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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
Ⅰ. 저자 및 역자 소개
1. 저자
저자는 리치몬드의 유니온 신학교의 히브리어와 구약학 교수이다. 저서로 「하나님의 나라」「이스라엘 역사」「구약의 권위」,특히「이스라엘 역사」와「하나님의 나라」는 뛰어난 명저로 알려져 있다.
2. 역자
역자는 총신대학과 동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동 대학원을 수학하였다. 현재 총신대학 교수이다. 역서로, 체스터 레만의 「성경신학 Ⅰ,Ⅱ」가 있다.
Ⅱ. 저술목적 및 의도
저자는 본서를 통하여 독자들이 성경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경을 통하여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을 받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Ⅲ. 구성
본서는 총 9장으로 되어 있다. 각 장을 통하여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말하려고 한다. 통일된 주제는 구속 곧 구원이라는 주제이고 특별히 그의 통치 아래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념 및 이에 수반하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소망에 대한 이념을 둘러싸고 있는 개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Ⅳ. 요약
제 1장 하나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국가
하나님 나라의 관념은 그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전 관념을 포함하고, 특별하게는 역사의 종말에 그 통치를 완성하시고, 백성을 영광 속에 두신다는 관념을 포괄한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대망했던 나라였다. 성경의 기록들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우리는 자연과 역사를 지배하시는 강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이 역사적 활동 속에서 자기들을 선택하시고, 자기들과 언약을 맺으시며, 자기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구약의 언약은 항상 신약에서처럼 은혜의 언약으로서 적절하게 조명되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그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오직 그만을 섬기고, 그의 언약의 법에 순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한 국가로서 그 역사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 아래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관념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고, 그것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관념도 시작된다.
이러한 특징은 오래 전에 있었던 출애굽 설화 속에 깊이 채색되어 있었고, 따라서 모든 선지자의 선포가 그것에 기초되어 있었다고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그들 사이의 언약적 구속관계는 기계적인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의 백성으로서의 운명을 부여하셨고,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이 그분에게 복종하는 한도 안에서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언약의 백성의 개념은 이스라엘에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커다란 운명의식과 확신으로 승화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목적지로 인도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제공하였다. 이 신앙이 미래를 빛으로 채우고, 이스라엘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다윗왕국은 잊어버릴 수 없는 인상을 심어놓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은 그들이 꿈꾸었던 그 어떤 국가보다 행복한 국가를 실현시켰다고 생각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창 12:2)-이 충분히 실현되었고, 참으로 하나님은 평화 속에서 자신의 기름부은 자를 통해 그의 나라를 수립하셨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윗시대는 충분히 잃어버린 황금시대를 실현하였다. 그래서 유대사람이 다시 태어난 다윗, 곧 새로운 다윗을 제외하고 도래할 메시야를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종교가 은밀하게 국가를 예배하는 지위로 전락하는 유혹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유혹이었다. 이스라엘은 다윗왕국을 하나님 나라로 생각하고, 그 안에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세우셨다고 잘못 상상하지는 않았는가? 그것이 이스라엘의 문제였다.
제 2장 심판 아래 있는 이스라엘 국가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 왕국과 동일시되는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의 국가를 이스라엘의 운명의 실현으로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그의 운명이 보다 고대의 전통적인 양식에 비추어 교정될 때 발견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것은 정치활동에 의해 가능하다는 감정이 존재하였다.
언약과 선택에 관한 전반적인 관념이 기계적인 것으로 되어버렸고, 그 안에 내재된 깊은 도덕적 특징은 오염되고, 퇴색되었다. 언약은 양당사자간의 계약으로서, 그 백성들이 오로지 여호와만을 예배하고,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그분의 공의로운 법을 성심을 다해 엄밀하게 순종할 것을 요청한다는 사실이 망각되었다. 아니면 비록 그 의무가 철저하게 기억된다고해도, 아낌없는 희생제사와 산당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로 그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유대는 피와 제사에 기초된 정적이고, 이방적 성격의 일로 – 언약적 이념의 완전한 전도- 변질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것은 오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그분의 의를 드러낼 때 한해서 그렇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언약적 형제관계를 어처구니없이 위반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절대로 아니다!
바로 여기서 아모스가 하나님 나라의 관념에 대해 끼치고 있는 엄청난 공헌이 분명히 나타났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백성 및 나라를 이스라엘 국가와 동일시하는 것은 완전히 불경적 입장이라고 천명한다. 이러한 동일시에 대한 저항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왕정제도는 하나님의 질서가 아니고, 비록 용인되고, 필수적인 질서로 간주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질서와 일치시킬 수 없다는 고대적 감정으로 되돌아갔다.
