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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설교
A. 내용요약
제 1장 설교의 우위성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중대한 문제는 이것이니- 우리가 설교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가? 현대세계에 있어서 설교의 필요성은 과연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두 가지 객관적인 제목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이 사실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이유요, 둘째는 교회 자체 내의 특수한 이유입니다. 내가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 밖의 세상에 유행하는 어떤 보통의 사상들을 의미합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더욱 문화적이며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독서를 하지 않았고 위대한 웅변가들에게 의지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에게 책이 있고 도서관과 독서에 필요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더 이상 필요없다.
나는 주저없이 맨 첫 자리에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심 상실, 진리에 대한 신앙의 감소 등을 놓겠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시야가 넓어야 합니다. 나는 “대설교꾼”이라 불려지는 자들에게 사람들은 반감을 가졌다고 믿습니다. 내가 뜻하는 바는 그들은 강단을 점령해서 그것을 지배하고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위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직업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형식이 알맹이보다 더 중요하게 되고, 웅변과 능변이 그 본질이 되어버려 결국 설교가 오락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나는 또 다른 요인은 참된 설교내용과 설교행위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라고 주장하겠습니다. 그것은 같은 형식에 관한 문제인데, 내가 언급해 온 조잡한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집의 발행이 설교하는 일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의식과 형식, 예식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더 위엄이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더욱 나쁜 것은 공적 예배에 흥미본위의 요소가 증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또 다른 전체적인 추세는 “개인 대 개인 간의 사역”, 소위 “상담”이란 것을 점점더 강조해왔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교회 자체 내에서 일어난 어떤 일반적인 변화입니다.
만일 설교자로 밀려난 이들이나 교회 내에 있는 탁월한 다른 인물들이 교회 밖으로 나와 정치, 사회활동이나 자선활동에 참여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전통적인 방식대로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것보다 더 많은 훌륭한 일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나 기독교 목사의 제일 첫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의 목회사역에서 다음의 두 방면을 주목해 보는 것 이상 흥미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적은 주님의 첫 번째 사역이 아니고 두 번째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제1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이것이 제1되는 일입니다. 가르치는 일이 첫째 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신양성경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대로 부활하신 후에도 여러분들은 똑같은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른 권능을 주려 하셨으나 그들의 주요 임무는 역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이 충만해지자 즉시 설교(전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다시 사도행전 4장에서는 교회의 기원에 관한 것이 나와있는데, 나는 이 점을 상세하게 취급하고자 합니다. 이 4장은 교회가 초기에 실ㅈ로 어떤 일을 행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전도하고 가르치기 위해 사람들을 파송할 분부를 받았던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단체도 정칙적, 문화적 공회도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참된 말씀 전파의 부흥은 언제나 교회 역사상 위대한 부흥운동을 가져왔습니다.
제2장 대체할 수 없는 말씀증거
이제 나는 좀더 나아가서 교회역사를 통해 지지받고 예증받았던 신약의 이 증거가 우리들로 하여금 말씀 증거의 우위성을 역설함에 대한 궁극적인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것이 신학적이라는 결론을 얻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참된 고통은 그가 하나님께 반역했고 그래서 부단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인간에 대한 성경의 진술이며 본래적인 인간성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영적 세계에 대하여, 사람 위에 임한 모든 은혜로운 세력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눈이 멀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무지”라는 한 마디 말로 압축시킬 수 있습니다. “눈멈”, “어두움” 등의 어휘는 무지를 지시하는 말인 것입니다.
나는 그저 구원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구원이란 사람들이 결하고 있는 “구원에 대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인도함으로 얻는 결과이며 또한 구원이 이 무지를 해결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구원이 사람에게 가장 큰 요구이며, 인가의 가장 궁극적인 곤경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결과인 무지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이것에 관해서 듣는 것이며, 자신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처리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교회와 목사의 고유한 임무라고 주장합니다.
나는 교회의 최우선적인 임무가 사람을 교육하는 것도,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치료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기본적인 명제로 잡아놓으려는 것입니다. 내가 주장하는 요지는 그런 것들이 교회의 제1차적인 목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제1차적인 목적은 이런 것 중 어느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람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끌어주고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피상적인 평안과 충족감으로 흐뭇해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피상적인 평안과 충족감은 실제 상태에 대한 진실되고 근본적인 이해를 막아버립니다.
사람이 이러한 임시적인 위안에 만족할 때 그는 곧장 자기는 건강하다고 단정해 버리므로 결국에는 참상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는 교회가 자기의 제1차적인 임무를 망각하고 한눈을 팔고 있는 동안 이러한 여러 사회 매개체들도 그와 같은 유의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악하지 않으면서도 진정한 필요를 숨겨버림으로써 악하게 되고 참으로 해를 끼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인 교회의 임무는 근복적인 문제점들을 도출해 내어 근본적인 방식으로 그것들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영국교호르 텅비게 한 책임은 대부분이 “사회복음적”설교와 제도적 교회가 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의 제1차적인 임무를 떠나서 다른 어떤 일을 할 때 동기야 아무리 순수하고 훌륭하다 할지라도 결과는 뻔합니다. 다만 이 이론이 실제로 표방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을 뿐입니다.
사회, 정치조건에 대한 관심, 개인의 행복에 대한 이러한 관심 등은 언제나 기독교 내에 개혁과 부흥, 참된 말씀 전파가 일어날 때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교회가 자기의 제1차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 다른 것들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강단에서의 복음전도는 성령에 의해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어 내가 설교가 끝나기 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는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내 의도는 복음이 참되게 강론되어진다면 설교자가 전혀 모르는 개별적인 문제라도 성령에 의해서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로서의 여러분의 임무는 영적 문제들을 취급하는 전문가적인 일입니다. 내가 말하는 취지는 개인상담이나 그 외 모든 활동은 설교를 보좌하는 수단이지 설교보다 앞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 전파자는 스스로를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 전도자는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에 모인 이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며 왜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 3장 설교내용과 전달행위
이제 세 번째 반론으로서 그 모든 것이 그룹토의에 의해서 더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 구태여 설교여야만 하는가? 이 설교가 대화, 소위 의견교환 등으로 대치될 수는 없는가? 이렇ㄱ 하는 것이 훌륭한 전도방법일 뿐 아니라 성경의 메시지를 인식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며, 그 방법이 현대에 있어서는 설교하는 것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내가 보기에 그 자체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으로, 하나님은 토론되거나 논박될 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계신 분이며 자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 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철학적인 명제로 착각하여 하나님에 관해 토론하는 처지로 빠져들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도출해 내는 두 번째 주장은, 이런 문제들 토론하는 데서 우리는 생의 가장 심각하고 가장 중대한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셋째로, 영적으로 무식한 자연인, 즉 비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한 토론이나 논쟁, 또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자연인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겸손해지는 것이라고 말해야 제격에 맞는 네 번째 요점입니다. 육에 속한 자연인은 먼저 교만을 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조명을 통해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문제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거나 토론, 논쟁하고자 하는 모든 견해는 바로 그 복음 자체의 성격과 본질에 반대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더 큰 논증과 반론이 있는데 그것은 소위 이로상으로는 그런 주장이 흠잡을 데 없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들으러 오지 않을 것이라 하는 주장입니다. 참다운 설교가 전해질 때 사람들은 모이게 될 것이란 점입니다. 나는 참된 설교가 있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 그것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그 주장은 즉각적으로 설교가 무엇인가?의 문제에 대한 논의로 우리를 이끌어 넣습니다.
어떠한 정의이든지 그것이 진정한 설교의 정의가 되려면 반드시 설교단에 선 사람은 거기서 하나님의 메시지,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의 설교는 바로 생명의 중심인 전인에 영향을 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설교는 듣는 사람의 문제를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으로 다루어 주는 것입니다.
설교에는 언제나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서 생사문제와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설교는 결심할 수 있는 지점까지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표적이요 목표입니다. 여기서 나는 설교의 두 가지 요소를 구분지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첫째로, 설교의 내용, 혹은 메시지- 즉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로, 설교행위입니다. 즉 “전달, 혹은 흔히 말하는 전파”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준비한 설교부터 고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나는 한번 더 이 제목을 두 항목으로 나누어야겠습니다. 설교 자체로서 맨 먼저 내용, 즉 메시지를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그 내용이나 메시지에 주어진 형태입니다.
우리의 설교, 곧 메시지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선적으로 메시지나 설교는 단순히 시사적인 내용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이들에겐 메시지가 하나의 일반적 정신함양이나 일종의 심리학적 요법입니다.
그 다음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다 지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깊은 명상, 사상을 가미한 철학운동과 활동, 현대인의 수준에서 현대인을 만나려는 시도, 원자시대에 사는 인간들에게 합당한 메시지를 찾아내려는 노력 등등 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그릇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의 효과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내가 강조했듯이 설교는 전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지나 설교를 결정짓는 것은 설교자가 받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설교내용은 신약에서 “말씀”이라 칭한 것입니다.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받은 바요 가지고 있는 바다-“내게 있는 것.”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고 추측하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받은 바를 전해준다. 나는 매개체요 통로요 도구요 대리자이다.
