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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바울과 예수 서평

훈나겸 2018. 1. 12. 05:00

바울과 예수

 

 

. 저자 및 역자 소개

1. 저자

데이비드 웬햄은 영국 옥스퍼드대 위클리프 홀의 신약학 , 담당 강사로서 옥스퍼드대 신학부에 속해 있다.

2. 역자

이한수 교수는 중앙대학교 철학과 졸업을 했고 총신신학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영국 Aberdeen 대학 신약학 석사를 졸업했다. 현재 총신신학대학원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 저술목적 및 의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바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보기 보다는,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자신을 위해 일한 자유 활동가라고 자주 비난한다. 또 바울서신이 예수의 지상적 삶과 가르침을 많이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울이 예수에게는 사실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신학적인 상상력에서 나온 아주 다른 예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생각했다. 저자는, 이러한 바울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기 위해 이 책을 저술했다.

. 구성

이 책에서는 바울의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추적하고자 한다. 이 책은 총 3부로 되어 있다. 1부에서는 바울의 혈통과 그의 회심에 대하여 아는 바를 연결해 보고자 한다. 그 후 이 책의 핵심부인 제 2부에서는 바울의 소위 선교여행과 그의 서신중에서 네 개(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고린도전서)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마지막인 제 3부에서는 다른 증거들을 아주 간략하게 볼 것이며, 그리고 바울, 바울과 예수, 그리고 예수에 관해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 요약

1부 시작

1장 예수를 만나기 전의 바울

사도행전은 바울의 이름을 처음에는 사울’(히브리식 이름)이라고 부르지만, 그의 이름이 바울임을 확증한다. 사울/바울은 소읍이 아닌다소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으며 예루살렘에 있는 가말리엘 문하에서’(22:3) 자라났다고 말한다. 바울의 직업이 텐트를 만드는 일(구체적으로는 피혁가공업)이었으며,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만약에 바울의 나이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인 A.D. 30년대 초에 15살에서 20살사이라면, 그는 아마 다소에서 A.D. 15년에서 20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다(이것은 그가 고린도전서와 같은 서신을 쓸 때에는 40대 나이였음을 뜻한다).

바울이 예수와 같은 시간에 예루살렘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예수를 만났다거나 또는 그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는 없다.

 

2장 대변혁

바울은 예수가 메시아이고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지도자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바울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죄를 범한 거짓 예언자로 예수를 보았을 것이다. 바울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를 알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정당하게 처형을 받았다고 이해했을 것이다.

바울은 계시적 체험으로 인하여 이방인을 위한 전파자로서 명령을 받게 되었음을 말한다(1:15; 26:17). 바울은 예수를 주님,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고전 11:7)으로 말한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은 그분 자신의 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증거로,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스스로 화해하는 방법으로써 십자가를 보게 되었다(고후 5:14-21, 5:6-8, 8:32).

바울의 회심 체험 이후로, 율법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타격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부정정인 면에서 어떤 사실을 밝혀주었다. 첫 번째, 바울은 어떤 사람이 종교적 열심히 있어도 진정으로 그리고 심각하게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10;2: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바울은 죄의 교묘함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바울이 죄의 부정적인 면을 알았다면, 그는 또한 하나님의 은총의 긍정적인 면도 알았다. 구원은 사실상 하나님이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전적으로 거저 주는 은사였다.

 

3장 새로운 방향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제자인 아니니아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보낸 사람이라고 말한다(9:10-19). 아나니아를 만난 후 바울은 얼마 동안 다메섹에 머물렀으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대신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수에 관하여 설교하며 가르치기를 시작했다. 바울이 기독교의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은 화가나 그를 죽일 음모를 하였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와 도망을 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는 다메섹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려고 했다. 사도행전은 그들이 바울에 대해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였다”(9:26)고 말한다. 우리는 바나바가 확실하게 바울의 친구가 되어주고, 사도들에게로 바울을 데려다 주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회심이 진심이라고 안심시켜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를 비교하면 불일치한 점이 있다. 이것으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이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첫 번째,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는 사건의 일반적인 순서와 형태에서 일치하고 있다.

두 번째,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그의 회심과 예루살렘에서의 만남 이후의 행동에 대해 다소 자세하게 연대기적인 설명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예루살렘을 의지하고 있으며, 단지 사도들의 조력자일 뿐이라고 그를 폄하하는 비판자들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회심 이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하여 아주 다르게 설명을 하나, 상대편의 도움이 되도록 빛을 비춰주면서 거의 완전하게 서로를 보완한다.

