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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칼케돈 공의회의 기독론

 

 에베소 공의회 후 계속된 논쟁

 에베소 공의회와 재연합신조이후,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이 오직 유일한 정통교리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명히 키릴루스가 알렉산드리아 기독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획기적인 도약을 했으며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연합 이후 두 본성-신성과 인성-을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지도자들은 그 문제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다. 키릴루스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론을 허락한 것은 그 두 본성은 서로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그렇게 했다고 주장했다. 키릴루스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거나 드러내놓고 살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키릴루스의 후계자 디오스코루스는 이 교리적인 전쟁을 다시 유발시킴으로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안티오키아 학파의 세력들을 단번에 제거시키길 원했던 것 같다.

유티케스와 유티케스파 논쟁

 유티케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신학을 강력히 지지했다. 키릴루스가 사망하자 그는 그리스도의 한 본성론을 지지하면서 디오스코루스와 한 편이 되었다. 유티케스를 불꽃 튀는 논쟁의 한 중심에 서게 했던 것은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 본질공유(consubstantial)라는 주장을 그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자들에게 유티케스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인간이요 참 신으로 표현했던 니케아 신앙을 분명히 거절한 것으로 보였다. 유티케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참다운 인성을 부인했던 것 같다. 그는 아폴리나리우스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되풀이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그의 신성이라는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의 포도주처럼 간주했다. 일부 역사 신학자들은 유티케스가 가르치고자 했던 바는 그리스도의 몸은 성육신으로 인해 신성화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와 본질공유가 아니었다는 점을 밝히려고 했던 것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티케스는 비록 자신은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또 명백한 가현설론자는 아니었지만 아폴리나리우스주의와 뭔가 매우 유사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강도회의(Robber Synod)

 이 회의는 제4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평가 받을 만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교회 역사에서 강도회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디오스코루스는 중무장한 깡패들(수도사들)과 함께 참석하여 재빨리 회의 전체를 장악해 버렸다. 그리하여 유티케스의 교리인 연합 이전에는 두 본성, 연합 이후에는 하나의 본성을 정통 교리로 인준했다. 그리고 안티오키아의 대표적인 지도자 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와 소위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로 불리운 사람들을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정죄하였고 그들의 직위를 박탈해 버렸다. 에베소에서 강도회의가 끝날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은 회의 결과에 흡족해 했다. 그의 공격의 결과 안티오키아 학파의 교리를 패배시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안티오키아에 보낸 호의를 철회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지지했고 또 그 회의 결과를 전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폴케리아와 마르키안은 449년의 강도회의의 무시무시한 결정들을 무효화시키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리하여 진정한 제4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로서 제2차 에베소 공의회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공의회가 451 5우러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칼케돈에서 소집되었다.

칼케돈 공의회와 칼케돈 신조

 칼케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는 451 10 8일 개막되었다. 칼케돈 공의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새로운 정통 신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황후와 황제 및 그들의 부하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기다리던 감독들에게 10 10일에 모여 바른 신앙을 확립하도록 명령했다. 수많은 논쟁 끝에 새로운 신조가 레옹의 토메와 네스토리우스와 안티오키아의 요한에게 보낸 키릴루스의 서신들에서 표현된 언어와 개념들에 주로 의존하여 작성되었다.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테르툴리아누스의 저술들은 새로운 신조를 작성하는 데 큰 참고가 되었다. 이 신조는 451 10 25일에 황제와 감독들이 최종적으로 승인하고 인준했다. 그 신조의 핵심적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부들은 따라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기로 우리는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신성에 있어서 동일하게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 동일하게 완전하시고,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며, 이성적 영혼(a rational soul)과 몸을 동일하게 가지신다. 그는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나 죄를 제외하고 우리와 똑같다. 그는 신성에 있어서 시간 이전부터 아버지로부터 낳으시고, 동일하신 분이 마지막 날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니, 그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동정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이다.

      우리는 한 분 동일하신 그리스도, 아들 주님을 독생자로 인정하며, 두 본성이 혼돈이 없고, 변화도 없고, 분리도 없고, 별거도 없는 연합체로 알려졌으나 두 본성의 차이가 연합으로 인해서 결코 없어지지 않았으며 각 본서의 속성은 한 위격과 한 본체 안에[다같이]보전되고 함께 역사한다. 두 위격으로 독생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옛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쳤으며 우리에게 전달된 교부들의 신조가 그렇게 가르친다.

