의 역사적 과정 안에서 영원하고 보편적이며 불변하는 진리들을 추구했다.
제 3부 현대적 타당성
제 9장 20세기의 C유형 신학
몇몇 상황을 통하여 20세기는 의미심장하게도 C유형 신학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는 바르트의 영향을 통한 개혁신학의 부활, 룬드파 신학으로 대표되는 루터파 안의 새로운 흐름들, 전례적 갱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해방신학 등과 같이 다양한 현상 속에서 볼 수 있다. 이들 사이에는 거대한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의 공통점은 C유형 신학으로의 복귀다. 이제 C유형 신학의 이러한 재발견은 기대하지 못한 가능성들을 교회에 충분히 공급해 주고, 심지어 보편성과 기독교적 통일성을 새롭게 이해하는(그리고 고대의 이해를 재발견하는)길을 열어줄 수 있으리라 전망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신분, 혹은 교회 지도자의 신분조차 더 이상 과거처럼 큰 존경을 받지 못한다. 교회는 더 이상 공적인 학교들과 더 많은 사회가 기독교적 가치들을 가르치고 젊은이들로 하여금 삶에 대해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도록 양육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점증하는 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시장과 일터에서 유력한 관점들과 실제들에 반목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일상생활과는 전혀 별개인 사적인 것이라고 단순히 항복하거나 결정해 버린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씨름하고 그리하여 신앙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이러한 이해는 C유형 신학과 비슷하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기뻐한다. 그분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다. 이것은 C유형 신학의 중심적인 관점으로서, 20세기 말에 교회가 스스로 나아갈 바를 발견하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점차 필요해지고 있는 관점이다.
Ⅲ.결론
이 책을 통하여 본 발제자는 기독교 사상 가운데 100% 신학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하여 주장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자도 이 책을 통하여 기독교 신학의 유형을 A,B,C 로 설명했지만 어느 것 하나 100% 신학은 아니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B유형”의 신학들뿐만 아니라 “A유형” 신학들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계를 지적한다. 후자는 너무 엄격하고, 너무 과거에 묶여 있으며, 하나님이 하시는 새로운 것들을 보려는 데에 너무 반항적이다. 전자는 이성적이고, 미래에 관하여 너무 낙관적이며, 악의 세력을 너무 감지하지 못한다. 이 두 유형들은 너무 정적이고, 너무 비역사적이어서, 21세기의 새로운 세계를 다룰 수 없다. 다만 저자는 C유형의 신학이 21C 가운데 대안 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C유형의 신학이 21C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저자는 C유형의 신학이 다른 두 유형의 신학보다 가장 오래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다른 두 유형에서 C유형의 특징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단지 C유형의 신학이 다른 두 신학보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대안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현재의 신학의 풍토 속에서 C유형이 절충점이 될 수 있다라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신학의 풍토는 서로 다르면 함께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장로교의 신학과 감리교의 신학이 함께 얘기할 수 없다. 또한 장로교 신학 안에서도 서로 대립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서로의 절충점을 찾기 보다는 비난하고 자신의 신학이 우월함을 변호하기에 바쁘다. 이러한 현재의 신학의 풍토 속에서 C유형 신학의 재발견은 교회에 보편성과 기독교적 통일성을 새롭게 이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본 발제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상상을 해 보게 되었다. 만약 터툴리안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면 오리겐이 카르타고에 태어났다면 기독교 역사는 또 기독교 사상은 어떻게 됐을까? 왜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그 시대에 그 장소에 태어나게 해서 그러한 가르침들을 받고 자라게 하셨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 둘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태어났더라도 지금 이러한 문제는 계속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차이점들 가지고 계속 역사를 이끌고 계실까? 본 발제자의 생각은 서로 다름의 차이를 통해서 하나의 진리를 계속 남겨두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 말해 서로의 반쪽을 통해서 맞출 때 하나의 무엇이 나오듯이 말이다. 그 하나가 맞추어졌을 땐 서로의 반쪽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려져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한 부분이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 발제자는 서로의 다름이 다름이 아니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이 둘을 언젠가 만나게 하셔서 서로의 다름이 아닌 하나를 볼 수 있는 계시를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진리가 이 땅 가운데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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