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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Ⅰ. 요약
1장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우리가 핵심을 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사탄이 해야 할 일이라고는 몇 가지 영적인 유행,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궐기 대회, 그리고 우리의 비전이라는 영역에 또 다른 “현대적인 적용”의 실험을 툭 던져 주는 것뿐이다. 이러한 일들의 특징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하고 있는 주장은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지배적인 모습이 지식 없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는 것이다. 제자도, 영적 훈련, 삶의 변혁, 문화 변혁, 관계, 결혼과 가정, 스트레스, 영적 은사, 물질의 은사, 급진적인 회심 경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육체를 입고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와는 별 관계가 없고 신문의 머리기사와 성경구절들을 맞춰 보는 일로 끝나기 일쑤인 종말론, 그리고 신앙의 힘으로 중요한 난관들을 극복한 이야기들 등이 눈만 뜨고 나면 나오는 말들이다. 이것들이 오늘날 우리가 꾸준히 먹고 있는 음식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하신 사역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일을 다루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만들 것이다.
저자의 목표는 특정 이념, 운동, 개인 혹은 그룹을 표적 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이 포로 상태의 피해자들이며 공범자들이다. 사실 나의 긴박감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보수, 자유주의 진영을 막론하고 모든 교단들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2장 찰스 피니의 펠라기우스주의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스미스는 “도덕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이 아래와 같은 잠재적인 신학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② 하나님은 사람들이 착하고, 멋지고, 서로 공평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성경을 비롯한 거의 모든 세계 종교의 가르침이다.
③ 인생의 중심 되는 목표는 행복이고, 자신에 대해 뿌듯하게 느끼는 것이다.
④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때 외에는 사람의 삶에 굳이 간섭하지 않는다.
⑤ 착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
스미스의 연구 결과를 읽으면서 받은 느낌은 오늘날 미국의 대중적인 종교에 대한 나의 경험과 일치한다. 교회가 이런 교리를 믿는다면 온갖 말을 해도, 그 사역을 맡는 자들이 제시하는 상충하는 해답을 보면, 자력 구원이라는 도덕 종교는 타락한 피조 세계의 기본 값이라는 내 주장에 힘이 실린다. 교리에서 벗어난 가르침을 여봐란듯이 대놓고 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늘 구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를 자기계발의 메시지로 바꿔 놓을 것이다. 이 병증의 신학적인 명칭은 펠라기우스주의다.
이 책의 여기저기서 다양한 요점을 들어 더 명확하게 설명하겠지만, 2차 대각성 이후, 특히 찰스 피니의 메시지와 방법론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미국 개신교는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 펠라기우스주의적이었다.
피니의 메시지는 분명히 도덕주의적이다. 이 복음 전도자는 자기변혁을 만들어 내는 부단한 위기 경험 등 여러 방법으로 회개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것은 명백하게 심리요법적인 방향 설정이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관찰한 대로 이것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의 종교 체계다. 구원과 도덕적인 개선은 복음 전도자와 회심자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이신론적인 함의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형식적으로는 복음을 주장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정당한 진노가 충족되었고 보상을 바라지 않은 특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부여되었다는 선언 보다는, 개인적이고 공적인 삶(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격하된다.
3장 조엘 오스틴의 형통복음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조엘 오스틴의 메시지는 그것이 어떤 신학을 조금이라도 반영하고 있다면, 펠라기우스주의의 자기계발과 영지주의의 자기 신성화가 접목된 형태를 보여 준다.
오스틴의 메시지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법을 지키지 못한 데에 따르는 정죄가 일체 없다. 그런가 하면 칭의도 없다. 이 두 메시지 대신에, 이 두 메시지의 중간 어디쯤 있는 낙관적인 도덕주의가 있다. 즉 최선을 다하라. 내가 말하는 지침들을 따르라.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실 것이다. 가벼운 율법이다. 그러나 결코 혼동하지 말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피하려는 미소 띈 얼굴의 베이비부머 복음 전도자 뒤에는, 복음을 율법으로, 승리의 선언을 승리해야 한다는 분발의 촉구로, 서술을 명령으로, 좋은 소식을 좋은 충고로 격하시키려는 결심이 도사리고 있다.
오스틴이 전파하는 건강과 부의 복음은 고난을 다룰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세상 왕국을 제공하는 영광의 신학이다. 오스틴이 자신의 책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좋은 소식은, 이 일곱 단계-오스틴의 책『잘되는 나』에 나오는 방법-를 따랐을 때 좋은 주차 자리를 얻었고, 식당에서 좋은 자리를 잡았으며, 예기치도 않게 비행기에서 일등석으로 승급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친히 내려오셔서 불편이나 이 세대에서 인류 전체에게 일반적인 질병들에서 우리를 구하신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형벌에서 구하셨다고 말한다.