성경의 메시지 가운데서 이 두 항목을 인식해야 함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 구원의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케리그마로서 전도설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훈적인 면으로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정립시켜 주는 것인 디다케, 즉 성도의 덕성함양입니다. 그러면 첫째, 구원의 메시지, 복음전도 설교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데살로니가전서의 단 두 절 말씀 속에서 이에 대한 완벽한 요약이 있습니다. 그가 가르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을 견고히 세워주는 교훈”입니다. 나는 이것을 두 항목으로 나누려 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더욱 체험적인 면에 치중한 것과 순전히 교화적인 설교를 뜻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설교는 사실상 최소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초적으로 전도적인 설교는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은 있어야 합니다. 주로 체험적인 것으로서 교훈을 주는 설교를 나는 주로 주일 아침에 전했습니다. 그리고 보다 순수한 교훈적인 설교가 있는데, 나 개인적으로 볼 때 주간의 어느 한 날 밤을 택하여 그 설교를 했습니다. 나는 이 구분들이 너무 엄격하게 그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메시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편적인 안내역으로서는 그 세 가지 구분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4장 설교의 형식
이 세 가지 유형들간의 상호 관계성은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길은 신학과 설교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설교란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하며, 신학적인 토대를 보편적인 명제로 함을 전제해 둡니다.
신학적이지 않은 복음전도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복음전도가 아닙니다. 동시에 설교가 신학이나 신학의 어떤 국면을 강의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깨달아야 함은 매우 중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설교란 반드시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또 그것은 신학강의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설교와 신학 사이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설교자란 전체적인 성경 메시지를 포착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메시지는 물론 통일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자는 조직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신학에 매우 정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 설교자에게 있어서 신학을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또한 조직신학을 알고 그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설교란 결코 따로 떨어진 것이나 따로 분리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어느 특정 본문 안에 있는 교리는 보다 큰 전체 진리나 전체 신앙의 일부분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경으로 성경을 비추어 본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점에서 하나의 경고를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특정한 본문에다가 자기 나름의 조직신학을 무모하게 부과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특정 본문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석이 성경에서 발견되는 교리와 진리체계의 통제와 견제를 받아야 함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 설교 내용문제를 매듭짓기 전에 참조해야 할 또 다른 하나의 일반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 점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는 복음을 설교해야지 복음에 관하여 설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사람들에게 직접 들이대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통로이며 운반도구인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요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의 설교와 말씀의 사역을 세 가지 구분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물론 내가 말한 것보다 이 요소가 드러나는 것은 세 번째 형의 설교입니다. 그 설교에서 설교자는 전도하는 식으로 설교하거나 사람들의 제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더 큰 전체의 지체인 것을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 설교에서 구원이란 것이 단지 주관적인 것, 곧 멋진 감정이나 평화나 그들이 추구하는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중요하고 각자는 구원의 한 부분이기는 하나 더 중요한 것, 즉 복음에는 전체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설교의 형식을 알아보아야겠습니다. 내 견해로는 이 문제가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문제 중에서 최고의 난제가 아닌가 합니다.
설교란 수필이 아닙니다. 이 점은 설교와 수필을 분명하게 구분짓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기 때문에 반드시 언급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근거로 설교가 수필이 아니라고 주장하겠습니까? 나는 설교와 수필은 문체가 완전히 다르다고 규정짓습니다. 수필은 읽도록 쓰여진 것이고 설교는 맨 먼저 말로 전해지 것과 들을 것을 의도한 것입니다.
둘째로, 나는 설교하는 것이 강의하는 것과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강의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여 이 특정 주제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주게 됩니다. 설교의 호소는 거의 전부 마음을 향한 것입니다. 내가 주장하려는 강의와 설교의 큰 차이는 설교는 하나의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항상 해석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의 주제로 시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설교는 교리와 테마를 내포하고 있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바로 그 교리는 본문의 특정한 배경 가운데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설교란 주석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요 단순히 한 절이나 한 문구나 문단의 의미를 파헤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근본적인 취지는 설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란 규정된 형식을 가지는데 이 형식이 강해로 하여금 설교가 되게 합니다. 설교는 강해를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설교는 메시지로 변환을 시킵니다. 나는 한 편의 설교란 하나의 교향곡이 형식을 갖춘 것처럼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의문을 제기하고자, 혹은 어느 입장을 취급하기 위해 잠깐 동안 주의를 돌려야겠습니다. 에드윈해치는 1888년에 그의 히버트 강좌에서 초기의 기독교 설교는 완전히 선지적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르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통해 메시지를 받아 그 메시지들을 사전 검토나 생각이나 준비없이 전했다고 합니다. 그는 설교에 대한 우리의 생각, 특별히 내가 말해 나가고 있는 설교에 대한 사상이 신약과 거리가 멀다고까지 말합니다.
나는 이 문제를 아주 간단하게 다루길 원합니다. 문론 해치가 한 말에도 커다란 진리가 되는 점이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속단에 이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믿기로는 해치의 주장은 신약적인 증거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문제에다 이 형식을 가미해서 내용보다 형식에 더 큰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을 - 이 점이 해치가 교훈하는 바의 핵심입니다 -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신약 자체의 증거에만 입각해 보더라도 해치의 견해는 너무 지나친 것임을 주장합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 기사에서 보면 그 설교에 분명한 형식이 있으며, 베드로가 불쑥 내뱉거나 일련의 동떨어진 요점들을 나열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이런 문제에 대하여 자신을 지켜야 함을 제안합니다. 우리는 굳어지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사나 설교사는 이런 일들이 어떻게 해서 반동을 조장하는 극단으로까지 발전될 수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면 설교를 특징짓는 이 형식은 어떻습니까?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교준비를 시작할 때 택한 본문이나 구절구절들을 해석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드렸듯이 모든 설교는 반드시 강해식이어야 합니다. 한 사상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령 그렇게 한다면 매시간 똑같은 것을 말할 경향성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끝없이 자기 자신의 말만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택했다면, 과연 그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라는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설교준비에 있어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본문에 나타난 원리를 뽑아 내고, 그것이 아주 분명하게 부각되었으면 그 설교를 들을 사람들에게 바로 이 원리를 어떻게 밝히 드러낼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원리를 완전히 포착하였으면 이제 이것을 명제들, 또는 대지으로 나누는 문제에 이르게 됩니다. 설교자도 그의 개관적인 서론에서 주요 테마와 그 테마의 여러 요지들을 지적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반드시 그 설교에서 이것들을 상세하고 질서있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단코 설교자는 자기가 뽑은 소제목들이나 대지들을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 반드시 앞뒤가 맞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개 요지들은 전체 속의 부분이며, 모든 요지들을 다룸에 있어서 반드시 무언가 전진되어 나가는 일이 있어야 하고 더 큰 문제를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나타냈을 때 중요한 것은 설교자는 자기가 말해온 것을 설교자가 목표한는 것에 적용해 나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 여러분은 여러분이 말하고 있는 것을 적용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적용이나 권고하는 바의 핵심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설교에 있어서 죽고 사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모든 단편적인 설교는 그것으로 완전하고 그 안에 이러한 전체성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 번 설교에서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설교하면, 시작할 때 반드시 전의 설교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을 몇 문장으로 요약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 모든 일이 어째서 필요하냐고 물어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은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선전하고 복음을 높여주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어느 특정한 설교자를 들어서 말하기를 “그러나 어떻습니까? 거의 한 편의 설교도 준비하지 않았던 사람들인ㄷ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크게 쓰셨던 사람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한 질문에 대해 분명히 대답합니다. 그것은 그 법칙을 벗어나는 예외입니다.
제5장 설교행위
설교행위란 들음으로써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어떤 것들은 사실이고 참된 설교를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설교자의 전인적 품격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강조하려는 두 번째 요소는, 권위로서 청중을 압도하고 진행해 나가는 지각력입니다. 이 개관적인 설교자 상과 설교를 수행하는 면에 있어서 다음 요소는 자연스러움의 요소입니다. 설교내용이 앞에서 말한 방식대로 주의깊게 준비되었다 할지라도 설교자는 반드시 설교를 수행할 때 설교를 전하는 데 있어서 자유스러워야 합니다. 자기가 준비한 것에 너무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 자유로움은 순간적인 영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하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입니다. 설교하는 일이란 성령의 감화와 능력을 뒷받침한 행위이고 설교준비란 것이 설교내용의 준비를 끝마쳤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설교는 언제나 성령 - 그의 능력과 지배 - 아래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는 무엇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유로우시기 바랍니다.
다음의 요소는 “진지함”의 요소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진지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설교자란 항상 그가 강단에 나타나는 순간에도 거기서 행하는 일에 대한 심각함의 인상을 창조하고 풍겨야 합니다.