 칼케돈 신조의 언어를 주의 깊게 연구한 것을 살펴보면 그 신조는 두 극단 사이를 피하면서 성육신의 신비를 보호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신조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온건한 신학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인성과 그의 두 본성을 분명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 신조는 또한 두 본성은 분리되거나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점과 각 본성은 온전한 상태로 하나의 위격 안에 함께 거한다고 주장한다. 안티오키아 학파의 기독론이 신-인의 두 본성을 주장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연합과 통전성을 부인했던 것은 잘못이다. 칼케돈 신조는 또한 극단적인 알렉산드리아의 기독론을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반드시 혼합(섞이거나 합쳐지는 것)되어서는 안 되며 로고스 안에서 그들의 친밀한 본질적인 결합을 통하여 변질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론이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한 위격으로 주장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유티케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들의 연합에서조차도 인성과 신성의 독특한 본성들의 완벽성과 통전성을 부인했던 것은 잘못이다. 칼케돈 신조의 진정한 핵심은 칼케돈의 네 가지 울타리-“혼합이 없고, 변함이 없고, 분할이 없고, 분리가 없다는 것”-로 알려진 것에 있다. 이 네 가지 표현들은 위격적 연합-한 위격 안에 그리스도의 두 온전하고 완전한 본성-의 신비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역할을 한다. “혼합이 없고, 변함이 없다는 것은 신성과 인성으로부터 제3의 어떤 것을 만들어 내어 위격의 일치를 보존하려 했던 유티케스주의 이단과 단성론의 이단으로부터 신비를 보호한다. “분할이 없고, 분리가 없다는 것은 신성과 인성을 두 다른 위격들로 분리하여 인성과 신성 사이의 구분을 강조하려 했던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이단으로부터 신비를 보호한다.

18장 서방측 교회가 로마 가톨릭이 되다

 

 

(semi)펠라기우스주의

 반펠라기우스파 신학자들의 지도자는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수도사 존 카시안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를 논박하기 위해 카시안과 함께 노력했던 두 명의 신학자들이 있었는데, 레링의 빈센트와 리츠의 파우스투스였다. 이 세 사람은 신의 예정론을 주장한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데 특별히 앞장선 사람들이었다.

 카시안은 보편적인 -인 협동설을 발전시키면서 단독사역론펠라기우스주의모두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존 카시안이 주장했던 이러한 반펠라기우스적 신-인 협동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은총을 통해 하나님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도 그와 같은 구원은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의 주도로 시작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그들 신학의 약점이었으며 529년 오렌지 공의회에서 정죄 받은 원인이었다. 교회는 인간의 주도권에 대한 이 같은 강조는 물론 메살리언파들-초대교회 수도사 그룹 중의 하나로 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는 기도 수행을 강조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례의 역할이나 성례전들을 평가절하했고 모든 교회직제 등을 거부했다.- 모두 온전한 구원과 의로움을 위해 은총의 도움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펠라기우스파와 너무 노골적으로 가깝게 보조를 같이했던 것으로 판단했다.

 비록 반펠라기우스주의는 529년 이후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그것은 이미 서방교회 영성의 관습으로 자리잡았고 분명히 대중들의 신앙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중세기 내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많은 수도사들과 성직자들은 비록 교회가 이론적으로는 그것을 반대했지만 일종의 반펠라기우스를 실천하고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대제

 서방측 교회가 어떻게 로마 가톨릭이 되었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려고 할 때, 한 사람의 이름이 전명에 떠오르게 된다. 바로 그레고리우스 대제로 알려진 그레고리우스 1세이다. 그는 로마 가톨릭 전통과 동방정교회 및 프로테스탄트를 분리시키는 데에 알게 모르게 크게 공헌했다. 로마 감독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레고리우스는 모든 서방 감독들에게 적용되었던 규칙서-성무 일과서-를 만들었다. 그는 또한 영국과 아리우스파에 속한 이방인들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는 또한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을 받아들였고 성베네딕트 규칙서를 서방교회를 한데로 묶는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인정했다. 그레고리우스는 또한 선교의 목적을 위해 유럽의 이방 문화와 종교들을 기독교와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그는 성인 숭배, 자발적인 고해성사, 금식 규례 등과 같은 서방에서 평신도들의 많은 전통적인 관습과 영적인 신앙 규범을 촉진시켰고 또 그러한 것들을 인정했다.

그레고리우스의 구원론

 그레고리우스가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은총을 강조하고 죄 된 인간 존재들의 자기 결단을 평가절하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보면, 그는 매우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과 같은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가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경고하고 그들로 하여금 보다 치열한 자기희생의 경건 생활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보면, 그는 펠라기우스와 매우 흡사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레고리우스에 의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것의 은총으로부터 혜택을 입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한 회개를 의미한다. 철저한 회개란 자기희생의 참회적인 행동, 영적 삶을 방해하는 육체적인 쾌락의 철저한 자기부정, 교회에서 베푸는 성례전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과 같은 사랑의 행동들을 말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을 확신하게 되고 연옥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정말 바라는 사람은 수도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완전한 참회의 생활이다. 그레고리우스에게 육체적인 쾌락 자체는 실제적인 죄는 아닐지라도 죄를 범하도록 부추기는 유혹이다.

 그레고리우스는 구원과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그의 접근에서 율법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신-인 협동론자였다. 그의 신학은 아마 고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부분의 중세 기독교들에게 구원에 관한 어떤 안정감이나 보증을 파괴시켜 버린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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