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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하나님의 아들을 둘러싼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의 논쟁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
아리우스는 리비아에서 태어났던 것 같다. 그가 안티오키아에 있는 기독교 교리문답 학교에서 안티오키아의 유명한 신학자 루키안의 지도를 받으면서 신학을 공부했음이 분명하다. 루키안은 이단으로 정죄 받았던 사모사타의 바울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다.
안티오키아의 루키안 문하에서 공부하는 동안 아리우스는 루키안의 제자들 가운데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라는 사람과 친분을 쌓았다. 두 사람은 일생 동안 친구와 동료로 지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 동일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들의 신앙과 신학은 그들의 스승, 루키안의 가르침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루키안처럼 그들은 양자론보다는 사벨리우스주의(양태론)를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물론 루키안이나 아리우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공개적으로 양자론의 교리를 받아들이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양자론은 268년 안티오키아 노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아리우스 가르침의 배경에는 또한 오리게네스가 서 있다. 오리게네스는 아마 루키안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성경과 신학을 공부했던 기독교인들은 오리게네스의 기독록-성부와 로고스의 영원한 동등성-의 한쪽 측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로고스의 본질에 관한 아리우스와 알렉산더 사이의 충돌의 깊은 배경에는 그리스 철학이 놓여 있다. 비록 그들이 그것을 다르게 설명하고 적용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무언가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신성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하다는 점, 그리고 신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신에게 어떤 속성을 부여하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불변성과 무감각성은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주요 속성이 되었고 아리우스와 그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로고스의 성육신이라면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이 신이신 것처럼 마찬가지로 로고스도 신이라면 하나님의 본질은 시간 안에 있는 예수의 인간적인 삶에 의해 변화될 수 있고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을 거라는 논리를 개발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변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논리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육신하였던 로고스는 온전히 신일 수가 없고 오히려 그는 위대하고 고귀한 피조물임에 틀림없다.
아리우스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에 관한 감독 알렉산더의 신학을 공격했을 때 그를 열렬히 추종하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인성을 부인하고 사벨리우스 이설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아리우스는 그 문제를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면서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인들에게 로고스(혹은 하나님의 아들)는 피조물이며 성부와 동등하지 않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성자와 성부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를 설명함에, 후자는 영원하고 불변이지만 전자-로고스-는 세상보다 앞서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변할 수 있고 고난을 겪을 수 있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
알렉산더가 소집한 노회가 318년 소집되었을 때, 약 100명 가량의 감독들이 제국의 동방 지역에 퍼져 있던 여러 교구들로부터 참석했고 아리우스의 신학을 비판하는 알렉산더의 입장을 청취했다. 알렉산더는 로고스가 사탄처럼 타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아리우스를 고소했다. 그는 또 아리우스는 사모사타 바울의 양자론을 교묘하게 반복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바울의 기독론이 268년 노회에서 정죄 받았던 이유는 그의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삼위일체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아리우스의 기독론은 천상의 위대한 존재로서 로고스의 선재설-이 점에서 사모사타의 바울의 주장과는 약간 다르긴 하지만-을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바울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고 알렉산더는 주장했다. 아리우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친히 인간과 연합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이 연합에 의해 구원받지(신성화)않는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바로 이 때문에 우리 구원이 위태롭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아리우스주의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예수 안에서 성육신한 로고스에 관한 아리우스와 알렉산더의 차이는 구속론-구원에 관한 교리-과 관련이 있다. 알렉산더는 정통 구원론은 이레나이우스로 소급해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에 자유롭게 순응하는 것을 강조한 구원관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중요한 차이는 “알렉산더는 정통 구원은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아들에 의해 달성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피조물과 연결시키는 것은 육체를 취하는 신의 본질이다. 아리우스주의는 구원은 창조물과 동일한 아들에 의해 달성된다. 그리스도와 피조물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은 의지의 순응이다.” 아리우스는 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출생된’(그리스어 게네코스)이라는 사도적 단어를 활용했다. 그래서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출생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는 시간 안에서 시작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본질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위대한 피조물이지 하나님 자신은 아니다.