나는 그 다음에 부분적으로 교정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나는 “박력”의 요소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는 심각함이 진지한 체하는 것을 뜻하지도, 슬픈 기색을 뜻하지도, 침울한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생기에 넘쳐있어야 합니다. 박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진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갑시다. 그 다음은 열심, 열정감입니다. 이들 진행의 요소들은 모두 친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내가 열심이라 말할 때 그 의미는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자기 스스로 붙잡힘을 당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심도 열정도 회중들에 대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태도는 냉담해 보였고 학문적이고 틀에 박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설교자가 자기의 전인격을 동원시켰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 점은 필연적으로 “뜨거움”의 요소에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용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결코 냉담해서는 안됩니다.
설교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친밀한 접촉 여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나는 “긴박감”의 요소를 생각해야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자는 언제나 “끊임없이 근신”하고 있어야 함을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이유인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만일 설교자가 이 긴박감, 즉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그는 설교단에 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똑같은 이유로 해서 설교는 언제나 “설득력”에 의해 특징지워집니다. 설교자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진리를 그들에게 설득시키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만일 설교자 여러분이 사람들을 향한 이 연민의 요소를 결핍한다면, 모든 참된 설교에 있어서 극히 치명적으로 중대한 정념 역시 결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정념과 감격의 요소는 내게 있어서 아주 사활적으로 중대한 것입니다. 현세기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결핍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감격을 말하는 것이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감정주의를 싫어합니다. 사람들의 피상적이고 외면적인 감동을 충동하려고 일부러 애쓰는 사람보다 더 구역질 나는 것은 없습니다.
끝으로 나는 말씀의 능력에 대해 언급해야겠습니다. 결국 참된 설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설교는 사람이 지껄여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설교내용에만 치우쳐도 설교하는 행위에만 기울어져서도 안됩니다. 둘 다 진실한 설교에 없어서는 안되는 진수입니다.
설교의 주요 목표는 무엇입니까?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존전에 있다는 생각을 주는 것입니다.
제6장 설교자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다음에 논리적으로 오는 물음은 “누가 이런 일을 하는가? 누가 설교하는 자인가?” 또는 성경에 있는 대로 하면 “누가 이런 일을 감당하겠느냐?”가 될 것입니다. 내가 전제하려고 하는 제1원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소위 “평신도 설교”라는 것을 숙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외적인 환경이라고 하는 뜻은 교회의 상태나 수준에 따라 온전한 시간을 목회에 바치도록(특별히 설교를 하는 데) 한 사람을 지원할 처지가 아닐 때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풍족하게 강해지는 날, 즉 다르게는 그가 전적으로 그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그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 날이 오기를 갈망합니다. 내가 시험하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든지 설교할 수 있다거나 그래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우리는 무슨 근거로 이러한 설교관을 비평하는 것입니까? 나는 그 견해가 베드로전서 3:15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는 말씀과,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왜 그리스도인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진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은 설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소위 “평신도 설교”에 대한 궁극적인 비판이 무엇입니까? 즉 그것은 “소명”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이 완전히 틀려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문제를 소명에 대한 다음의 질문의 차원에서 살펴보십시다. 설교자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소명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가 여기에서 문제가 됩니다. 한 설교자는 설교하기로 결심한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을 하기로 결심하지 못합니다. 그는 심지어 설교하는 일을 소명으로 보려고 조차 하지 않습니다. 목사에 의해 영위되는 이러한 생활 모습이 젊은이들에게 자주 부각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목회 방면으로 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설교자(전도자)로 부름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당신은 어떻게 아십니까?” 나는 몇 가지의 확실한 시금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명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형태로 출발합니다.
그런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되어 나갑니다. 나는 이것을 목회에 종사하는 것을 하나의 직업이나 하나의 “생업”으로 생각하는 너무나 피상적인 사상에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진정한 소명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 즉 그들의 타락을 뼈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며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말하고 구원의 길을 알려 주어야겠다는 소원을 포함하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가장 중대한 시금석입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일은 도저히 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드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은 사람은 그가 부름받은 일이 무엇인가를 감지하고는 그 일의 두려움을 너무나 느낀 나머지 그것에 위축되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것도 점검되고 확증해 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의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 사람이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전에 그의 인품이 교회에 의해 확증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천성, 야망, 특정 직임에 대한 욕망 등이 사람의 마음속에 설교자가 되어야겠다는 욕망을 조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됩니다.
설교자는 비상한 영성으로 특징지워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는 진리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이른 사람이고 자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전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경건한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지혜로운 자여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러한 면에서 부족하다면 그는 설교자가 못 될 것입니다.
재능의 문제는 그러한 자지을 강조하고 나서만 오는 것입니다. 재능의 문제를 맨 처음에 놓는 경향은 내가 보기에는 현대교회의 비극 중 하나입니다. 설교하는 일이 우리가 서술한 식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고 조직신학과 정확한 해당본문의 의미 사이의 관계를 내포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분명히 어느 정도의 지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런 면에서 기본적인 최소치도 이르지 못한다면 그는 분명코 설교자로 부름 받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거기에다가 “말의 재능”를 첨가하려 합니다. 설교하는 행위, 실제적인 말하는 부분에 강조점을 두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망자가 말하는 은사를 받지 않았다면 다른 어떤 것을 가졌다할지라도 설교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소명에 대한 실수는 스스로에 의해서 야기되기보다는 너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볼어넣고 그렇게 하도록 종용하는 목사나 장로들에 의해서 더 많이 야기됩니다.
이런 소명받은 사람은 훈련과정에서 무엇을 필요로 합니까? 그는 첫째로, 어느 정도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왜 내가 이것을 강조하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로, 만약에 그 사람이 이것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의 설교에서 너무 지적이고 이론적인 경향이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심령의 일반적인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려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훈련을 마치며 좀더 전문적인 훈련에 들어가게 됩니다. 맨 먼저 성경지식과 성경의 메시지에 대한 지식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이제 신학공부 문제로 나아가 보십시다.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성경신학의 진수를 얻어내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입니다. 그 다음에는 교회사 연구를 놓으려 합니다. 여기서 나는 이단에 빠질 위험성을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특별히 강조하려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험은 용기를 잃어서 위축되고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사, 특히 교회부흥의 역사는 그 위험에 대한 가장 훌륭한 방벽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린다면 설교학입니다. 이것은 내게 있어서 거의 증오거리에 가깝습니다. [설교작성의 기술], [설교예화의 기술] 등의 제목을 붙인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볼 때 그것은 매춘행위입니다. 설교하는 일이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설교자는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그러면 젊은 설교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른 설교자들이 설교하는 것을 듣도록 하십시오. 가장 훌륭하고 가장 큰 경험입니다. 또한 설교문들을 읽으십시오. 스펄전, 휫필드, 에드워즈 등 모든 위인들의 설교를 읽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요 과제는 무엇입니까? 만일 설교자가 그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진리를 안다면, 그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설교(전도)할 것입니다.
제7장 회중
그가 거기에 있는 것은 첫째로 그의 설교와 그가 해야 하는 것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회중석과 강단 사이의 관련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분명히 회중석과 강단 사이의 관계는 설교자의 수련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논리가 정연한 진술은 생각하거나 따라갈 수 없다고들 말하는 이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또 다른 형태는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적 전문용어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칭의나 성화나 영화 같은 용어는 그들에게 의미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지식층으로 가보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이제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진화론과 3차원 세계를 무색케 하는 완전한 과학적 전망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성경만이 구원과 신앙적 체험과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에 행했던 바와 같은 식의 세상과 사람, 타락과 기적, 역사안에 있는 초자연적 역사등에 관한 말을 그만두고 종교적인 메시지에만 관심을 집중시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점점 강조되고 있는 또 다른 점은 현대인, 즉 이 지식적인 타입의 현대인은 너무 현학적이라서 현대문학이나 현대예술이나 현대의상, 현대소설 등의 차원에서 문제를 생각하므로 우리가 그들에게 아주 친밀한 이러한 어휘로 말씀을 전달할 수 없다면 그들에게 어떤 감화를 끼치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식은 현대의 현학적인 사람은 교의적인 주장에 특별히 염증을 느끼고 있어 옛날의 교의적 설교형태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회중이 강단을 조정하는 것을 어느 범위까지입니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이상의 새로운 사상은 전적으로 그릇됨을 주장합니다. 먼저 일반적으로 그 입장은 그릇됩니다. 왜냐하면 사실과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이해하는 전체적인 심리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설교, 그것도 특별히 긴 설교를 들을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말하기를 내 설교는 그들에게 너무 어려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럿듯하나 이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하는 소리는 그것이 아니고 “목사님만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설교를 하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 소녀의 말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여러 다른 수준들에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감화 아래 그들에게 필요한 것과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을 끌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세 번째 위치에서 이 현대사상은 진정으로는 거짓된 생각을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어려움과 고통, 그들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것은 거의 완전히 언어나 용어의 문제, 다시 말하면 오늘날 과장되게 “의사소통의 문제”로 묘사되고 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후기 기독교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칭의나 성화와 영화 같은 용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주장에 대한 대답은 단순히 다른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언제는 사람들이 그 말을 이해했었느냐? 언제 비신자들이 이러한 언어를 이해했었느냐?라고 말입니다. 결코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거짓 주장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참되게 설교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사람들의 정확한 상태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거짓 주장 말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설교자는 직공들에게 효과적으로 설교하기 위해서는 6개월 동안 공장에 가서 일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볼 때 가장 괴이하고 망측스러운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이 진리라면 그리고 이것이 논리적 귀결이라면 여러분의 훈련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 교회에 있는 회중들을 갈라놓고 세분화시켜 놓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상은 개괄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점에서 야기되는 하나의 의문점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 9:19~23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바울은 그 자신의 목회를 진술하여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되겟습니까? 사도가 여기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그의 말씀 증거보다 그의 일반적인 행위와 태도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기로는 역시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이나 방식을 동시에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바가 설교자들(목사들)은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종교의 임시적이고 당분간 지나가는 것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원리와 영구성이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그 점이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방법들은 언제나 우리의 메시지와 일치하며 조화되어야지 어긋나서는 안됩니다.