 

4장 안디옥: 동방의 수도

우리가 아는 것은 바울이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으로 갔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직접 말하고 있으며(11:25,26), 갈라디아서도 동일하게 말한다(1:21, 2:11).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에서 받는 인상은 이방인을 위한 기독교가 사실상 출범을 한 장소는 안디옥이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1-10과 사도행전 15장을 동일시할 경우 생기는 문제는 사도행전 15장은 매우 공식적인 모임을 말하는데, 그 모임은 그 후 신속하게 작성된 공적인 판결명령으로 끝난다. 그 반면에, 갈라디아서 2장은 바울과 바나바가 기둥같이 여기는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토의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모임은 교제의 악수로 끝이 난다. 또 다른 문제는 사도행전 15장에서 말하는 예루살렘 방문은 바울의 회심 이후의 세 번째 방문이 되는 셈인데, 사도행전에 따르면 두 번째 방문은 11장에 기록된 기근 구제를 위한 방문이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입장에서는 2장의 방문이 바울의 회심 이후의 두 번째 방문이다.

갈라디아서 2:1-10과 사도행전 11:27-30을 동일시할 경우 비록 사도행전 11장이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안디옥에서 일어난 이방인 선교사역을 토론하는 것을 서술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사도행전 11장에서 서술되었듯이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가는 동안에, 그 동안에 일어났었던 일에 대한 토의 없이 갈 수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갈라디아서 2장에 의하면, 그들이 가지고 간 기근 구제금에 대하여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의 이 방문에 관한 설명은 기둥과 같은 이들이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계속 기억하여 줄 것(바울 자신도 힘써서 하고 있는 일/ 2:10)을 요청하였다는 설명으로 끝났다. 갈라디아서 2장은 바울과 바나바는 계시를 인하여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그 계시는 사도행전이 언급하는 아가보의 흉년 예언에 대한 암시 일 수 있다(2:1; 11:28)

갈라디아서 2장에 의하면, 바울은 예루살렘의 기둥과 같은 이들과 함께 한 모임에서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에 관한 논쟁이 종결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가 다 옳다는 결론을 내린다. 바울이 회심한 이후에 한 예루살렘의 이차 방문은 사도행전 11장과 12장의 기근 구제 방문이었으며, 그것은 갈라디아서 2장에 기술된 방문과 같다.

 

2부 바울의 선교여행과 서신

5장 갈라디아의 내부와 그 주변 여행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화해의 방문을 가진 후에, 지중해 세계 주변으로 선교여행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먼저 성령의 지시를 따라 지체 없이 구브로섬으로 갔는데, 그곳은 역시 그들이 가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왜냐하면, 바나바가 구브로 출신이었고 안디옥 교회도 구브로와 어떤 연결 통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4:36, 11:20). 그들은 구브로에서부터 항해를 하여 지중해의 북쪽을 건너서 남부 터어키로 가서 다시 다소로 갔는데, 이는 바울이 다소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합리적인 이동이었다.

사도행전은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이웃 도시인 루스드라와 더베에서 열매가 맺히는 사역을 하였다고 기술한다. 그들은 동쪽으로 100마일 가량 되는 이고니온으로 이동을 하는데, 거기에서도 아주 동일한 형태의 사태가 일어나서, 결국 그들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유대인들이 선동하고 모함하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된다(14:1-5).

고후 11:23-27에 나타난 환난의 목록은 바나바와 함께한 바울의 선교사역에 대하여 우리가 조사한 사도행전의 설명과도 일치된다. 사도행전이 역시 말하고 있듯이, 그가 회당과 밀접하게 접촉하였고 그래서 그들과 갈등이 생겼음을 확증한다.

고린도후서 11장의 구절은 역시 위험한 여행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술과 부합된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11장이 사도행전에 있는 바울의 첫 번째 선교 여행의 설명과 일치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그 여행만 아니라, 계속된 다른 여행들 그리고/혹은 그 이전의 여행들을 포함하여 모든 여행을 일반적으로 설명한다.

사도행전 11, 12장과 갈라디아서 21-10절은 바울과 바나바가 재난을 당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더불어 사역을 논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기술한다. 그 토의의 결과로 그들은 이방인에게로 가는 소명을 인정받게 되었다.