아리우스주의에 대한 알렉산더의 대응
왜 알렉산더와 그의 장로들과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은 아리우스의 가르침에 대하여 그처럼 맹렬히 반대하였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구원 자체를 위협한다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사죄나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로서의 구원을 교리적인 신앙으로부터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분리는 교회 전체 역사를 통해 볼 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너무 충격을 받았고 특별히 대부분의 알렉산드리아 기독교인들이 아리우스의 가르침에 매혹당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알렉산더는 우리가 알고 믿는 복음이 끝장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논쟁은 결국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관심을 이끌었다. 그는 기독교가 흔들리는 제국을 하나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종교적인 “아교”역할을 해주기 바랐다. 그래서 그는 교회 지도자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난해한 신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논쟁에 휩쓸렸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우리는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 도처의 모든 기독교 감독들에게 한 모임에 오도록 요청하는 드라마틱한 단계를 밟았음을 보게 된다. 이 모임은 이러한 교리적 논쟁을 해결하고,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간주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제 12장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문제 해결
바실리우스의 위대한 신학(330년-377 or 379년)
삼위일체론에 대항하여 유노미우스파가 주로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은 비출생이라는 점이며 성자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자는 태어났기 때문이다. 『유노미우스에 대항하여』에서 바실리우스는 네 가지 주요 주장을 통해 응답했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했다고 하는 유노미우스의 주장을 비웃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된 존재와 특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무한하며 영원한 본질은 우리의 유한한 이해를 넘어선다. 두 번째, 바로 인간의 출생은 항상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또 언제나 낳은 자에게 태어난 자는 일종의 존재적 하위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이 성자 아들을 낳으셨다고 하면 필연적으로 성자는 성부에 대하여 하위에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세 번째, 바실리우스는 출생(태어난 과정)은 태양의 광선과 같은 유비를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영원할 수 있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나갔다. 태양이 광선(광채)없이 존재한 때는 결코 없었다. 그러나 태양은 지금도 여전히 그 광채를 발생시킨다.(낳는다)그처럼 성부는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을 발생시키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출생된 자이다. 마지막으로,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아직 자기를 계시하지 않으신 분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한 피조물이라면-고양된 분이라 할지라도-인간은 여전히 하나님 얼굴의 참된 계시가 아니다.
바실리우스의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인 『성령에 관해서』는 성령의 신성과 인격을 부인했던 성령종속론자들에 대항한 작품이다. 바실리우스는 성령종속론자들도 그들의 예배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성령을 예배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만약 성령이 신이 아니라면 그 예배는 신성모독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실리우스의 적대자들이 그를 향해 퍼부었던 비난들 중의 하나는 그의 삼위일체론의 견해는 필연적으로 삼신론, 즉 세 분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인도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그리스어 “우시아”(본질)와 “히포스타시스”(본체)는 종종 동시적으로 사용되지만 구별된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갔다.
이것은 분명히 난해한 설명이다. 바실리우스는 그 의미를 풀어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두 가지 유비를 사용했다. 첫째로, 그는 ‘우시아’(본질)와 ‘히포스타시스’(본체)의 구분을 설명하기 위해 세 명의 개별적인 사람들의 공통적인 인간상을 언급한다. 즉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간이며 동등하게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 또는 본질(ousia)을 공유하고 있다. 동시에 세 사람 모두 독특한 특질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인간성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서로 같지 아니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의 본체들도 이와 같다. 두 번째 유비는 무지개였다. 오직 바보만이 무지개는 여러 다른 것들 또는 다른 실체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동시에 오로지 바보만이 무지개 안에 있는 색깔들 사이에는 구별이 없다고 논할 것이다. 그 색깔들은 무지개를 완전히 분리해 버릴 수 있는 부품들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세 개의 독특한 그러나 분리할 수 없는 실제로 된 하나의 신적 본질 또는 존재이다.
바실리우스의 ‘우시아’와 ‘히포스타시스’ 사이의 구분에 관해 두 가지 점이 언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구분이 기독교 삼위일체론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히포스타시스’와’우시아’ 두 용어들은 동의어로 이해될 수 있었다. ‘히포스타시스’는 종종 그리스 문화에서 “본질”을 언급할 때 ‘우시아’ 대신에 사용되기도 한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에게 본질은 일종의 플라톤의 형상 개념, 어떤 의미에서 개별적인 것들 “위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예를 들면, 성부, 성자, 성령은 그들의 공통적인 본질(신성)이 그들 개별적인 위격들보다 어느 점에서 보다 “높고” 실제적이라고 한다면 세 개의 신(삼신론)이 아니다.
바실리우스의 본질과 본체 혹은 “위격”(히포스타시스) 사이의 구분에 관해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두 번째 것은 바실리우스나 두 명의 그레고리우스는 ‘히포스타시스’의 개념을 개별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현대인들은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비서구 문화권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처럼 고대인들에게 ‘인격’(person)은 “자유의지와 의식적인 활동의 개별적인 자아실현”을 의미하지 않았다. ‘인격’은 어떤 의미로는 개별적이지만 그러나 항상 공동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실리우스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을 “세 인격들”(세 개의 본체들)로 언급할 때, 그에게 성부, 성자, 성령은 무한하고 초월적이며 그리고 완전히 순수한(하나로 된) 한 하나님 안에 있는 관계였다. 그러므로 바실리우스에게 있어서 , 성부, 성자,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적 본질을 동등하게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차이는 출처(source).이다.
