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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하나님 인식방법에 대한 안셀무스와 아벨라르두스의 변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논증

안셀무스 시대에는 공공연한 무신론자들은 없었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본질적으로 왜 무신론이 그토록 어리석은가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안셀무스는 기도의 형식으로 그의 자연신학을 썼다. , 둘은 질문의 형식과 깊이 생각하여 얻을 수 있는 대답,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와 이성을 통하여 그 지혜를 인간과 더불어 나누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설명한다. 두 서적을 통하여 안셀무스는 그가 의심하면서 시작한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을 믿기 위하여 인식을 추구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과 그의 독자들에게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이 두 책에서 그는 결코 성경이나 기독교 전통의 지지를 빌리지 않고 다만 이성의 조명에만 의존하였다.

첫 번째 책인 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창조에서 선의 정도 때문에 필연적이다라고 논증했다. 바로 플라톤의 철학적 유형으로 안셀무스는 논증을 시도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식별할 수 있기 위하여 그리고 인간 주변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신분을 진실로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완전히 선하고 가장 높은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한 것이다. 완전히 실재하는 객관적인 선의 기준 없이는 사물들에서 더욱 나쁜 것더욱 좋은 것을 분간하여 말할 방법이 없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위한 존재론적 논증에 관한 첫 번째의 설명으로서는 전적으로 흡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두 번째의 설명으로, 안으로 옮겨놓고, 전체 논증 자체와 일치할 수 있도록 한다.

안셀무스는 의 요점은 하나님은-그 이상에 더 큰 존재가 없는 최상의 존재로서-존재하지 않은 것으로는 생각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그의 존재가 정의에 포함된 바로 그 존재자를 부인하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그 이상에 더 큰 존재자가 생각될 수 없는 한 존재자를 생각할 수 있다면(그리고 누구든지 생각할 수 있는), 그 사람은 틀림없이 이러한 존재자가 실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보다 더 큰 존재자-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를 생각할 것이다.

안셀무스의 견해에서 본 하나님의 본질

 안셀무스와 대부분의 다른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단순하고 시간을 초월하며, 변하지 않고, 느끼지 않으며, 제한이나, , 지체들 또는 열정이 없는 실재나 본질이었다. 하나님은 행동하지만, 결코 무엇에 의하여 작용되지 않는다.

속제에 관한 안셀무스의 법적 보상설

 배상설과는 다른 안셀무스의 속죄의 이론은 법적 보상설로 불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예가 봉토계약을 파계했을 때, 영주에게 만족할 만한 변제의무를 그가 이행하기 위하여 빚을 상황하는 중세의 노예적 개념을 축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안셀무스는 이러한 관습에서 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인간의 존재의 형태로 보내어 그가 전혀 죄인이 아니면서 죄인의 죽음을 죽게 하셨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완전히 일치하는 유추를 발견한 것이다. 사실 그 이론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들이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진 빚을 갚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는 변제 또는 그 밖의 붕괴된 우주에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다.

아벨라르두스의 철학적 표현법

 아벨라르두스는 사람들이 아무리 전통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가 생각하기에 비논리적이거나 혹은 비성경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크게 쟁점이 된 가 포함되었다.

 아벨라르두스는 비록 철학적 진리와 신학적 진리 사이에 서로의 이해는 가능할지라도 완전한 화해는 역사 속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지만, 서로간의 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사람들은 아벨라르두스의 교훈과 저서 구석구석에서 안셀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실재론과는 근본적으로 관계를 끊고, 보편적 실재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중세 신학과 철학에서 나중에 유명론으로 알려지게 될 것의 발생에 관한 징조를 볼 것이다. 그는 보편적 실재들을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개념들로 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사물을 초월하거나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관례적인 용어처럼 단순히 정신에도 없는 것이다.

속죄에 관한 아벨라르두스의 도덕적 감화설

 아벨라르두스의 속죄의 양식은 하나님의 영광이나 진노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다. 아벨라르두스에 의하면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행동을 위한 새로운 동기이지, 인간 자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갚아야 할 보상이 아니었다. 그는 변제설은 물론, 배상설도 마찬가지로 화해의 과정에서 인성을 전적으로 빠뜨리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들은 십자가의 하나님을 다만 하나님의 영광과 우주적인 공의만을 염려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베라르두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을 죄 많은 인간들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실증이며,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의 철저한 순종에 의하여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이 성취한 공로를 죄인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소통인 것이다. 십자가의 효력은 인간을 향한 것이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다. 아벨라르두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과 화해하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벌써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며, 그리고 우리의 죄와 무지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원시하며 사는 것이다.

 속죄에 관한 아벨라르두스의 설명은 속죄에서 법적인 화해에 관한 모든 의미를 제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바로 이것이 비평가들이 기존의 속죄이론에다가 주관적인 이론을 덧칠했다는 이유이다. 아벨라르두스의 사고의 주요흐름은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인간들에게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며, 그것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고, 우리도 두려움보다 사랑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정한 속죄는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속죄는 그리스도가 죽을 때보다도 차라리 죄인이 회개하고 사랑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아벨라르두스에 따르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는 희생에 의하여 우리와 화해할 필요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과 화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이다. 나아가 그 화해는 우리가 십자가에 의하여 감화되어 우리 자신 안에서 생기는 도덕적인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

 