제8장 메시지의 성격
청중들이 조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청중의 상태와 위치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 젊은 설교자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청교도들이 했던 식으로 몇 시간씩 설교해 보려고 애쓴다면 그는 얼마 안 가서 그렇게 설교해서는 들을 사람이 없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설교자가 자기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수준을 평가해야 함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설교자가 직면하는 주요 위험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모든 이들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인 모든 이들이 그 점으로 보아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내가 볼 때 사활을 좌우하는 가장 치명적인 실책입니다.
교인이고 정규적인 예배에 참석하니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다고 하는 생각은 가장 어리석은 가정 중 하나입니다. 나는 그것이 오늘날 교회가 이런 상태에 빠지게 된 주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원리가 설교를 듣는 이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자기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설교에 반감을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며 성경의 가르침을 지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말씀의 능력 아내로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죄에 대한 일종의 수치감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와는 다른 것입니다.
모든 청중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고는 복음전도를 위한 설교가 그치게 되어 결국 전도예배가 전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모든 이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하고는 목사는 건덕을 위해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로 복음의 능력을 안적이, 죄를 깨우칠 만한 설교를 들은 적이 없는 한 세대가 자랐습니다.
나는 이들 “1회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매예배마다 참석치 않으면 언젠가 여러분들이 참석치 않았던 어느 주일 오전 또는 주일밤 예배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을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는 날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반드시 다음 질문으로 연결시켜야 합니다. 왜 어떤 그리스도인이고 자기가 충분히 얻을 수 있는 만큼을 갈망하지 않는가? 교회라는 목장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갈망하지 않으면서 자기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은 어떤 이든지 간에 영적으로 잘못된 사람입니다.
이 모든 일이 말하는 바는 설교단에서 필요한 것은 권위, 위대한 권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어떻게 이 권위가 회복될 수 있습니까?
설교자에게 있어 최고 최상의 필요는 “영적 권위”입니다. 지식과 문화는 말할 수 없이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종이나 하녀로 사용된다는 조건에서입니다. 설교자에게 권위를 주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그가 “성령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건물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분명히 제일 절대적인 것은 훌륭한 음향효과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천정의 우묵한 곳은 음향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강단은 어떻게 할까요? 중앙에 오게 하십시오. 한쪽으로 밀어 부치지 마십시오. 설교한다는 것은 교회와 그의 기능에 비추어 볼 때 최대의 행위입니다. 강단의 높이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건축한적으로나 구조학적으로 볼 때 설교자는 언제나 회중을 내려다 보고 설교해야 합니다. 그 다음 설교단 강대상의 실제적인 높이가 중요합니다.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강대상이 설교자의 명치보다 높으면 설교할 수 없습니다.”
제9장 설교자의 준비
이제는 이 설교자가 매주 실제적으로 어떻게 준비하는가에 대한 전문적인 문제를 다루려 합니다. 나는 첫 번째 전제로 그가 항상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처음에는 생각하기를 설교를 준비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 설교내용은 내가 말했듯이 가장 면밀한 준비를 요하는 것임은 틀림없음). 그러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의 준비입니다.
여러분 아침을 보전하십시오!
나는 우리의 첫단계 일은 우리 자신을 알고 자기 나름의 특수한 사정을 감안하여 일하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때를 아시고 여러분 자신을 조절할 방법을 알아내십시오.
기도는 설교자의 생활에 절대적으로 중차대합니다. 모든 입장에서 볼 때 목사, 즉 설교자는 기도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설교자의 생활에 그 다음 문제되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읽는 문제입니다. 성경을 전체로 읽는 것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아무리 강하게 강조한다고 해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설교자가 빠질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습관 중 하나는 설교본문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만 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제공하신 양식이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십시오.
만일 한 구절이 유별나게 부딪쳐 오면 계속 일어나가지 마십시오. 즉시 멈춰서 그 구절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구절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시 읽기를 중단하고 여러분을 때리던 그 말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연구하십시오. 설교의 뼈대를 발견할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하십시오.
아주 여러 해 동안 나는 반드시 책상 위에나 호주머니에 비망록을 준비해 놓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떠올라 나를 감동시킬 때 즉시 나는 그것을 내 비망록에 적어 놓았습니다. 그 결과 설교 뼈대를 적은 파일이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순서상 다음으로 말씀드리려는 것은 “경건한 독서”입니다. 청교도들의 책을 읽는 것을 서슴지 않고 이 범주에 집어넣겠습니다. 같은 조항 아래 설교집을 읽는 것을 집어넣으려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유의하여야만 합니다. 나는 내 경험상으로 볼 때 내 목회 초년기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읽음으로부터 얻었던 도움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른 것을 간단하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보다 지적인 독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신학입니다. 설교자는 그의 생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신학서적을 읽어야 합니다.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더 좋습니다. 그래서 나는 설교자의 훈련에 관해 생각할 때 강조했던 것 -즉 교회사를 읽는 것의 중요성에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교회사는 학생에게보다 설교자에게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똑같은 방면에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나 일기를 읽는 것을 계속해야 합니다. 휫필드, 웨슬리 같은 인물들 말입니다.
다음 순서는 변증학에 대한 독서입니다. 그 말은 신학과 철학에 조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근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설교자는 현대의 문제들에 관한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기 간행물과 잡지류도 읽어야 합니다. 자기 교단 것 뿐만 아니라 그 일에 관계된 다른 교단의 간행물도 읽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설교자가 자기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을 진단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다른 분야의 독서로 나가기 전에 내가 강력하게 강조하려는 것은 독서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독서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독서의 목적은 첫째로 설교를 하는 데 필요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란 것을 다시 반복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은 또 다른 가공할 만한 위험입니다. 설교본문을 얻으려고 성경을 읽는 경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는 것도 설교자료를 얻으려는 의도에서 되기가 쉽습니다. 나는 이 점을 목회자의 직업병으로 간주합니다.
나는 이것이 독서의 제일차적인 목표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독서의 주요 목적과 기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보를 제공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독서가 가장 훌륭한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언제나 필요로 하는 것은 자극입니다. 책의 임무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독서의 기능은 주로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도록 자극시키는 것입니다.
일바적인 독서는 역시 중요합니다. 왜요? 예, 만일 별다른 이의가 없다면 단순히 마음의 휴식을 위해서입니다. 마음의 휴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역사를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세속역사입니다. 한번 더 나는 엄숙한 경고를 해야겠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거기에 바치지 마십시오. 그것은 위험합니다.
나는 음악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음악이 모든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겐 크게 도움을 줍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애에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요, 여러 국면과 체험을 통해 다양한 상태를 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알아내도록 하십시오.
제10장 설교준비
어떤 유형의 설교를 할 것인가를 결정한 다음에 실제적인 준비라고 하는 아주 실천적인 문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대체로 나는 설교자란 그러한 과제들에 관해 설교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한때는 따로 떨어진 본문에 입각해 설교하게도 하시고 어떤 경우에는 연속된 설교를 하게도 하신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나는 한 독립된 본문으로 설교하든, 연속설교를 하든 둘 다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연속설교가 언제나 개입될 수 가 있습니다. 정말로 만일 그렇게 하라고 여러분의 심령을 압박하는 어느 특별한 것을 느낀다면 지금 곧 연속설교를 시작해야 합니다.
나는 성탄절이나 강림절 동안에 특별한 설교를 전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고난주일이나, 부활주일, 성령강림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여러분 스스로가 설교자로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상의 우리 복되신 주님의 죽음에 대한 사실과,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취급하는 설교에 여전히 감동받을 수 없다면, 또는 여러분이 전에는 그것을 설교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느끼지 못한다면, 또한 만일 여러분이 전에처럼 그 설교로 그렇게 감동을 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근본을 시험해 보는 것이 좋음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특별한 절기가 이런 면에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세상이 다 아는 대 연속설교를 계획했다 하더라도 지진이 나거든 그것을 멈추십시오! 만일 지진으로도 여러분의 꽉 짜여진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희망은 절벽입니다!