제 3장 남은 자는 회개하리라
국가는 심판 받을 운명에 처해 있었다. 비록 호세아가 어떤 국가가 그 심판의 도구가 될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에 관한 사실은 도덕적 확실성이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성취에 대한 소망이 완전히 이스라엘 국가와는 분리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형식을 취하기 시작한다. 그의 백성들과 “이혼”하고, 그들은 파멸시켜야 하는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미래를 준비하신다. 확실히 심판은 피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땅으로부터 내쫓김을 당하고, 액면 그대로 아무것도 없이 광야에서 잊고 있었던 자신의 옛날의 순결과 충성을 다시 한번 배울 것이다. 거기서부터 이스라엘은 새로운 출발점 곧 그의 하나님과 새로운 혼인관계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이사야는 결코 국가에 대한 심판을 완전한 파멸로서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연단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순수한 남은 자들이 나오는 정화로서 보여지는 것이다. 불 같은 시험 속에서 단련되고, 하나님의 목적에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의 순수한 남은 자의 관념은 이사야의 모든 개념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개념이고, 그 이후로 오랜 세월 동안 그의 백성들에게 심원한 영향을 미친 개념이었다. 사실상 그가 심지어 자기의 두 아들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노략이 속히 임하리라”는 뜻)와 스알야숩(“남은 자는 돌아오리라” 또는 “회개”라는 뜻)으로 지은 것은 그것이 이사야의 사상의 아주 기본이었음을 보여준다.
항상 남은 자는 존재할 것이다! 이것은, 거듭 말하지만, 이사야가 현존하는 국가나 국가 안의 어떤 단체를 하나님의 자신의 지배권을 수립하시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과 동일시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은 현존하는 국가와는 전혀 별개의 사실이다. 그것은 그것이 현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에 따라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미래 속으로 투영되고, 메시야의 이상국가, 곧 남은 자의 이스라엘 위에 투사되었다. 그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의 메시야 대망에 그 고전적 표현이 주어졌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소망은 현존 국가를 넘어 장래로 인도된다. 그러나 이러한 장래적 관점과 더불어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적 관점이 또한 존재한다. 장차 이 남은 자를 다윗계열의 메시야인 왕이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사야가 그 국가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현재 존재하는 국가를 넘어서 있는 어떤 실재라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역사가 향하여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이다. 거기서는 정의가 다스릴 것이며, 평화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마침내 전세계의 축복의 근원이 되는 자신의 운명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나라의 참된 지배자가 되실 것이다. 다윗계열의 왕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 영으로 말미암아 그는 다스린다.
남은 자에 대한 이사야의 사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로부터 국가 안에 있는 “교회”로 뚜렷하게 이전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남은 자의 관념 속에서, 혈통적 이스라엘과 참된 이스라엘, 현실적 이스라엘과 이상적 이스라엘 사이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 관념은 현실적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는 –그 환상은 이스라엘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히브리 신학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연단 받고, 그의 목적의 도구가 되는데 적합한 참된 이스라엘이 언젠가는 출현할 것이라는 확신이 등장한다. 그것은 혈통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인적 부르심의 선택에 따른 이스라엘이다.
제 4장 파기된 언약과 새 언약
요시야의 개혁에 관한 이야기는 열왕기하 22-23장에서 발견된다. 그 개혁을 시작한 목적은 23장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이교를 철저하게 소탕하자는 것이었다. 의심없이 하나님이 앗수르라는 거인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이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이 자유의 순간을 허락하셨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에 예레미야를 만나는 지점은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이다. 처음에 예레미야가 개혁에 관해 어떤 생각을 했든지 간에, 그는 그것이 이루어놓은 일이 얼마나 일천한 것인지를 오래지 않아 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성전 안에 짙게 깔린 커다란 덩어리의 분향 여기만 일으키고, 수많은 예배자들로 인해 혼잡만 있을 뿐, 고대적 전통의 길로의 참된 복귀는 이룩하지 못했다. 예레미야는 언약적 유대관계는 단순히 외적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님을 그의 백성들에게 역설하였다. 그는 그들이 제사법에 대한 분주한 준수로부터 전환하고, 율법에 대한 외적 준수로부터 그에 대한 내적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구속에 대한 모든 거짓된 소망들을 배운다. 국가와 그 정책, 그 부와 그 번영, 심지어는 그 종교와 개혁에 대한 그 고상한 수고까지도 하나님 나라를 창조할 수 없고, 하나님이 지배할 백성들을 낳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또한 참된 소망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새 언약 – 인간의 마음 속에 씌어진 그 법- 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다. 이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하자면 거듭난 마음을 가진 순결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제 5장 바벨론 포로와 새 출애굽
여기서 우리는 모든 만국의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범세계적인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확실하신 분인 것처럼 확실한 그 나라의 승리는 힘이나 웅장한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고난의 종의 희생적 노력에 의해 얻어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나라에 대항하는 인간의 저항, 곧 그것이 고난의 종의 피를 흘리게 할 정도로 처절한 저항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구속의 도구로서 제의적인 속죄나 외적 율법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동일한 종의 고난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은 그의 고난의 종의 대리적 희생을 통해 그의 나라의 승리를 의도하신다. 여기서 구약성경의 신학은 확실히 그 자체를 넘어서고, 신약성경의 신앙과 병행한다.
