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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7장 로마와 캔터베리의 분리와 병행
영국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
영국의 종교개혁은 유럽에서 일어난 다른 개신교 종교개혁과는 아주 다르게 시작되었다. 왕 헨리 8세는 그의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를 원하였다. 크랜머는 헨리의 이혼과 결혼을 합법적으로 정당화해 주었고, 루터파의 노선에 따라 헨리가 허락하는 것만큼 영국의 개혁을 조심스럽게 진행해 나갔다.
헨리 어린 왕이 1553년 갑자기 사망하고, 광신적인 로마 가톨릭 신도였던 그의 배다른 자매 메리가 뒤를 이어 왕좌에 올랐다. 그녀의 통치 5년 동안 영국은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아갔다. “피의 메리”는 1558년에 죽고, 뒤를 이어 그녀의 배다른 자매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엘리자베스 1세로서 1603년 사망할 때까지 통치하였다. 그녀는 개신교였지만 개혁주의 신학과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 제도로 알려진 개혁주의적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의 교회에 대해 중립을 지키려고 하였으며, 교회가 그녀의 통치 영역 안에서 하나의 교회가 되기를 원하였다. 16세기 전체에 걸쳐 영국은 스코틀랜드로부터 분리된 왕국이었다. 그리하여 영국에서 고교회파(성공회)와 저교회파(청교도)가 서로 싸우게 되었다.
가톨릭 개혁의 역사적인 배경
1520-30년대에 여러 로마 가톨릭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압도적인 개신교의 대변혁에 대한 반응으로서 새로운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소집하고 그들의 교회 내부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교회 내부의 문제들을 정리하고 진정한 가톨릭의 교의를 수립하기 위하여 이미 여러 차례 에큐메니컬 공의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개혁적인 공의회는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트렌트 공의회는 이전의 세 공의회들보다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트렌트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주의를 강하게 만들어, 가톨릭이 새로운 활력과 다시 소생하는 기세를 얻게 하였다. 이 공의회를 통해 한 쌍의 법령과 신조를 만들어 냈다. 그 하나는 가톨릭 교의를 단일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루터와 다른 개신교도들처럼 교의의 어떤 부분이라고 거부하는 자들을 유죄로 단정한다는 것이었다.
영국 종교개혁의 아버지, 토마스 크랜머
토마스 크랜머는 일반적으로 영국 개혁주의의 창시자로 간주되고 있다. 성경과 관련하여 크랜머의 행동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헨리 8세의 켄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는 직후, 그는 “위대한 성경”으로 알려진 첫 번째의 영어성경을 왕국의 교회에 도입하였다. 다른 한편 많은 개혁주의 전통과는 다르게 크랜머는 성경과 모순되지 않는 모든 전통은 높이 평가하였으며, 가끔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권위 있는 교부들에게 호소하였다. 16세기의 크랜머와 영국의 다른 종교개혁자들은 최고 권위의 성경과 고대 기독교 전통에 대한 존경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찾아 유지하려고 추구하였다. 이것이 영국 종교개혁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오직 은혜와 믿음’의 개혁원리에 대한 크랜머의 헌신은 로마 가톨릭의 믿음, 성례, 그리고 구원의 공로가 되는 행위에 의한 의로움의 첨가 또는 부름 받음에 대한 교리를 비난하고, 우리가 행하는 어떤 행위가 아니라,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 곧 하나님의 선물”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후커의 미래의 성공회 신학과”엘리자베스의 정착”의 다른 신학자들에 대하여 칭의의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부터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끌어질 선한 행위와 성결한 생활로서의 성화를 강조함으로써 모범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크랜머가 만인사제설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별로 없다. 비록 영국 개신교의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그는 간접적으로 만인사제설을 ‘성경의 절대권위’와 ‘오직 은혜와 믿음’의 원리와 다름없다고 주장하였다. 크랜머를 비판하는 어떤 사람들은 크랜머가 성직 존중주의를 부정하면서 간접적으로 만인사제설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가 이중적인 속임수를 쓰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중세 교회의 성직 계급제와 교회의 콘스탄티누스주의를 계속 주장하였다.