하나님은 초기에는 자비하시고 매우 은혜로우셔서 설교본문을 주시고 설교내용을 주실 것이고 때로는 완전한 설교내용까지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간 다음에는 내가 지적한 방식대로 본문을 연구하고 땀과 노력을 쏟아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의 설교를 준비하는 일로 돌아가서 보면 거기에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분이 성경을 연구해 나가되 조직적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경 중 한 책의 한 부분을 세밀히 검토해 나가는 것입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이 모든 일을 하는 동안 여러분들은 언제나 본문을 파헤치는 강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강해적이십시오.
나는 이 항목 끝에서 내내 강조하여 왔듯이 각각의 설교가 그 자체로 완전히 하나의 완성체여야 함을 언제나 분명히 강조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시리즈로 된 연속설교를 행할 때까지도 적용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길은 설교를 시작하면서 몇 분 동안 지난번 설교 때 전한 내용을 간단히 반추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실제적인 매 설교준비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것에 접근해야 할까요? 확실한 것은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은 해당 본문의 의미를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 면에서 하나의 황금률, 하나의 절대적 요청이 있는데 그것은 정직입니다. 내가 말하는 의미는 여러분을 즐겁게 하는 한 사상만을 잡아내어 그것을 여러분 스스로 다루기 위해 본문을 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언제나 문맥 가운데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입니다. 그러나 내가 현시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 절이나 구절의 영적 의미입니다. 첫째는 정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택한 본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왜 그는 그렇게 말할까? 어째서 그는 그것을 이런 독특한 방식으로 말했을까? 그는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 그의 목표와 목적은 무엇인가? 설교자가 맨처음 배워야 할 일 중 하나는 그의 본문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중에게는 질문을 던지십시오.
우리가 본문의 주요 핵심에 확실히 도달해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제11장 설교의 조직
한 본론에서 발견한 것이 성경의 다른 부분 안에 있는 유사한 진술에 의해 보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는 이것을 명제나 대지 혹은 소제목으로 나누는 문제입니다. 수적인 문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언제나 나의 서론과 대지가 세 개여야 한다는 전통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사람들은 세 개의 대지를 찾습니다. 그것은 설교자들의 거의 일률적인 관습입니다. 결코 무리하여 나누지 마십시오. 소제목들은 자연스러워야 하고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명석한 척하거나 멋들어지려고 하는 유혹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챌 것이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리와 자기들의 영혼들보다 여러분 자신과 명석한 척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형식과 설교를 올바르게 세분하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중요하게 여김을 고백할 용의가 잇습니다. 즉 그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못해 주어진 본문을 나는 만족할 정도로 나누지 못했을 때 그런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로 설교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본문을 택해서 설교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내가 주어진 메시지,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 그 메시지,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로써 영광을 받기 쉬운 메시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그 메시지- 평범한 것 이상으로 느껴지는 그것을 파괴하고 손상시키고 불완전하게 만들기보다는 잠깐 그것을 제쳐놓습니다. 한 주간이나 2주간 또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이라도 그런 메시지는 제쳐놓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것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다음 문제는 대지(소제목)들을 모두 함께 발표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나는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에게는 존경심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 전통에 대해서는 도전하는 경향을 보여왔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도 너무 기계적이 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대지(소제목)를 취급하기 전에 처음부터 대지들을 전부 진술하는 것이 형식과 조직과 구성의 명석함을, 전할 진리보다 더 관심있게 보는 이들에겐 흔히 용기를 주었다고 느낍니다.
우리의 설교 “대요”를 종이에 써놓는 것이 좋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진리일 것입니다. 이 지점에 도달한 다음, 여러분들은 이제 중대한 결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준비한 이 골격을 어떻게 하려 합니까? 전부 다 써야만 되는가 아니면 그러지 않아도 되는냐? 저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도 자기 설교내용을 다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요만을 준비하여 그것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 반면 스코틀랜드의 자유교회의 위대한 지도자 토마스 차머스는 자기는 설교내용을 모조리 써 놓아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방면에 매우 관심이 많았습니다. 최근에까지 나는 에드워즈는 언제나 그의 설교내용을 모조리 썼다는 인상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1967년에 매우 흥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거기서 에드워즈가 설교 전부를 써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필요한 몇몇 가지를 노트해 가지고 올라갔다는 것을 보고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일에 절대율을 설정해 놓는 것은 항상 그릇됩니다.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이 두 방법 - 써서 하는 것과 즉흥적으로 하는 것 - 을 조합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나쁩니까? 많은 면에서 그것이 이상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나름의 실제는 쓰는 것과 즉흥적인 방법을 둘 다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의 설교는 진술들을 수집해 놓은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한 전체성 또는 설교형태 내지 형식의 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단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회중들에게 뼈대와 사상만 던지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뼈대가 살로 채워질 때까지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상이 즉흥설교의 중요한 위험이지만 사실상 설교를 쓰는 것과 관련된 위험도 있습니다. 먼저 너무 지나치게 멋을 부리려 한다든지 문학적 면에 너무 과다한 신경을 쓰는 위험입니다.
인용을 하는 참된 목적이 여러분의 학식을 보여주거나 여러분 자신에게 눈을 돌리도록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 자신에게 눈을 돌리게 한다든지, 학식을 자랑하려고 한다면 하나의 인용구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동기가 전혀 그릇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용거리를 생각해 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 마음에 인용구가 생각이 날 때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경고할 것은 너무 세밀한 논리를 전개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특히 여러분이 설교를 쓰고 있을 때 말입니다.
제12장 예화, 웅변, 유머
주로 설교내용을 써가지고 올라가던 사람이 여러 이유에서 더 이상 그러지 않고 원고없이 설교하는 사람이 될 때 위험이 발생합니다. 그에게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은 부족하게 준비하고도 만족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요점을 정리해야 합니다. 주요 대지와 여러 개의 항목과 세목을 자세히 정리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이 만족할 만한 말거리와 재료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설교자는 수사술가라기보다 웅변가여야 합니다. 암송한 것 중에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문장을 완벽하게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여러분을 사로잡아 인도할 때 여러분은 끌려가도록 그대로 놓아두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처음에 설교를 모조리 작성하지 않고는 설교할 수 없거든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내가 지적한 방식을 시도하십시오. 어떤 설교는 쓰고 어떤 설교는 쓰지 마십시오. 이들 여러 가지의 다양성을 시도하십시오.
나는 예화의 사용과 예증의 문제를 생각해야겠습니다. 예화의 사용과 성경의 한 부분을 영화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하고 그 특정사건이 역사상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이 같은 원리가 영계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화와 예증은 진리를 밝혀주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 자체에 무엇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선포하고 있는 진리를 더욱더 분명하게 알도록 사람들을 이끌고 도와주는 한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우선이요 그것이 크게 드러나야 되고, 예화는 그 목적을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 약간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철학입니다.
내 느낌으로는 어느 때보다 오늘날의 설교에서 이 상상의 문제가 큰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무 과학적이 되어서 상상을 위해 조그만 여유밖에는 없습니다. 내게 있어서 이것은 가장 무시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설교하는 데 있어서 상상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상상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나는 제안합니다. 설교자는 언제나 밝혀져야 하는 것보다 밝혀주는 상상력이나 일화 자체에 기쁨을 가질 때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점에 도달하는 순간 그만 멈춰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감동시키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진리가 그들을 감동시키고 감화시키기를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 항목에 대해서도 나는 같은 것을 굉장히 많이 말해야 합니다. 설교에 있어서 웅변 또는 설득력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선을 넘어 웅변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진리 자체보다 설교의 요지를 말하는 방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될 커다란 위험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법칙이 있습니까? 내가 제시하려고 하는 유일한 철칙은 아무도 웅변적이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설교자는 웅변적이 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하나의 철칙으로 설정해 놓습니다. 그러나 만일 설교자가 설득적이 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그것은 큰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기록하여 작성한 원고설교든지 원고없이 하는 설교이든 간에, 한 편의 설교에서 생각해야 할 여러 가지 것 중 또 다른 점에 시선을 돌려야겟습니다. 소위 유머의 위치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설교에는 유머를 쓸 수 없다고는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설교사역의 성질과 우리가 취급하는 진리의 성격 때문에 그렇게 큰 위치를 자치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언제든지 수종드는 위치에 있어야 하며 그때 매우 가치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설교의 길이 문제입니다. 무엇이 설교의 길이를 결정짓습니까? 첫째로 설교자 자신입니다. 시간은 매우 상대적인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모든 설교자들에게 하나의 철칙을 설정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만일 그들이 어느 정도밖에는 취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결론에 이르거든 그 분량에 맞게 주십시오. 더 많이 주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것에 실패하면 훌륭하지 못한 설교자나 교사가 될 것입니다.
진리, 메시지가 시간을 조정하도록 하십시다.
제13장 금기사항
여러분이 설교하려는 주제를 미리 알려주어야 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발표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권하고 싶지 않고 나 자신도 한 번도 이 관례를 따른 적이 없음을 못박아 두어야겠습니다.