이스라엘은 고난의 종의 백성이 되는 자들이다. 오직 그때에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고난의 종은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선포하고, 이스라엘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고난의 종을 따르고, 고난의 종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종의 구속적 사명을 분담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와 분리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난의 종은 이스라엘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옛 입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항상 금지된다. 이스라엘은 고난의 종의 발자취를 따라 선교적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 그 이유는 이것만이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의 길이기 때문이다.
제 6장 거룩한 국가공동체와 묵시적 왕국
유대교는 사실상 선교의 종교가 되지 못했다. 그의 하나님을 섬기는 개종자를 낳기 위해 분투하는 많은 헌신된 유대인들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의 종교로서의 유대교가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공식적 시도를 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런 풍토 속에서 고난의 종의 사명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 질리는 만무하였다. 참으로 이스라엘은 그 소명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유일신론적 신앙은 논리적으로 그 사명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항상 이 사명을 수행했을 때, 이스라엘 자체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이방인들 전체가 참여한다는 사상과 그들을 얻기 위해 감당해야 할 고난의 선교에 대한 사상은 광범한 지지를 확보할 수 없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다른 표현의 길을 찾아야 했다. 특별히 그것은 율법 준수에 대한 관심과 궁극적으로 묵시문학에서 연원하는 종말의 도래에 대한 대망 속에서 찾아졌다. 바벨론 포로 이후 예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지금까지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에 묵시문학으로 알려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안에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믿는 신앙이 표현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바야흐로 남은 자 중에서 수립될 것이라고 믿어졌다! 냉정하게 보면, 확실히 이것은 참으로 환상적인 소망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페르시아의 권력은 무너지지 않았고, 확실히 자그마한 예루살렘 공동체는 그것을 무너뜨릴 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자 “묵시적인 기마인”을 보내어 땅을 두루 살펴보게 하셨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보고하는 바 곧 온 땅이 평온하고 정온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 평화를 뒤엎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로 하셨다. 하나님은 곧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다. 그것은 새 출애굽의 시기로서, 위대한 종말의 드라마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물론 이 소망은 무참하게 깨어졌다.
어떤 이는 이런 좌절로 인해 소망은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았다. 참으로 궁극적인 신적 승리에 대한 확신은 이스라엘 신앙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신앙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포기될 수 없었다. 더욱이 묵시문학 속에는 우리가 간과해버리기 쉬운 잘못에 대한 아주 건전한 안목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묵시문학은 우리에게는 기이하게 보이기는 해도, 역사의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합법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은 똑같이 중요한 또 다른 발전을 보았다: 그것은 거룩한 국가공동체는 율법의 준수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이 점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이스라엘의 감정의 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묵시문학이 오직 하나님만이 낳을 수 있는 나라를 소망했다면, 거룩한 국가공동체는 인간의 의가, 비록 그것을 낳을 수는 없다고 해도, 적어도 촉진시킬 수는 있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오직 하나님만이 순종하고, 의로운 백성들을 다스릴 것이라는 깊은 확신을 표현한다. 참된 이스라엘 곧 남은 자를 현실적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거룩한 국가공동체의 목표였다. 따라서 그토록 얻기 위해 인간적으로 투쟁했던 그 의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향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 나라와 그 의는 율법공동체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 자체를 초월한 해결책 – 새로운 의- 을 지시해야 했다.