성공회의 건축가, 리처드 후커
후커는 유럽 개신교가 수행한 종교개혁의 기본적인 동기와는 반대로 중세 가톨릭의 교리와 관례에는 빠지지 않으면서도 가톨릭의 전통주의로 매우 기울었던 사람이다. 의심할 것 없이 후커는 일반적으로 첫 두 개혁원리, 즉 “성경의 절대권위”와 “오직 은혜와 믿음”에 관하여 크랜머와 권위주의적 개혁자들과 전심으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원리들에 독특한 특성을 첨가하였다.[1] 덧붙여 그는 세 번째의 개혁원리인 만인사제설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그에 반대하는 청교도들은 그를 사적인 가톨릭으로 여겼다.
아마도 청교도들에게 가장 거슬린 것은 후커가 중세 스콜라 철학의 자연신학을 이용한다는 점이었다. 후커는 토마스주의자처럼 은혜가 자연과 충돌하기보다 오히려 자연을 충족시킨다는 생각을 믿었다. 그리고 후커의 구원론은 정통 가톨릭에서 말하는 신격화로서의 구원개념을 시인한다. 죄 사함과 전가되는 의에 관한 단언으로서 개신교 교회의 구원론을 우선적으로 가르치기는 했지만, 후커는 또한 인간의 본성이 성례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신의 본성에 참여한다는 과정적인 구원을 묘사하는 경향을 가졌다. 후커는 성공회의 전통을 발전시키는 한도에서 가톨릭의 성직주의를 옹호하는 반면, 만인사제설의 원리에 대해서는 말만 할 뿐이었다. 교회정체에 관한 후커의 견해는 신자의 보편적인 사제직을 겉으로는 부인하지 않았으나, 암암리에 그것을 훼손하고 있었다.
가톨릭 종교개혁의 보석, 트렌트 공의회
트렌트 공의회가 수많은 교리적인 계율과 교회 법규들-공식적인 신앙(교의들)의 확정-그리고 그들이 부인하는 것들의 정죄를 공포하였다. 공의회에서 토의되고 결정된 첫째 문제들 중의 하나는 성경과 전통에 관한 권위였다. 트렌트 공의회는 성경 이외 전통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일부러 그것들을 거역하거나 모욕하는 사람을 저주하고 유죄로 선고하였다. 칭의에 관한 트렌트 공의회의 결의와 법규에 나타난 요지는 개신교 개혁주의의 구원론의 거부와 개신교 자체를 소외시키는 것이다. 트렌트 공의회는 분명히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구원을 부인하였으며, 칭의를 인간 의지의 협력과 공로를 통한 선한 행위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한 과정으로 만들었다. 트렌트 공의회는 연옥과 화체설 그리고 면제부에 관한 로마 가톨릭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확인하는 결의들을 제시했다.
트렌트 공의회와 거기에서 예상된 결의들과 법규들에 대한 대응으로 유럽의 권위주의적 개신교 일부 단체들은 그들의 정규 교리고백서를 세상에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제 30장 영국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청교도와 감리교도들의 투쟁
청교도 운동과 그의 신학
초창기의 청교도들은 모두 영국의 칼뱅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영국교회 전체가 장로회 국가교회-스코틀랜드의 교회처럼-로, 그리고 영국 전체가 제네바를 본받아 기독교 공화국이 될 것을 희망하였다. 17세기 초 10년 동안 청교도들은 이상적인 교회의 본질에 관하여 내부 논쟁을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영국교회에 머물러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국가교회가 더 이상 가망이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오염되어 개혁의 한계를 넘어 섰다고 주장하였다. 1630년대의 대분산 이후 영국에 남아 있는 청교도들은 의회를 점령하고, 왕 찰스 1세를 폐위시키고 참수하였으며, 올리버 크롬웰의 지도 아래 청교도 공화제를 설립하였다. 왕에 대항하여 내란이 시작될 때, 청교도 국회는 런던에 있는 웨스터민스터 대수도원에서 회의를 가지기 위해 성직자들(청교도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의 국회를 소집하였다. 이 의회의 가장 큰 성취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웨스터민스터 대∙소요리 문답을 만든 것이었다. 뉴잉글랜드에서 청교도주의는 약 1세기 동안 변화하면서 번영하였다. 하지만 1730-40년대까지 청교도주의는 뉴잉글랜드에서 상당히 약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의 청교도주의를 돌이키려고 하였다.