24장 루터에 의한 복음의 재발견과 교회의 분열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루터에 의하면 영광의 신학은 인간의 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자연으로부터만 하나님에 관하여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은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선행의인화의 영성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이루어진 의의 복음보다 타락하고 죄 많은 인간의 지성에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광의 신학은 타고난 인간의 힘과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쪽으로 이끄는 인간 중심의 신학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의 진정한 상태를 지성과 마음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무력한 죄인들로 제시하여 필사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루터는 영광의 신학의 한 예로서 구원에 관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 신앙을 고찰하였다.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대부분 중세 후기의 스콜라 신학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은 구원문제와 연관하여 신인협동론적 견해의 중요 부분으로서 자유의지를 수용하였다. 루터의 견해에서 자유의지를 믿는 신앙은-스콜라 철학적이든 인문주의의 해명이든 간에- 구원을 위한 유일의 소망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증거가 된다. 십자가는 인간의 무기력과 하나님의 중재적 개입의 커다란 증거이며 상징인 것이다.

하지만 루터에게도 영향을 미친 외래의 신학과 철학적인 요소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실례가 그의 신론, 즉 하나님에 관한 교리에 미친 유명론의 영향이다. 일찍이 오캄처럼[1] 루터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순수한 자유의지로 증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루터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

 은혜와 계시로부터 분리된 이성과 철학이 별로 유익하지 못하며 쓸모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루터는 과연 어디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본체를 발견하며 무엇으로부터 진정한 교리를 도출해 내며 세울 수 있겠는가? 로마 교회에 대항하여 그는 궁극적인 안내자요 규범으로서, 그리고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의 권위로서 오직 성경에만 호소하였다.

다른 한편 루터는 아주 애매한 진술을 한다. 그는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성경의 어떤 책들은 영혼을 위해 별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그 품위를 거리낌 없이 떨어뜨렸다. 이것에 대한 고전적인 사례가 야고보서이다. 그는 야고보서와 성경의 일부 다른 책들과 부분들을 복음서와 동등한 권위를 지닌 것으로 보지 않았다.

루터의 감추어 계신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

 루터에게 하나님은 복음에서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감추이신 동시에 드러내신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의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자신과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감추이심의 이러한 의미는 자기 계시 안에 계신 하나님의 겸손을 표현하는 루터의 방법이었다.

 루터는 그의 이중예정론-하나님은 어떤 천사들과 인간들은 천국으로, 그리고 어떤 자들은 지옥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의 감추이심과 관련시켰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개념은 복음과 정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는 하나님의 감추이심과 드러나심처럼 하나님은 제한된 인간의 정신에는 완전히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의지를 가지고 계신다고 믿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의도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나쁜 일을 의도하시며(비록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그리고 사탄을 만드시고 사탄으로 하여금 타락하게 하시며 그를 도구로 이용하시기도 한다. 이 감추어 계신 하나님은 유명론의 완전한 신적 자유의지와 절대적 능력,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우주적 제왕과 거의 일치한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결과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와 같은 하나님이다.

칭의: 교회가 세워지고 넘어지는 중요한 교리

 루터에게 칭의는 두 가지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오직 믿음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신다는 점이다. 둘째는 단순한 용서를 넘어서 하나님은 말하자면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부여하신다는 점이다. 이것은 두 단계의 사건인데, 단번에-보통 세례에서-일어나면서도 죄인이며 믿는 자로서 일생을 통하여 매일의 참회와 신앙을 날마다 새롭게 갱신한다. 그러나 칭의의 일상적인 측면에서 불안정한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적으로 의를 얻는 과정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의를 유지하는 유일한 조건은 계속적인 신앙이다. 그리고 루터에 의하면 신앙은 행위의 반대이다.

제사장직과 성례에 관한 루터의 견해

 루터에게 있어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직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신자들은 직접 하나님께 그들 자신들을 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들을 위해서도 간구할 수 있다. 둘째로 그는 성직자들을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특별한 영적 신분으로 여기지 않았다. 루터는 성례가 신앙을 강화하는 효력이 있도록 하기 위하여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사효론만으로는 성례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례에 관한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루터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타락으로 이어진 그들이 모든 후손들에 의하여 상실된 원초적인 의로움을 단지 회복하며 은혜 안에서 습관적인 성장의 과정이 시작한다는 생각을 부인하였다. 대신에 그는 세례가 믿음으로 시행하고 믿음으로 받을 때 물과 신비스럽게 연관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인을 충분히 의롭게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분리된 개신교 집안: 성만찬에 관한 루터와 츠빙글리의 논쟁

 취리히의 개혁자인 츠빙글리는 스위스의 개신교도들에게 성만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왔다. 반면 루터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이 비록 비성경적이기는 하지만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에서 이것이 내 몸이라.”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떡과 포도주의 요소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에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적 임재가 거기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가르쳐 왔다.

성만찬에 관한 루터와 츠빙글리의 교리 사이에 나타난 많은 차이는 그들의 기독론이 서로 다른 점에서 비롯한다. 츠빙글리는 성육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에 지역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편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다른 한편 루터는 키릴루스와 레오 1세가 주장하는 속성의 교류를 강하게 믿었다. 위대한 두 개혁자들은 기독론적인 오류와 성만찬에 관한 심각한 오해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였다.



[1] 오캄은 신학을 위한 적극적인 도움을 자연적인 이성(논리 자체와는 다른)에서 별로 찾지 않았다. 중세의 위대한 유명론자 오캄은 하나님의 본질과 신적 계시의 신비를 확고히 파악하는 도구로서 신앙을 유일하게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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