가장 첫째되는 이유는 사라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 말씀 강론을 듣기 위해서 나와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바로 그 점이 우리가 예배에 참석하는 이유여야 하며 어떤 특정한 주제나 문제보다 그 점이 우리의 심중의 최상층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제를 발표하는 것이 나쁜 것은 그것이 사람들에게 해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은 배웠고 학식있는 사람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주제”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해력이 있는 사람들인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상의 양식이나 지적인 자극이다. 주제를 발표하는 것이 거짓된 주지주의를 조장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주제들을 그것이 들어 있는 성경의 해당 문맥 안에 고립시키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적 메시지의 전체감을 잃어버리고 특별주제와 문제점들에만 흥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반대하는 더욱더 중요한 이유는 목회자적인 면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는 그들의 말로 “엄청나게 흥미있는” 문제들에 관한 것만을 듣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 중 일부는 그들은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청중들로 하여금 설교내용을 결저짓지 못하게 하고 주제 중심으로 나아가려는 주지주의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이 문제에 접근하는 우리들의 임무입니다.
그것이 빅토리아 풍의 거짓된 주지주의의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그거들이 복음설교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복음증거의 중심을 해치고 있다고 느낍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설교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야 함은 오늘날 중차대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 모든 설교자들에게 굉장한 이슈로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러한 진리 전달방법이 참된 설교에 유해한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떤 제한된 시간에 속박되어 있는 가운데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환경을 막론하고 분명코 그릇됩니다. 그에 부연해서 그 종교 분과 위원장은 자기네들은 병원이나 회사나 가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과 그들을 위해서 설교자들은 주어진 시간에 찬양과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어쨌든 그 결과 말씀 증거하는 일이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참된 말씀 증거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정당한 것이 못 됩니다.
나는 언제든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예배에 강제로 참석시키는 것을 반대하여 왔습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바는 우리의 말씀 증거가 그들에게 간절한 마음을 채워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설교에 있어서 금해야 할 사항에 대해서 고찰해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직업주의를 피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살아있는 동안 싸워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일날에 설교하는 주요 이유가 설교한다고 미리 알려졌기 때문인 정도까지 이른다면 설교자에게 있어서는 그보다 더 나쁜 것이 없습니다.
설교자가 금해야 할 다른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가 지식의 과시입니다. 설교자들의 끊임없는 죄악 중 하나는 자기가 폭 넓은 독서와 교양을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위험은 준비하는 것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교묘한 태도입니다. 설교자는 준비를 마치고 이 설교는 좋은 설교라고 느끼고는 그것에 의지하기 쉽습니다. 설교와 관련된 위험 가운데서 이것보다 더 큰 위험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강정을 주의하십시오. 그렇게 많은 여러분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을 주의하라는 말입니다. 그것들은 여러분들을 가장 넘어뜨리기 쉬운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뽐내게 하고 자기를 자랑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언제나 “특이하려고”하는 무서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방호해야 합니다. 이상의 모든 것을 요약해 보면 설교자를 공박하는 모든 시험은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자랑, 그 때문에 그가 거기서 높임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너무 지적인 것을 경계하십시오.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문제는 설교내용과 설교행위안에 논증의 위치입니다. 그것은 듣는 사람드을 위해 좋은 것입니다. 나는 단지 너무 논증적이려고 들지 말라고만 경고를 합니다. 왜? 사람들 -사람들의 대부분이 - 은 아마 그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대부분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회중들은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교인들에게 경고해야 하고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를 “진리의 변증자”라는 생각을 발전시켜 사람들과 그들의 관점을 공격하는 데 시간을 보내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부정적이 됩니다.
풍자를 할 때 조심하십시오. 풍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거의 모든 회중들이 그것을 완전히 오해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여러분들이 풍자적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전달방법에 주의하십시오. 많은 문제들이 이 전달방법에 관련되어 일어납니다.
그 모든 것보다 제발 목사다운 목소리를 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얼마나 가공할 일입니까?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 나쁜 버릇을 발전시킵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똑같은 소리를 내어서 목사다운 부자연스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제14장 결심의 요청
나는 많은 목회자들이 성가대 문제, 찬송을 부르는 문제, 성가대 안에 4중창 문제에 대해 고민에 빠지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그것들은 우리가 빅토리아니즘으로부터 끌어낸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골칫거리 오르가니스트 때문에 그의 목회에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진리보다 음악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가 그리스도인인지를 확실하게 하고서 반주자를 임명하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이 예배의 여러 국면 - 예배당 건축양식, 예배의식, 성가, 음악 등 -에 기울이는 관심 정도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 강조점을 많이 두면 둘수록, 영적으로는 보다 빈약해지기 쉽다는 것을 아주 일반적인 법칙으로 설정할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어째서 으악의 필요성을 이처럼 강조하게 되었는가? 어째서 그렇게밖에는 안되는가?” 이 문제에 부딪쳐 보기로 합시다. 음악은 수종드는 것이요, 종이지 어떤 의미에서든지 음악이 무엇을 좌우하고 조자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또 하찮게 들리는 다른 일을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예배당 안의 조명 문제인데, 설교의 효과를 더욱더 내게 하는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심리적인 분위기를 조정하는 것뿐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더 쉽게 한다고 해서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점은 보다 큰 또 다른 문제로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나가는데 그것은 우리가 숙고해 왔던 여러 방법으로 전달한 설교를 마무리하는 지점에 다달아서 결심을 호소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입니다. “헌신의 요청”, “요청의 기호” 등 여러 용어로 이 관계를 표현합니다.
이 문제의 역사성에 대해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함은 중요합니다. 지난 19세기의 아주 초기에 들어온 것입니다. 찰스 피니와 함께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피니와 함께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생각을 유발시키고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내 목회에서 이 방법을 실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솔직히 진술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의지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은 분명히 나쁘다는 것입니다.
앞 장에서 나는 저 위대한 휫필드까지도 감정과 상상력을 직접 공격하는 실수를 범한 적이 있다고 단언했고 우리는 그러한 일을 고의적으로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단연코 물리쳐야 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것이 나쁜 것처럼 의지를 직접 자극시키는 것도 똑같이 나쁩니다.
두 번째로, 의지에 대한 너무 과다한 압력이나 너무 직접적인 강압이 위험하다고 하는 것을 주자합니다. -물론 설교에는 이 요소가 필연적으로 있기 마련이지만 너무 과다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조국에 가서 진리 자체보다 전도자의 개성이나 희미한 두려움, 일종의 심리적인 영향을 받아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반응을 결저짓게끔 분위기를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세 번째 주장은, 말씀 증거나 결신의 요청이 우리의 사고에서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례가 말씀 증거와 결코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원칙이 결신을 요청하는 일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나의 의도입니다. 그리고 “결신”에 대한 더욱더 가증된 강조를 하게 되어 그것 자체를 독립적인 무엇으로 간주하기 쉬운 경향이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요점은, 분명히 이 방법은 죄인들이 처음부터 결신과 자기 회심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요점으로서, 그것은 전도자가 성령과 그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해서 교묘히 조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해 준다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이들이 이 방법은 피상적인 죄의식을 산출하기 쉽다고 하는 여섯 번째 주장에 찬동하리라 봅니다. 사람들은 흔히 거기에 응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은혜를 받을 것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째 주장은-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이후의 행위가 어느 정도 그들을 구원하다고 생각하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좀더 다른 면에서 살펴본다면- 아홉 번째 요점으로- 그것이 중생교리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이것, 즉 중생의 사역이 성령의 사역이고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생이 성령의 사역이듯이 그 일의 전과정도 그가 맡습니다. 그 중생의 역사는 언제나 자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열 번째 요점으로 나아가서 어떤 죄인이라도 “그리스도를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심하다”라는 어휘는 내가 볼 때 어넺나 아주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진정으로 죄를 깨달은 죄인은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에게 던져진 밧줄, 갑작스레 오직 유일한 구원의 수단으로 자기에게 던져진 그 밧줄을 잡아야겠다고 결정하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고 하는 결심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호소력은 진리 그 자체와 메시지 속에 있기 마련입니다. 설교를 전할 때 그 설교내용을 언제든지 적용시켜 나가야 하며 특별히 마지막 결론적인 적용이나 클라이맥스에 이를 때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러나 호소는 메시지의 한 부분입니다. 서슴없이 말씀드립니다만 끝에 막간을 가진 다음에 찬송을 부른 뒤에 하는 특별한 호소와 따로 떼어 하는 호소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도록 강력하게 설교자를 내리누를때에만 있어야 합니다.
제15장 함정과 낭만
하나는 같은 설교를 반복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한 편의 설교를 반복하는 것을 말할 때 물론 그 설교를 했던 같은 교회에서 같은 설교를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에서야 다른 데서 했던 것을 설교한다고 하면 뭐가 어떻습니까? 여기에 관련되는 규칙이 있습니까? 독서와 대화를 통해서 나는 이 문제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이것에 예외를 취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펄전입니다.
스펄전은 같은 설교를 되풀이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매범마다 새 설교를 준비하느라 애썼습니다.
다른 위대한 설교자들의 경우에도 그들이 했던 설교를 되풀이하는 것이 전반적인 추세였습니다. 물론 휫필드는 계속 이 일을 고수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편의 설교란 결국 단순한 진리의 진술이나 여러 가지 진리의 나열이 아닙니다. 우리가 설교를 정의했던 바와 같이 그것은 한 구절에 대한 해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설교자는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을 전하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설교 중 가장 훌륭한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분명히 합당한 일입니다.