청교도 신학의 첫째 특징은 순결한 교회의 개념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정착아래 영국교회에 있던 청교도 개혁자들에게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하였다. 하나는 로마 가톨릭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교회를 제거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그 교직자들과 믿지 않는 회원들을 정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순결한 교회의 개념은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지나치게 구별함으로써 청교도 자체적으로 교회의 회원의 자격을 충족시킬 조건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청교도 신학의 둘째 특징은 하나님과 선택된 자와의 언약관계이다. 특별히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칼뱅주의자들이 직면한 하나의 딜레마가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들이 회심과 성화(은혜의 표징)를 위해 힘쓴다면, 이것이 예정에서 신적 주권과 모순이 없겠는가? 다르게 말하면 예정을 강하게 믿는 믿음이 청교도의 경건에 대한 주장과 어떻게 화해를 이룰 수 있겠는가?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청교도 신학에 의하면 적어도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연장되는 은혜의 언약은 조건적이면서도 절대적이다. 예정에 관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신비는 조건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실제로 언약에서 인간 편의 의무를 계속 지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미리 예정하셨고, 그렇게 계속 지킬 수 있는 의지와 수단을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청교도 언약신학의 요점은 무엇인가? 칼뱅주의자들이며 복음적인 자들인 청교도들에게 언약신학은 단독사역론과 신인협동론의 연결고리를 마련하고, 그들의 선택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위한 확신의 기반을 수립한 것이다. 은혜의 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수립되고 통제되며, 동시에 인간들은 거기에 수반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은 눈에 보이는 회심을 해야 하며, 성화되어 가야 한다. 만일 그들이 가시적으로 회심을 하고, 성화되어 간다면(은혜의 징표를 나타내면서),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청교도 신학의 셋째 특징은 사회를 기독교화하려는 이상이었다. 그들은 언약에서 하나님의 하신 약속들 중의 하나가 신뢰와 순종에 대해 개인들과 가족 그리고 교회를 축복하실 뿐만 아니라, 사회질서를 위해 선을 힘쓴다면, 인간사회를 축복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요나단 에드워즈, 청교도의 왕자
요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캍뱅주의와 경건주의의 혼합이었다. 에드워즈 신학의 첫 번째 주요주제는 하나님의 위엄과 주권, 영광과 능력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가능한 무조건적 의미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실재이며, 항상 그분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위하여 활동하신다.
에드워즈 신학의 두 번째 주요주제는 인간의 타락과 속박이다. 모든 피조물처럼 인간의 존재는 가장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하나님이 주권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때까지 그리고 구원하시지 않으신다면 죄에 얽매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할 수 있도록 의도하시는 것만큼 자유롭다. 에드워즈에게 죄는 죄인들의 의지를 속박할 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본성 자체는 자유의지를 합리적인 정신에 이르지도,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하게 하는 거이다.