두 명의 그레고리우스의 신학
1) 나지안주의 그레고리우스(329 or 330년-391년)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바실리우스와 함께 우시아(본질)_와 히포스타시스(위격)의 개념을 사용하여 삼위일체 개념을 설명하였다. 세 위격들은 모두 동일본질(호모우시오스)을 공유하고 있는 반면에 그들은 동일하지는 않다. 그레고리우스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공동생활 비유를 사용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셋(최초의 세 사람)은 한 가족이며 정확히 같은 본성을 나누고 있지만 세 사람은 각기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있듯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동일한 영광과 본질을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신적인 가족을 구성하고 있으나, 구별된 위격들이다. 삼위일체 사상에 대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실질적인 공헌은 그의 공동생활 비유나 혹은 “우시아” 와 “히포스타시스”의 사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영어로 “위격들”(persons)로 번역되는 “히포스타시스”를 관계 개념으로 설명한 데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내에는 “세 개의 존재들”이 아닌 “세 관계들”이 존재하며 그 관계들은 본질들(존재들)도 아니고 단순한 행동들(행동 양식들)도 아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그런 관계들에 존재론적인 신분을 부여했다. 신적 존재 내에서 아버지의 유일한 정체성은 성자와 성령의 출생자요 발출의 근원자로서 그들과의 관계성에서 드러난다. 성자의 유일한 정체성은 성부의 분명한 형상이요 대리자로서 아버지로부터의 영원한 탄생이라는 점에 있다. 성령의 유일한 정체성은 아버지의 지혜와 능력으로서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된 분이라는 데 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또 다른 신학적인 공헌은 동료 신학자 아폴리나리우스가 제시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을 반대했다는 데 있다. 아폴리나리우스에 따르면 영원한 로고스, 즉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안에 합리적인 영혼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신이었다. 그의 몸과 생기를 주는 혼(생명력)은 인간이었으나, 그의 영(마음, 의식)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성이다. 물론 이 같은 기독론이 주는 인상은 “몸 안의 하나님”이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피조물의 몸 안에 거하면서 실제로 인간이 되거나 인간적인 한계나 고통을 경험함 없이 그 몸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그레고리우스가 아폴리나리우스의 사상을 반대했던 이유는 그의 가르침이 구원론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완전한 인성이 아니라면, 우리의 인간본성은 그를 통하여 전적으로 구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점을 “떠맡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는다.”는 형식으로 표현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의 인성이 흠 없는 온전한 인간의 본성-몸과 혼과 그리고 영-이 아니라면 “놀라운 교환”은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 아들의 신성은 그의 신적 본성이 인간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흠 없는 온전한 인간-인간이 되기 위한 기본적인 모든 것-과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면 우리를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간파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폴리나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아타나시우스의 기독론도 거절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2)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40년-393년)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신학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에 관한 극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적인 의미로 가득 차 있다. 다른 두 명의 카파도키아 교부들보다 그레고리우스는 신적 본질의 타자성과 장엄함에 의해 매혹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같은 그레고리우스의 사상에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그레고리우스는 하나님의 본질은 매우 초월직이며 불가해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정적인 방법밖에 없다. 이것은 신학의 역사에서 “부정의 신학”으로 알려져 있고 동방과 서방 양측의 후대 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삼위일체 사상에 대한 그레고리우스의 공헌은 삼위일체론을 반대했던 적대자들-유노미우스파와 같은 아리우스파와 사벨리우스파-이 갖다 붙인 삼신론(tritheism)을 극복하려는 그의 시도에 있다. 그레고리우스의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하나의 존재-하나의 본질-이고 세 하나님이 아니라면, 세 위격들(hypostases)은 항상 만물 가운데 틀림없이 함께 행동할 것이다. 그레고리우스의 규칙은 고대와 중세교회의 가장 정통적인 신학자들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그들은 그레고리우스의 규칙을 라틴어로 “외부를 향한 삼위일체의 역할들은 분리되지 않는다.”(opera trinitatis ad extra indivisa sunt)로 번역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역할의 정확한 양식들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실제로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몸과 본성을 취하셨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결코 성부와 성령과 분리되거나 혹은 독립적으로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이 셋은 항상 함께 행동하였으며 결코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은 삼위가 독특한 세 위격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세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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