같은 설교를 또 전하는 것, 거기에 범상치 않은 것이 있으며, 그 안에 참된 메시지가 있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로 사용된다고 느껴질 때 그것은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설교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면 되겠느냐?” 같은 설교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는지?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단순한 통계나 숫자의 무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횟수에 관해서는 고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내가 보는 하나의 규칙은 있습니다. 즉 그 설교가 설교자를 더 이상 사로잡지 못하고 감동시키는 것을 중지했을 때 그 설교를 다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역시 몇 가지 경고를 해두어야겠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런 식으로 한 설교를 반복한다면 피해야 할 몇 가지 것이 있습니다.
강사는 그가 질문을 던질 때 이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그것이 갑작스레 금방 임한 것처럼 인상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 사람이 여러분의 설교를 전에 들었으면 다시 그것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어떤 설교를 반복할 경우에는 여러분이 반복한 것을 기록해 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궁지에 몰리게 될 것입니다. 교훈은 이것이니 설교한 날과 횟수와 장소를 기록해 두십시오.
소위 설교내용의 특징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한 설교자의 가각의 설교들이 그 나름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들은 사실상 자기들이 설교하고 설교자는 별로 할 일이 없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설교내용 자체가 설교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의 손에 의탁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여러분은 해야 할 설교를 알아내야 합니다. 이것은 커다란 가치가 있는 요점입니다.
나는 다음 문제인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전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말이라도 하기를 주저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 한마디만 더 덧붙여야겠습니다. 설교자가 다른 사람의 설교를 꼭 전해야 되겠거든, 어느 때에 정말 절망에 빠져있어 다만 교인들을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느끼거든, 전에 내가 알던 남 웨일즈에 있던 어느 가련한 설교자가 했던 것처럼 하지는 마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필요없는 것은 삭제해 버릴 줄 알라는 것입니다. 꼭 다른 사람의 설교를 전할 수밖에 없다고 느낄 때에 언제든지 그렇게 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자신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서는 그 설교의 원설교자에게 은혜를 입은 것을 사람들에게 밝혀 주십시오.
즉 설교하는 일의 낭만! 설교하는 일과 맞먹는 일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설교자가 새로운 설교를 가지고 주일 오전이나 저녁에 설교단에 나아갈 때, 특별히 그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과 그것을 전하고 싶어 견딜 수 없음을 느낄 때 가지는 감정에 비교될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의 관계, 설교준비, 다른 많은 요인들의 결과로 나오는 이 특별한 경험은 한 교회에서의 정규적인 목회에만 생기는 독특한 일입니다.
이 낭만적 요소의 또 다른 국면은 한 예배의 끊임없는 가능성들입니다. 다르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한 예배 내에 있는 불확실한 요소라고 할까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진정한 설교자라면 여러분이 설교단에 올라갈 때 무엇이 일어날까를 정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전류의 체험에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내가 준비한 설교를 모두 전하지 못하도록 저지를 받고 있다고 느꼈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제한된 방식으로 설교를 해 나가도록 이끌림을 받아 내가 계획한 시리즈 설교계획을 재조정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설교하는 동안에 이런 일이 설교자에게 일어날 때 설교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은 아주 민첩하게 생각해서 전하고 있는 설교를 마무리짓고 설교하는 동안에 발전된 것이 어느 것인가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설교하는 동안에 발전된 그것을 완전한 하나의 설교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낭만에 또 다른 요소는 설교를 들을 사람이 누구인지, 그 듣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16장 영력있는 증거
나는 이 마지막 장을 설교하는 일에 관련되어 가장 커다란 진수가 되는 성령의 감동과 기름부으심에 대한 것으로 장식하려 합니다. 나는 성령의 감동만을 의지하는 오류에 빠져 준비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바라는 바른 방법은 성령의 감동이 준비한 것에 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극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준비에만 의지하여 더 이상은 바라지 않고, 어떤 이는 준비를 경멸하여 성령의 역사와 감동과 영감에만 의지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만으로는 결단코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이나 기름부으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설교자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사람의 노력과 열심을 초월하여, 성령에 의해 쓰임을 당해, 그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가 되는 위치에서, 설교사역을 수행하도록 성령을 통해 설교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입니다.
기독교 설교자에게 임하는 “권능”이나 또는 “권능의 발현”은 “단지 한 번만”있는 일이 아니라 반복될 수도, 매우 여러 번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중생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이미 거듭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1차적으로 성화를 촉진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능력의 세례, 불의 세례인바 사람으로 하여금 증인이 될 수 있게 하는 세례입니다. 그것은 중생이나 성화가 아니라 능력, 증거하는 능력입니다.
또 하나의 두 번째 차이는 이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사도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실험해 보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고 시험삼아 해본다는 식의 요소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일을 끝내 효과있게 하는 성령의 능력이 더하여졌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를 회심시켰고 교회를 창조했고 설립했습니다.
그러면 역사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먼저 신교의 개혁운동에서부터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권능있게 역사하시는 그 시대에는 굉장한 증거가 있습니다. 루터 자신이 온 방안이 빛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고 묘사한 저 위대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의 명백한 결론이 있습니다. 성령을 구하십시오! 그를 찾으십시오! 그분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을 구하십시오. 항상 찾으십시오. 그러나 그를 찾는 것 이상으로 구하십시오. 그를 기다리십시오.
B. 평가
목사와 설교를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읽었다. 이 책은 예전부터 한번쯤 읽어보고 싶어 했던 책이다. 왜냐하면 이 분의 책을 개인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분 책을 정확히 읽어내기란 여간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이 분 책을 읽으면 마음에 깨달음이 크고 무언가 나에게 자극을 주며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이 분의 책이 매력이 있다.
이 책을 다 읽었지만 평가하기란 참 쉽지 않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정확히 소화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지 못한 새로운 지식과 사고 그리고 통찰력 깨달음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있지만 평가하기란 아직 나에겐 너무나 벅찬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욱더 내가 이 책에 대해서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나는 아직 한번도 설교를 해본일이 없기 때문에 이 책에 쓰여진 목사관이나 설교관에 대해서 뭐라 말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설교학 입문이라는 수업을 통해서 처음 설교학을 접하게 되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 책을 읽고 설교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고 말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얘기다.
단지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평가란 아니 평가가 아니라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생각되어지고 깨닫게 되어진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의 한 챕터 단위로 읽고 나서 생각하고 깨달은 것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고 한다.
제 1장 설교의 우위성이라는 한 챕터를 읽고 나서 이 책이 나에게 말해주는 부분은 참으로 말씀 전하는 일이 최우선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계속 반복하고 반복하고 비교하고 설명하고 논증하고 있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생각해 보았다. 과연 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만의 견해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고 있을까? 나의 짧은 생각에는 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분별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부터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 당시 어린나이에는 신앙생활이라기 보다는 종교생활 내지 취미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점차 돌덩이같고 길가같은 나의 마음밭도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씩 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년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신학생이 된 지금의 위치로 판단 아닌 판단을 한다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견해와 같이 내가 자라온 지금의 신앙의 터전들이 말씀에 집중하기 보다는 다른 것에 부수적인 것들에 집중해왔던 시간들이 더 많다는 생각과 과거의 경험들이 떠올랐다. 조금씩 지식이라는 부분이 나에게 들어오면서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부정적인 효과로는 판단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 판단을 통해 내가 본 문제점 중에 하나도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너무나 주변적인 것들에 쏟아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차이라면 나는 판단으로 끝났다는 것이고 이 분은 그 문제점을 통해서 진단을 하고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나는 부정적이지만 이 분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게 했다는 차이이다.
특히 신학생이 된 나는 그리고 앞으로 말씀을 전하기로 작정하고 준비하고 있는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고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더욱더 명확해졌다. 내가 미래에 말씀 전하기 위해서 준비를 얼마나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동기부여를 일으켰다.
그리고 말씀 전하는 자로 부름 받은 자는 어떤 것이 그 사람의 제일의 임무인지 명확한 기준이 생겼다. 이 챕터를 읽고나서 짧게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계획이 있으셔서 이 신학교에 부르셨으니 하나님을 올바르게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해달라고 성령님의 증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제 3장 설교내용과 전달행위를 읽고나서 이 챕터를 통해 내게 가장 많은 것을 반복해서 말한 것은 설교의 내용은 나의 학문이 들어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말씀으로부터 설교자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를 전달하는 행위는 다른 것으로 대체 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설교자가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만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분을 보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고지식하다라고 느낄 수 있는 점들이 많다. 왜냐하면 너무나 자신의 의견이 뚜렷하다라는 느낌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분을 공격하는 사람이 참 많았겠다. 적이 많았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 분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는 분이시다.