제 7장 하나님 나락 가까웠느니라: 메시야 예수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는 누구이며, 그는 무엇을 하기 위해 오셨는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다양한 답변들을 만족시켜야 할 만큼 단일한 답변은 전혀 제공하지 않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로 획일화시키기에는 어려운 명백한 차이점들이 신약성경 안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는 근본적인 통일성이 존재한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통일성은 엄밀히 말해 그 복음 속에 놓여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복음이자 아주 명쾌한 복음이다. 그것은 선지자들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그토록 오랫동안 대망했던 메시야가 오셨는데, 그는 다름아닌, 성경대로 강한 권능으로 사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 예수라는 것을, 그리고 이 예수는 이제 하늘로 높이 올리우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곧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선언하였다. 이제 사람들은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 새 시대를 위해 결단해야 한다!
메시야 양식들은 각기 고립된 예언들이 아니고, 고대 이스라엘의 사고방식과 경험들에 따라 형성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표현들이다. 이 모든 양식들 중에서 가장 심원한 양식은, 비록 유대인들은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았지만, 고난의 종의 양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예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인격과 그의 구속적 목적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함축하고 있다. 선지자에게 자신의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보는 것이 허락되었을 때, 그에게는 이런 하나님이 전쟁과 영광과 국가적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고난의 종의 헌신과 자기부인과 대리적 희생을 통해 그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제 8장 두 세계 사이: 하나님 나라와 교회
그리스도의 나라의 구성원들은 그분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복음서에서 거듭 주장하는 사실이다. 어쨌든 신약성경은 승리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의 참된 상속자인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로 높인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이 바로 유대인이다.
가시적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신약성경 안에는 전혀 없다. 이것들을 동일시하는 교회는 곧 그 자신의 인간적 정책과 실천들을 승인하도록 하나님을 끌어들이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의 특별한 신념들을 공유하고 그 예배행사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사람들과 동일시할 것이며, 그 양적 성장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발전을 헤아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성경의 교회가 아니다! 이 같은 동일화는, 아모스 이후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말했던 것처럼, 커다란 유혹이다. 그것은 단지 외적 복종에 의해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고 있다. 어리석은 교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허탄한 기대에 불과할 따름이다.
우리가 했던 말들에 비추어 보면,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 나라는 이중적 국면으로 이해되어야 함이 명백하다: 먼저 그것은 세상 속에 임하여 현존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아직 임하지 않았다. 그 두 국면 사이의 긴장 속에서 교회는 살아야 하고, 항상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살아야 한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그 나라를 이중적 관점에 따라 조명한다: 즉 그것은 이미 임했고(“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그것은 아직 임하지 않았다(“나라이 임하옵시고”).
따라서 신약성경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도래하고, 현실화되었다는 확신과 아직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승리에 대한 열렬한 대망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것은 심각한 긴장으로서, 쉽사리 피할 수 있는 긴장이 아니다.
제 9장 세상 끝날까지
신약성경 교회의 선포는 단축되었고, 마지막 때는 도래했다는 확신에 절박한 긴급성을 부여하였다. 교회의 복음을 말하고, 선포하라. 그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없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교회는 오직 하나의 구속공동체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미국이나 다른 어떤 국가도 아니며, 그렇다고 국가들의 정부도 아니고, 오직 전포괄적인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라고 역설한다. 그것이 역사의 희망이다. 교회는 그 나라를 지적하고,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그 시민으로서 그 유익한 통치에 복종하도록 요청한다. 그때에만, 오직 그때에만 의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단순히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또는 고대해야 할 하나의 사실로서만 선언하지는 않는다. 교회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화된 사실로서 선언한다. 즉 교회는 그것을 지금 여기 세상 속에서 역사하면서, 인간들의 마음 속에서 그 구조를 세우고 있는 현재적 사실로서 선언한다. 그것은 승리의 나라이다!
교회는 승리를 외치는 복음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서광은 보이지 않고, 승리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심지어는 교회에 속한 수많은 자녀들까지도 이것은 교회의 무력함의 증거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구원문제에 있어서 교회에 기대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긴장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두 세계 사이의 긴장이다. 즉 그것은 모든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세력들에 예속되어 있는 하나님 교회 사이의 긴장이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긴장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신약성경 교회와 달리, 우리는 그 안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전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거기서 이런 긴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감정, 그것은 교회가 서있어야 하는 적절한 지점이 아니라는 감정을 갖고 있다. 우리는 교회로서의 우리의 사명의식과 우리의 자랑을 침해 받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그것을 피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것은 우리를 딜레마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교회는 그의 주님의 분부에 따라 역사의 세력 속에 직접 뛰어들었을 때, 위대해졌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교회가 비대해지고, 십자가를 회피하려고 하면, 결코 위대할 수도 없고, 위대함을 낳을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에 의해 승리하고, 십자가에 의해 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를 낮추는 – 그리고 그 십자가를 취하는 – 교회에 의해서만 세상에 중재된다.