 

6장 갈라디아서에서 일어난 일

바울의 복음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이차적인 것이라고 고발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하여 바울, 자신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았으며 그것은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자신의 복음이 나온 것이라고 주장을 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믿음에 관한 사항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 자신들의 회심-경험에 호소한다(3:1-5).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의 이야기와 그의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을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에 관하여서는 어떠한가?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그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고 또 그것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왜 율법을 주셨을까?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우리가 잘못했을 때, 우리를 지적하고 통제하면서 잘못을 일러준다.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율법으로부터는 자유하지만, 사랑 안에서 성령에 의해 사는 그리스도인은 역설적이게도 유대교 아래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하나님의 도덕법을 성취한다는 것이다(8:4, 13:8-10).

 

7장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바울과 예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가르치고 강조하는 많은 것들(살아계신 예수와 은혜 그리고 율법에 대해 강조함)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그 자신의 회심 체험을 통하여 왔을 것이다. 사실상 그는 자신의 복음을 직접 계시에 의해서 받았다고 말한다(1:12).

갈라디아서에서 확실한 가장 첫 번째는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예수의 죽음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의 죽음에 대해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의 최상의 표현이고 구원의 방법으로 보일 수 있는지를 설명했을 것이다. 또한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 갈라디아인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는 갈라디아서의 바로 첫 구절에서 이것을 언급하며 내 안에”(2:20) 지금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고 강조한다(4:6).

바울이 사랑을 성령의 첫 번째 열매로 강조하는 것과, 온 율법을 합친 것으로서 사랑을 논하는 것(5:14, 22)은 예수가 사랑을 가르치는 것과 공통된 점이 아주 많다.

 

8장 헬라지역 여행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라고 하는 해안 도시로 갔는데, 그곳에는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17:1). 사도행전은 이들이 세 번의 안식일 동안에 그 회당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고 기술한다(17:3).

사도행전은 아덴에서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였다고 설명한다. 그 후 바울은 아덴을 떠나 보다 더 남쪽에 있는 고린도로 가는데, 사도행전은 바울이 그곳에서 유대인 부부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거했으며, 그들과 함께 장막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상은 사도행전에서 말하는바 헬라에서의 바울의 이야기이다. 바울서신이 어느 정도까지 그 이야기를 확증하는가?

바울은 빌립보에서 그들이 빌립보에서 어떻게 고통을 당하고 모욕을 당했는지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고 나서 당국자들을 만주 대했던 것에 대한 사도행전의 이야기와 일치한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회당에서 세 번의 안식일 동안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기술하는데, 그 사실만으로 우리는 그가 3주 또는 4주 동안만 데살로니가에 머물러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자신이 손으로 일을 하는 것을 언급하는데 이것을 사도행전은 고린도에서 바울이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던 것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바울이 선교 여행을 할 때 행한 관례이었음을 증거한다.

 

9장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진행된 일

데살로니가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마치 다른 사람들의 관대함을 의지하여 그들에게 폐를 끼치면서 기식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 있었던 큰 문제는 예수의 재림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관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들의 죽음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4:13). 분명히 그들은 죽은 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주님의 재림과, 이것이 가져다줄 모든 축복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하면서 두려워했다. 데살로니가의 문제는 초대 기독교인이 재림을 중요시했음(현대의 기독교와 많은 차이가 있음)과 먼 장래가 아니라 곧 주님이 오시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두 가지 사실을 밝혀준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은사적인 교회이고, 예언이 교회의 삶에 한 부분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 권면의 형태를 볼 때, 예언적인 사역에 대해 어떤 논쟁과 그리고 아마도 그것에 대한 어떤 적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10장 데살로니가전서가 말하는 바울과 예수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가장 집중적인 가르침은 미래와 예수의 재림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어디에서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에 답하자면, 분명히 그들은 바울과 그의 선교팀으로부터 그러한 생각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면 바울은 어디에서 예수의 재림에 대한 신앙을 받았는가? 그가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통해 계시에 의해 이러한 신앙의 측면을 배운 것도 아니었다. 그 보다는 마라나타라고 보통 기도했던 교회에서 그것을 배운 것 같다. 특이 이 점에 대해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알았다고 생각할만한 이유가 있다.