에드워즈의 신학의 세 번째 주제는 “인간학적 중심”으로서 감정들이다. 인간학적 중심이라는 것은 정체성과 활동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성의 핵심을 말한다. 감정은 사람의 신앙과 선택을 결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종교에서 참된 감정을 거짓된 감정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을 오랫동안 추진하였다. 그는 결국 참된 감정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선택한 자에게 스며들도록 추구한 감정은 그 존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존 웨슬리, 감리교파의 창시자
개신교 신학의 이야기에 기여한 웨슬리의 특별한 첫 번째 공헌은 사변형의 요새이다. 그는 신학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해석의 도구들로서 이성과 전통 그리고 경험을 포함시켰다. 웨슬리는 이성과 전통에 대한 강조를 성공회 신학자 리처드 후커로부터 인용하였고, 경험에 관한 강조는 경건주의로부터 이끌어 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이 기독교 사상에서 반드시 역할을 해야 하며, 그것들을 거부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도구로서 그 적절한 장소를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나아가 그는 그것들이 진정으로 보편적이며(교보들과 개혁자들의 정신을 성실하게 반영한 것), 합리적이며(정합적이며, 지적인 것) 실천적으로(경험과 관련된 것) 성경적 교리들을 공식화할 수 있는 데 기여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웨슬리의 두 번째 공헌은 온전한 성화를 통한 기독교인의 완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의 시대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비판자들은 웨슬리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고전적인 개신교 교리를 부인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신인협동론과 결합시키려고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칭의보다 중생과 성화를 더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독일 루터파의 경건주의자들처럼 칭의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개신교 신학에 확고하게 심어진 교리였다. 웨슬리는 구원에 대한 경험적인 면이 무시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점에서 그는 프랑케와 친첸도르프 그리고 경건주의의 “마음의 기독교”에 동의하였다. 또한 웨슬리는 고전적인 개신교 신학에 반대하여 성화는 인생에 진보 또는 완성이 없는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기독교인이 생전에 또는 임종에서 “사랑의 완성”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필경 도달해야 하는 실재적인 가능성을 그대로 남겨두고 싶어했다.
제 33장 전통적인 범주를 고수하는 보수주의 신학
근본주의의 핵심적인 태도와 접근은 기독교 신학 안에서 “완전한 보수주의”로 불리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모더니즘과 자유주의의 침식과 희석화에 맞서 보수적인 교리들을 완전하고 세밀한 체계로 세워 옹호하려는 개신교도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끔 신학적으로 모더니즘에 가담하는 죄를 범하거나, 묵인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분리를 요구하고, 강요하였다. 역사적이며 자연적인 관점에서 대개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축자영감과 절대적인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신앙을 주장하였다.
근본주의의 배경과 선구자
투레틴의[1] 스콜라적 정통 개신교는 영향력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학연구와 성직자 훈련을 위한 기초를 형성하였고, 19세기 대부분의 미국 장로교 목사들은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프린스턴에서 네 명의 근본주의 선구자들 중에 가장 탁월했던 자는 말할 것도 없이 찰스 핫지였다. 핫지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아치발트 알렉산더의 지도를 받으며, 장로교 목사가 되기 위한 성직 수련을 쌓았다. 그의 주요 교과서는 투레틴의 조직신학이었다. 핫지는 레이드의 인식론을 조직신학에 적용하였고, 그 기초 위에 합리적인 학문으로서 신학의 전통을 회복하려고 시도하였다. 두꺼운 세 권의 『조직신학』(1871-1873)에서 핫지는 자연과학이 자연의 자료를 모으고 조직하는 것처럼, 성경을 근거로 한 신적 계시의 자료를 모으고 조직하는 것이 신학의 고유한 방법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성경을 기록한 인간들이 신적 영감의 지배하에서 기록하는 단순한 “기계”라는 것을 부인했지만, 영감과 무오성이 성경의 개념에만 단순하게 적용되지 않고, 모든 문자에까지 확대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신학과 성경의 교리에 관한 핫지의 개념들은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에 대한 그의 반발적 논의를 통해 그를 20세기 근본주의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핫지는 기독교 신앙의 교리적인 내용을 공허하게 하며, 신비적인 직관으로 축소시키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주관주의적 신학을 비난하였다.
핫지의 후계자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논쟁적인 신학교수로서 핫지의 학생이며, 대학의 졸업생인 벤저민 브레킨리지 워필드였다. 워필드는 정통신학의 기초교리들로서 성경의 신적 영감과 무오성에 대한 그의 스승의 강조를 계승하고 확대하였다. 워필드는 “우리는 교리의 스승인 사도적 권위에 대한 신뢰를 침해하지 않고서는 그것의 본질적인 요소에 들어 있는 완전한 영감의 교리를 수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무오성은 영감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근본주의자의 운동
개신교 기독교의 독특한 운동으로서 근본주의는 1910년경에 시작되었다. 1910년에 『근본적인 것들』이라는 총서의 출판이 그 운동의 결정적인 촉매제 역할을 했다. 1919년 초에 근본주의 내부에는 종파적 분열의 경향이 일어나고 있었다.