설교를 전달하는 행위에서 눈에 띤 것 중에 하나는 방송설교에 대한 이 분의 반응이다. 이 분은 딱 잘라서 그것은 그릇되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역을 정해놓은 방송 프로그램에 짜 마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분이 있었던 그 당시에도 이 전달행위는 있었고 지금도 이 방법은 계속해서 실행되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조금 고민이 됐다. 나는 이 분의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확하지 않는 나의 기준으로는 뭐라 얘기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지금은 문화가 문화이니 만큼 이 문화의 흐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의 견해처럼 단호히 이 문화의 흐름에 반기를 들어야 하는지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지 참으로 어렵다. 단지 하나 이 분의 견해에 인정하는 것은 방송설교를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고 기독교를 선전하는데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설교의 권위는 떨어졌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솔직하게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기에는 내가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다.
설교의 내용에 있어서도 이 분의 견해에 공감을 하고 인정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것은 나는 성경을 너무나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책이 나에게 도움 주는 것은 나의 실체와 나의 수준을 정확하게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통해서 나 자신이 많이 깨지고 낮아지게 한다. 너무나 부끄럽지만 참으로 감사하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 책을 통해 반성하게 된 부분들을 이제는 제대로 고쳐지기를 바란다. 너무나 힘들겠지만 말이다.
제 6장 설교자 챕터 부분을 통해서 설교자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깨닫게 되었다.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부끄러운 것은 여기에 제시한 설교자의 자질과 항목을 가지고 나를 비추어 봤을 때 나는 정확히 설교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질문이 생겼다. 하나님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지금 학생이니까 아직 준비가 안되었으니까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요? 아니면 저는 진로를 바꿔야 하는 건가요? 솔직히 말해서 신학교에 들어오게 된 것도 상황적이고 환경적인 요인들이 많았다. 그렇다보니 이 설교자로 부르신 부름에 대해 명확하지 않아 답답한 적도 많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사양하고 사양했는데 하나님의 계획이었는지 이렇게 신학교에 오게 되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까 다시 한번 정직하게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설교자로 부름을 받았는가? 참 어렵고 힘들다. 정확하게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는 지금 내 상황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비참하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감사하기도 하다. 이 설교자에 사명에 대해서 정확히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에 대해서 알았다.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묻고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내가 어떤 부르심으로 이 신학교에 왔고 내 부르심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로 부른 것이 확실한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더욱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설교자로 부르셨다면 이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로 부끄럽지 않게 설교자로서 준비해야 하는 것들을 준비하고 준비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제 8장 메시지의 성격 챕터에서 나에게 인상을 주었던 부분은 이 분이 말씀하기를 많은 설교자들이 메시지를 전할 때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하고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분의 견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설교할 때는 이와는 반대로 비그리스도인이라는 가정하에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 분의 견해에 동감하고 동감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판단하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안타까워서 하는 것이다. 내 위치에서 주제넘을 수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의 말씀처럼 지금의 우리의 강단에서도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복음전도의 메시지는 들려지지 않는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 방법이나 축복받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나도 조금은 피부적으로 느낀적이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시간들이 그래도 그냥 아무 쓸모없이 지나가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교사나 리더 목임의 장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속한 대부분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복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 인상을 준다. 그 당시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부분은 이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지만 복음을 모르고 있다. 이 현상은 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모태 신앙이고 교회 학교를 초등부부터 나온 사람들도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냥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복음은 안다고 하는데 그 복음이 정작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나도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이 거짓처럼 되어버렸다. 복음이 들어갔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복음과는 너무나 다르다. 왜 이런 현상이 얼어나는 것일까? 생각했었는데 내가 생각하고 내린 결론은 이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거나 복음에 대면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너무나 크게 공감을 했고 또 마음이 아팠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강단마다 참 복음이 선포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예화를 말씀하신 것처럼 아무도 우리에게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현실이 너무 가슴이 아프다. 개인적으로 가슴이 아픈 것은 십자가를 생각하고 말씀을 들어도 내 마음에 감격이 없고 감동이 없는 것이다. 정말 이분의 말씀대로 이럴때 나를 의심해 본다. 나는 복음을 알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은 어떻게 됐는가? 날마다 소망하기는 나에게 있어 복음의 감동과 감격이 망각되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제 9장 설교자의 준비를 읽으면서 내 마음에 부딪힌 것은 성경을 읽거나 책을 읽을 때 나의 태도이다. 나의 태도는 정보습득의 태도였다. 이 분이 말하는 가장 안 좋은 태도였다. 은혜받고 자유롭게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정보습득으로 읽을 때가 너무나 많았고 성경을 대하는 태도도 간절함이나 경외감이 아닌 교만함으로 대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성경 읽기를 해오고 있었다. 나 스스로 말씀의 권위를 떨어뜨리며 읽고 있었다. 나의 동기부터 잘못되었는데 어떻게 은혜가 올 수 있었겠는가?
이 챕터를 통해서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 중에 하나지만 나에 관해서 또 다시 명확해진 것은 나는 무척 게으르다는 사실이다. 설교자로서 부지런히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음을 보게 되었다. 성경은 기본이고 역사 세상의 이슈들 사람들에 관하여 설교자는 이러한 것들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준비를 하는 것은 다 설교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설교를 들으러 오는 회중들을 위해서다. 그들에게 참으로 필요하고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 분이 말씀하기를 설교를 조직하면서 그리고 설교를 하면서 자신을 들어내면 안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나는 처음에도 말했지만 설교를 해 본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경고가 나에게 있어 경험이 없다고 해서 해당이 안되지 않는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를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에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나를 드러내기를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임을 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하지는 않지만 나의 깊은 동기에는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안다. 내가 기도할 때나 무엇을 할 때나 심지어 숙제를 할 때도 내가 들어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로 비추어 볼 때 틀림없이 내가 설교자가 되어서 설교를 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내가 들어나려고 힘쓰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광을 받으려고 할 것이다.
이 경고는 나에게 너무나 현실적인 경고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는 사랑의 경고다. 알고 있지만 이것이 잘 고쳐지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잘못된 마음을 하나님께서 치워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온전히 하나님만이 들어나게 하는 것을 즐겨하는 자가 되길 원한다. 이 책의 저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참으로 그렇게 하려고 일생을 바친 분 같다. 이 책의 여러 부분을 통해서 그러한 흔적들을 볼 수가 있었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던 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더 이 분의 말씀이 뼈에 새기게 된다.
제 12장을 통해서 나에게 경고하는 것은 직업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감사와 기쁨이 아닌 어쩔 수 없이 하는 그런 태도를 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목사는 설교자는 이것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 사실은 정말 그것이 그만큼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 부분도 나에게 있어 걸리는 부분이다. 게으른 성격과 소극적인 태도는 나에게 있어 부정적인 직업주의를 만든다. 새로운 것을 하지 않으려 하고 그냥 어쩔 수없이 일들을 처리하는 내 모습을 보았을 때 이 분이 말하는 직업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 더 많이 싸워야 한다. 정말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한다. 낙담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이 아픔이 필요하다. 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그냥 이 사실들을 피해버린다면 나는 이 분이 말한 부정적인 설교자가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것들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는다면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때 지금의 모습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제 14장 결심의 요청을 통해 이 분이 말씀하고 싶은 핵심은 이 결심의 사역은 그리고 그 과정은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성령님께 의탁하고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억지로 감정이나 의지를 자극해서 이끌어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많이 혼란스러운 것은 내가 자라온 문화는 이것을 계속해서 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문화속에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문화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이 분이 말하는 뜻은 알겠지만 이 견해를 또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제15장을 통해서 가장 이슈가 되는 문제는 설교의 반복 문제이다. 역시 이 분의 핵심은 그 설교가 하나님의 능력이 있을 때는 계속해서 해도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지면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권면하기를 그 설교를 했던 장소와 횟수등을 기록하라는 것이다. 이 점은 나에게 있어 참 특이했다. 어떤 분은 설교를 계속 새롭게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었고 또 그와 반대되는 분도 있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것에 기준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재미있기도 했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남의 설교를 내 것처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분의 말씀대로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성도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정직해지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꼭 정확히 설교의 저자를 밝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이 부분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성향들이 많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장을 통해서 나에게 들려온 핵심은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을 구하고 성령 충만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나에게 항상 도전이 된다.
부흥의 시기에 성령이 강력히 임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솔직히 난 이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아직까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너무나 아쉽고 답답한 부분이기도 하다. 항상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나 여기서 말하는 부흥의 인물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이 들었는데 공통적인 것은 성령의 충만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충만함이 진정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나에게도 속히 성령의 충만함이 정확히 무엇인지 깨닫고 경험하고 누리고 쓰임받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씀을 좋아한다. 이 분의 책을 읽으면 가장 크게 느껴지고 깨달아지는 것은 뛰어난 통찰력과 정확한 진단이다. 사람과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별력이다. 이 분의 논리는 명확하고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설득 당하게 하는 힘이 있다. 나처럼 기준이 애매모호한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너무나 이분의 기준이 강해서 이것을 다 수용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기도 한다. 이 분의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아픈 것은 나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서 자극을 받고 회복되기를 소망하게 되니 너무나 감사하다.
더불어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이 책의 저자뿐만 아니라 책에 나오는 훌륭한 설교자들처럼 나도 설교자로 준비하고 준비되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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