하나의 좋은 출발점은 주님의 날이 밤중에 도둑처럼 온다고,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언급한 말이다(5:2).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가 말씀하신 도둑의 비유를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 및 누가복음 21장에 있는 예수의 미래의 오심에 대한 가르침은 이 세대 안에서예루살렘이 당하게 될 파멸에 대한 끔찍한 경고에 앞서서 나온다. 바울은 이 가르침을 알았을까? 그러한 경향을 지적하는 데살로니가전서의 증거는 유대인에게 닥치는 진노에 대한 216절의 언급이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이 남아있다. 왜 바울은 그 사건에 대해 진노’(‘마침내 그들에게 임한’)라고 간접적으로 간략하게 말하는가? 그 가능한 대답은 복음서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 의해 제시된다. 이 답변은 다양한 방법으로 지지될 수 있다.

첫째, 복음서에서 예수가 설명한 예루살렘에 임할 미래의 재앙은 로마인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예루살렘의 장래 멸망에 대해 말했을 때, 이것은 사람들에게 로마인과 그들이 보여주었던 위협을 연상하게 했을 것이다.

두 번째, 누가는 다가오는 재앙을 마태와 마가와는 어느 정도 다르게 기술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이 백성에게 (임할) 진노’(21:23)라고 말한다. 달리 말해 데살로니가 216절에서 발견되는 바로 이 말과 사상은 예수의 종말론적인 가르침에 대한 누가의 설명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진노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그 자체적으로 제시하는 설명은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가 가지는 어려움은 그 단어가 누가복음에는 있으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없다는 것이다.

셋째, 바울은 미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관해 누가복음에서 입증된 설명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는(그의 서신의 다른 어느 부분을 보면) 다소간의 증거가 있다. 그런 까닭에, 고린도전서 726절에서 바울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계속 혼자 사는 이유로서 임박한 위기/환나을 말한다. 여기서 위기/환난에 대한 헬라어는 anangke로서 누가복음 2123절에서 사용된 것과 정확하게 같은 단어인데, 여기서 예수는 지구상(또는 땅)에 큰 환난이 있겠다고 말한다.

넷째, 데살로니가후서로 가보면, 바울이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 가르친 강력한 증거가 거기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11장 데살로니가후서 연구

어떤 학자들은 데살로니가후서의 가르침은 데살로니가전서와는 상당하게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주장을 하는 바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고 느낀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어조가 데살로니가전서보다 거칠고 하나님의 심판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다른 학자들이 주장하는 아주 색다른 제안은 데살로니가후서가 데살로니가전서보다 오히려 앞서 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 중의 어떠한 것들도 그렇게 설득력이 있지는 않다. 오히려 많은 점에 있어 지적될 사항이 있다.

첫 번째, 익명의 방식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 서신 작성시에 잘 받아들여진 방식이었다는 증거는 그리 유력하지 않다.

두 번째, 두 편지 사이의 어조의 차이는 전통적으로 추측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보면 이치에 잘 맞는다.

세 번째,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종말에 앞서 일어날 일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해 가르친 예수와 데살로니가후서에서의 바울은 둘 다 인자가 오시기 전에 안티오쿠스를 닮은 새로운 참사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둘 다 이러한 끔찍한 일은 사람을 속이는 기사오 표적을 동반하다고 말한다(24:24; 13:22; 살후 2:9-11).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자신이 가르친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2:5). 이러한 관점과 우리가 보아온 관점에서 보면, 바울은 전적으로 예수의 미래에 대한 가르침을 그들에게 전하여 준 것 같다.

 

12장 에베소 여행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배를 타고 에게해를 지나 에베소로 들어갔다. 사도행전은 이 시점에서 그 기사에서 중요한 주인공이 될 사람인 아볼로를 언급한다(18:24-28). 사도행전은 아볼로를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고 말한다. 아볼로는 에베소에서 아가야 지방으로, 특히 고린도로 가서, 그곳에서 고린도의 유대인들과 눈에 띌 정도로 힘 있는 논쟁을 하여서, “은혜에 의해서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다”(18:27-28)

사도행전은 아시아에서의 바울의 사역이 매우 강력하고 힘이 있으며, 그의 말에는 특별히 놀랄만한 기적이 뒤따랐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도행전의 일들을 바울서신은 특히 고린도전서에서는 어떻게 확인시켜주는가?