1920년대 초, 근본주의의 전성기에 이 운동을 재수용한 지도적인 신학자는 그레셤 메이첸(1881-1937)이었다. 메이첸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워필드의 지도를 받으며 수학했으며, 1906년부터 1929년까지 거기서 신약을 가르쳤다. 1923년에 출판된 메이첸의 책『기독교 신앙과 자유주의』는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그 책에서 프린스턴 신학자는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이 기독교 신앙과는 다른 종교를 제시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러한 사실을 지지하는 자들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25년 이전에 근본주의는 문화적이며, 신학적인 힘으로 평가될 만하였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의 사조를 되돌리며, 적어도 주류 개신교파들의 일부를 정통 개신교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에 따르면 근본주의는 반진화론의 세력화, 전천년설과 같은 소수의 견해를 신학에 추가한 것, 문자적 해석과 관련된 절대무오성의 주장 등으로 인해 신학적으로 빛을 보지 못하는 운명에 처하였다. 결국 1925년 이후, 특히 경쟁적인 교파와 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메이첸이 1929년에 장로교회와 프린스턴을 떠난 후, 근본주의는 오랫동안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미국 기독교의 일부 학자들은 라이스, 존스, 매킨타이어 그리고 다른 분리파와 극단적인 보수적 근본주의자들이 진정한 근본주의로부터 떠났다고 주장한다. 참된 근본주의란 메이첸과 『근본적인 것들』에 글을 수록한 학문적 저자들에 의해 대표되는 것을 말한다. 사실상 1950-60년대까지 라이스, 존스, 그리고 매킨타이어에 의하여 인도된 보수적인 미국 개신교파의 분리주의의 분당들은 자신들만을 “근본주의자”라고 불렀다. 더욱 온건한 정통 개신교의 옹호자들과 정통 경건주의의 상속자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기술하기 위하여 “복음주의”라는 명칭을 채용하였다. 보수신학 내부의 결정적인 붕괴는 1940년대 초에 일어났다. 칼 매킨타이어는 미국기독교협의회(ACCC)를 형성하였고, 다음 해에 경쟁적인 복음주의국가협회(NAE)가 보스턴에 있는 보수주의 목사 헤롤드 존 옥켄가와 다른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신학에서 근본주의의 공통적인 특색
초기 근본주의(1925년 이전에)는 근대신학의 질병들이 성경의 초자연적인 축자영감과 절대무오성을 믿는 강한 신앙을 저버리는 데서 유래한다는 믿음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 후기 근본주의자들에 의하면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의 출현은 처음부터 고전적인 개신교 신학 내부에 은연중에 잠재된 이러한 교리의 필요성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 근본주의의 두 번째 중요한 공통적인 주제는 자유주의 모더니즘 개신교 신학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다. 이 투쟁이란 물론 “폭력주의” 또는 “폭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중한”, “목소리를 내는”, “가차 없는”, 그리고 “타협이 없음”을 의미한다.
초기 근본주의자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공통적인 특색은 정통 개신교라고 불리는 교리적 명제들의 정합적 체계를 진정한 기독교 신앙과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초기 근본주의자들은 개인적인 회개와 회심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에서 알게 된 위협 때문에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이며 영원한 핵심으로서 수정될 수 없는 교리적 명제들에 대한 동의를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1] 이탈리아계 스위스의 개혁주의 조직신학자이다.(1623-1687) 개신교 스콜라학자로 불리며, 성경을 성령에 의하여 받아 적는 과정에서 빈틈없이 기록된 것으로 간주하고, 아주 극단적인 형식으로 모든 성경은 축자적으로 영감된 것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한 사람이다.
[1] 청교도들은 성경에만 호소하고, 다른 모든 권위들을 거부했다. 하지만 후커는 성경이 침묵하거나, 거기에 모호한 부분이 있을 때 서슴없이 플라톤의 철학, 초대교부들, 교회의 신조들, 군주들과 철학자들의 선언문에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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