우리가 편하게 들을 수 없는 한 교훈이 이 비극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말해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이 지상 사회에서 우리의 육체를 살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의 나라에 순종하는 종이 되도록 우리의 영혼을 연단시키는 것- 필요하다면, 우리의 육체를 희생해서라도- 이다. 역사의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섬기고, 그분에게 전적인 순종을 바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Ⅴ. 서평
존 브라이트는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으로 이 책을 저술하였다. 또한 그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진지하게 대면하고 사랑하게 하기 위함은 우리의 구원의 문제가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구원의 문제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가는 곳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현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으며 또한 이 땅이 아닌 완전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백성들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가?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류 속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의 구약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정확하게 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선택 받음으로 그리고 율법을 지킴으로 종교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생각 속에 있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저자가 말한 대로 영원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택함과 언약 속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라는 전제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 그 백성답게 살지 않는 자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 중에 특히 교회 무리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러한 오류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안에 있으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하나님 나라가 보장된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믿는 오류 속에 빠져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진심으로 저자에게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사는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종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한번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고백하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 길은 고난의 종의 길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쫓는 것이다. 하지만 존 브라이트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책을 쓴 그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경청하지 않음을 참으로 애석하게 생각한다.
이 일을 교회가 담당해야 할 터인데 어떤 교회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뺀 다른 복음을 얘기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더욱 문제인 것은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 같지만 마치 중세 교회에 면죄부를 통하여 죄사함을 선포한 것처럼 아무런 회개의 열매 없이 십자가만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았다는 식의 선포는 더욱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십자가를 믿는 것은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는 순종이 필요함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 곧 남은 자들이 이미 현재에 승리하며 살고 있으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갈등 사이 속에 있다고 말한다.
본 제출자는 이러한 갈등 사이에서 우리가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 있는 부분 한 가지를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죄의 문제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우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죄사함을 받았고 사단의 세력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김을 받았다. 하지만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핑계로 죄의 유혹에 다시 넘어지곤 한다. 바로 이때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본 제출자는 바로 이 부분이 큰 오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복음을 받기 전에 우리는 죄인이였으며 사단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종 노릇하면서 사단을 섬기며 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복음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능력은 그러한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건져내어 하나님 나라의 양자로 삼아 주셨다. 그리고 죄의 종 노릇 하는 것이 아닌 의의 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좇아 우리는 육신이 아닌 성령을 좇아 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다시 예전에 모습으로 사단의 세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혹은 넘어질 때 이러한 책임을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것으로 핑계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류이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은 나 자신의 책임이지 결코 육신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고 아직 완전하지 않다고 하지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완벽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하나님 나라에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지 그 하나님 나라가 결코 완벽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복음의 능력을 우리가 사용하지 않은 것이지 복음의 능력이 약해서 우리가 또 다시 죄를 범하고 사단에 종 노릇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본 제출자는 이 사실을 알기 전까지 하나님께 책임 회피를 했었다. 하나님 제가 죄를 이기지 못함은 육신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복음을 통하여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것을 우리가 사용하지 않은 것은 우리 책임이지 결코 복음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책임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핑계를 대면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어라는 핑계를 대면서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묵인하면서 살지만 내가 죄를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은 육신의 연약함이 아니라 내 책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혹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핑계를 대지 않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무시하고 불순종함을 용서해 달라고 회개할 수 있는 것이다.
본 제출자와 같은 핑계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면서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핑계로 반복해서 죄를 짓고 회개를 하지만 계속해서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함정 속에 빠져 있다. 육식의 연약함이라는 것으로 어쩔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들이 육신의 연약함이라고 고백하면서 회개하고 반복하고 있는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들이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육신의 연약함이 아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 안에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있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나 자신의 책임임을 깨닫는다면 계속해서 반복된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아무 공로 없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음을 부활을 통하여 나타내셨다. 이 복음은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죄인임을 아는 자에게는 너무나 큰 은혜이며 기쁜 소식이다. 또한 이 복음은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해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죄의 공격 속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 또한 주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면 죄의 종이 아닌 의의 종으로 하루 하루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땅 가운데서 이미 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이미 이 땅에서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이다.
본 제출자와 같이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핑계로 하나님의 통치를 무시하고 죄의 종 노릇하면서 회개를 하지만 또 다시 넘어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육신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말하고 싶다. 그 문제가 바로 우리가 회개해야 할 문제임을 지적하고 싶다. 또한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함을 정말로 두렵지만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과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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