고린도전서의 시작은 흥미 있는데, 왜냐하면 그 편지는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라는 이름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소스데네라고 하는 사람은, 앞에서 보았듯이 사도행전 1817절에서는 고린도의 회당 지도자로 언급된다. 그리고 사도행전이 그의 이름을 그곳에서 언급한다는 사실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갔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고린도전서는 또한 바울이 그 교회의 기초를 쌓은 사역을 한 이후에,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강력한 사역을 하였음을 확인시켜준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후에 쓴 것으로 그가 에베소에서 드로아와 마게도냐로 간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2:12-13).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그리도 또한 로마서는 이 시기에서 바울의 주요한 계획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위한 재정을 모급하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말한다.

 

13장 고린도전서에서 진행된 일

고린도 교회에서 무슨 일이 진행되는가? 그들이 당면한 문제거리가 무엇이며, 바울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고리도 교회 예배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말함으로 혼란에 빠져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울은 그 유명한 13장에서, 다른 어떤 은사들이 얼마나 훌륭하든지 간에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보다 더 지속적임을 계속하여 지적한다.

바울은 몇 가지의 실제적인 충고로써 영적인 은사에 대한 토론을 끝마치면서, 방언보다는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을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의 대답은 우상에 드려진 음식을 우리의 육신으로 먹는 일은 아무런 해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약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먹는 문제로 인하여 형제와 자매가 실족하다면 내가 먹을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길게 논하는 마지막의 분열의 문제는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질문이다(15). 고린도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한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부활의 여러 증인들을 내세웠다. 그리고 만약 부활이 없다면 고린도 교인들이 믿는 신앙이 헛것이라고 말한다. 또 부활의 몸의 성격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죽은 몸은 씨앗이 식물로 변형되듯이 그렇게 변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14장 고린도전서 말하는 바울과 예수

바울의 이혼에 관한 가르침은 예수의 말씀과 글자 그대로 동일한 것은 아니어도, 마가복음 101-12절과 마태복음 191-9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의 가르침과 아주 유사하다.

바울은 믿음의 관한 가르침에 있어 고린도전서 132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말한다. 산을 옮기는 믿음에 대한 표현은 마태복음 1720절에서 발견된 예수의 가르침과 아주 유사하게 들린다.

예수의 산상수훈이 바울 서신 가운데 유사하게 나오는데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로마서 1214-17절이다. 여기에서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 것과 악을 악으로 갚지 말 것에 대해 말하는 바울의 말은 심지어 원수라도 사랑하는 예수의 말씀을 강하게 생각하게 한다.

 

3부 마침

15장 그 외의 것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로 간다(20:1). 그 후에 그는 아가야로 계속 여행하여, 거기에서 석 달을 머물렀다. 이것은 고린도후서와 로마서를 통해 확인되는데, 로마서는 사실상 바울이 예루살렘과 로마를 향하여 출발하기 전에 고린도에서 보낸 편지이다(15:23-25, 16:1).

후기 서신에서 예수의 이야기와 담화에 대한 몇 가지 가능성 있는 암시를 밝히려 한다. 고린도후서에는 히브리어 아멘으로 중요한 말들을 소개하는 예수의 특징적인 방법에 대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예수 안에서 기름 부으심을 받은 예수의 세례에 대한, 예수의 변화에 대한, 예수의 가난과 온유함과 친절함에 대한, 사도들과 기적에 대한, 그리고 아마도 예수의 맹세의 가르침에 대한 적절한 암시가 있다.

 

16장 참된 이야기

참으로 이상적인 것은, 예수의 전승이 바울의 서신 속에서 논하고 있는 모든 주제에 관해 어떻게 그렇게도 의미 있어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의 바울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문제 속에서든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죽은 그리스도인의 운명이든지, 고린도서의 성과 결혼에 관한 것이든지, 바울은 그가 말하는 것 안에서 예수의 전승을 깊이 있게 접근한다. 예수의 이야기와 담화는 그에게 기본 토대가 되었으며 그리고 그의 가르침의 핵심적인 것이었다.

 

. 서평

이 책을 읽고 난 후 바울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보았다. 바울은 자신이 사역하던 시대뿐만 아니라 그가 죽고 난 후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그의 사도권과 복음에 대하여 공격을 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바울은 이러한 공격을 당해야만 할까? 이미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는 바울을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사도권과 복음을 부인할까? 바울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러한 여러 가지 생각을 통하여 근본적으로 떠오른 질문은 과연 바울이 전한 복음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을 공격하는 이들의 목적은 바울의 명예를 훼손시키려는데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복음을 공격하여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을 공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이 이러한 복음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예전에도 저자와 비슷한 변론들을 해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특히 이 책에서는 바울의 복음 가운데 예수의 지상적 삶과 가르침을 언급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바울이 예수에게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신의 신학적인 상상력으로 다른 복음 즉 다른 예수를 전했다고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변론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바울의 복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바울이 거짓 사도인지 아닌지를 보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가 예수를 따른다고 주장하면서 예수의 복음과 다른 복음을 주장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바울의 복음이 그 핵심에서 예수의 이야기와 담화를 포함한다는 엄청난 양의 증거가 있음을 밝혔다. 물론, 바울이 서신에서 그것들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는 언급하고 그리고 자주 암시 한다. 저자는 사도행전에 있는 바울의 삶과 사역에 대한 설명이 진실성이 있는 설명인지 아니면 약간 가공적인 말로 꾸민 것은 아닌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들을 비교하면서, 그것들이 좀 더 넓은 역사적인 상황에서 서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보려고 했다. 그리고 그 서신들이 바울과 그의 사역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를, 특히 예수에 대한 바울의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이 책은 바울의 네 서신(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고린도전서)에 집중되어 있다. 저자는 이 서신들이 바울의 초기에 현존한 서신들이라고 주장했다. 이 서신들 안에서, 저자는 바울이 사람들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친 증거를 발견했다.

저자의 이러한 증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증명해 왔던 것처럼 바울의 복음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이러한 저자의 연구와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아픈 것은 바울의 복음을 아니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을 공격하는 이들은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복음의 핵심이 아닌 변두리적인 문제로 공격하고 있지 않은가? 바울이 예수의 지상적 삶과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다는 이유만으로 바울의 복음의 진실성을 공격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이들은 또 다른 변두리적인 근거들로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을 공격할 것이다.

이 책의 논지와는 다르지만 이 책을 읽고 아쉬운 점은 복음이란 무엇인지 좀 더 정확히 규명했으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증명들도 정말 값지고 귀한 것이지만 그만큼 가장 중요한 복음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공격들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가 복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전제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여러 가지 증명을 통하여 더욱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데 힘을 썼다. 하지만 진짜 그러한가? 이 책을 읽고 좀 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곧 바울의 복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역시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진짜야 라고 답할 것이다. 바울의 복음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무너짐을 보면서 통쾌해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속고 있는지 모른다. 이들의 공격 속에 있는 또 다른 공격에 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핵심이 아닌 복음의 변두리적인 것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복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착각을 만들지도 모른다.

저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가르쳤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진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어떤 것인가? 왜 우리가 아니 본인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본인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십몇 년에 신앙생활을 통하여 복음을 정확히 모르고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 아주 오랜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이러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다른 믿는 사람들까지 본인의 경험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가슴이 아픈 것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울의 복음 속에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진짜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중용한 것은 그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무슨 상관이 있냐는 것이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복음이 여전히 우리에게도 거리끼는 것이 되고 미련한 것이 되어야 하겠는가?

본인이 소망하는 것은 이 복음이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길 소망한다.

본인은 이 책을 통하여 절대로 저자의 노고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연구의 가치는 정말로 중요하다. 우리의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데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 하지만 바람이 있다면 더 많은 학자들이 복음이 무엇인지 선포해줬으면 한다.

이 책을 통하여 저자가 증명하는 방법들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들을 비교하며 저자의 논지를 증명해 나가는데 있어 본인은 성경에 대한 짧은 지식으로 인해 정확히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2:1-10과 사도행전 11장과 12장을 동일하게 볼 것이지 아니면 15장과 동일하게 볼 것인지에 대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른 학자들에 주장과 주석서들을 통해 각자의 주장을 볼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망설이게 되었다. 이것은 좀 더 공부해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에게 있어 이 책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책을 통하여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가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진정 소망하는 것은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 가운데 다른 복음이 아닌 예수의 복음이 더 많이 더 자주 선포되길 바라며 그 복음의 넓이와 깊이와 길이와 높이가 어떠한지 깨닫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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