4장 이머징 교회 운동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아주 최근에는 이머전트 교회 운동이, 굳이 말을 하자면, 어떤 경우 심지어 복음을 수정하면서도 제자도를 무척 강조하고 있다. 형태, 어휘, 유형 그리고 분위기는 다르게 나타나지만, 이머전트 교회 운동도 우리가 기억하는 바,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전하는 교훈을 똑같이 강조하고 있다. 즉 더 노력하라. 따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리더가 되라. 하나님을 위해 놀라운 일들을 이룩하라. 교리가 아니라 제자도를 강조한다.
킴벌은 “제자도의 궁극적인 목표는∙∙∙∙∙∙예수께서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가르치신 바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 ‘주 하나님을 너의 마음, 뜻 그리고 영혼을 다해서 사랑하라.’ 우리는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있는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 우리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있는가?”라고 쓴다. 나는 이와 비슷한 질문으로 끝나는 똑 같은 내용의 설교들을 들으며 보수적인 복음주의 진영에서 자랐다. 우리 접근 방법에서 일어난 진정 파격적인 변화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이 율법을 완성하신, 율법의 선고를 담당하신 분으로, 그리고 이제는 우리에게 값없이 사면을 베푸시는 분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럴 때만이 우리는 다시금 사랑할 수 있도록 진정으로 자유롭게 된다. 이머전트 교회 운동에서 대형 교회 모델을 결정적으로 비판할 때, 그 강조점은 사람들을 지금까지 나온 가장 위대한 이야기에 젖어들게 하는 일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의 열정과 활동의 수준을 측정하는 데 맞춰져 있다. 이 비판이 조금 더 절박하고, 조금 더 순전하며, 조금 덜 소비자 중심주의적일 수 있지만, 이 기본 메시지가 조엘 오스틴의 메시지와 얼마나 다르다는 말인가? 동시대 미국의 기독교 전체를 놓고 볼 때, 이 기본 메시지는 복음(이런 일이 행해졌다.)없는 율법(이 일을 행하라)의 형식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율법과 복음이 필요하지만 각각은 다른 일을 한다. 율법과 복음을 혼동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주는 외상도,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해방하는 능력도 맛보지 못하고 만다. 마치 복음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일에 대한 메시지인 듯, 복음을 살아내고, 복음을 행하며, 심지어 복음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율법에서 등을 돌리는 것도, 율법의 요구를 완화시켜 도움을 주는 조언으로 만드는 것도 합당한 반응이 아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바른 반응이다. 우리에게 복음을 살아내라고 하신 적이 없고,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비의 관점에서 율법을 따르라고 하셨다. 복음을 율법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식은 죽 먹듯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된다. 이것이 복음을 당연시할 수 없는 이유다.
생활을 위한 원리, 실천적인 조언, 승리하는 생활의 비결, 제자도의 촉구 그리고 지침 등은 모두 율법이라는 범주 아래 들어간다. 엄중하게 제시하든 부드럽게 하든, 하나님의 명령이든 사람의 것이든 상관없다. 요점은 이 말들을 흘려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a) 이것들이 우리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인하고, (b)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것임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하겠다.” 한 일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 거룩과 구속”이 되어 주셨다는 것이 복음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을 말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한다.
5장 영지주의 영성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도덕주의가 펠라기우스 이단으로 표류해간다면, 열광주의는 영지주의로 알려진 이단이 지닌 한 얼굴이다.
영광의 신학에 대해 논하면서 루터는 하나님에게 올라가기 위해 헛되이 내딛고 있는 또 다른 사다리를 언급했다. 그것은 이성적인 추론, 신비주의적인 경험 그리고 도덕적인 투쟁이다. 이 셋은 루터 시절에도 그랬지만 교회의 미국판 유배를 보여 주는 증거로서 오늘날에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고대 영지주의에서도 그랬지만 하나님의 위엄, 주권, 자존 그리고 거룩함이라는 감각이 거의 없다. 하나님은 친한 친구, 내 최고의 경험, 혹은 지금 최상의 삶을 살게 하는 힘의 근원이다. 하나님은 낯설지(즉 거룩하지) 않다. 하나님이 심판자일 리가 없다. 하나님은 두려움, 경외감 혹은 질리게 하고 방향 수정을 요하는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게다가 피 흘리는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속죄로 쏠려 있는 모든 초점은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잔인하고 영적이지 않게 보인다.
이 미국적인 특성이 잘 드러나는 종교관은 내면의 경험을 영적 진정성의 척도로 삼는다. 이런 종교관에서는 영혼과 신의 직접적인 관계가 거룩한 자와 거의 연애하듯 마주치도록 돕는다. 우리의 영적인 지도자들이 성경을 신실하게 해석하고 있으며, 교회의 공적인 안수를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은 자들인가 아닌가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그들이 우리에게 예수와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확인시켜 주는 연약함, 진실성 그리고 친근한 자발성을 풍기고 있는지 아닌지에 더 신경을 쓴다. 미국 종교에서 감히 공격할 수 없는 한 권위는 자아의 내면적인 경험이다.
6장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하는 방법
우리 밖 역사 안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난 일에 믿음의 초점을 맞추면,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어떤 밖에 있는 말씀이 아니라 사적인 경험과 도덕적인 개선을 위한 좋은 자료들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약하고 어리석어 보여도, 성경이 명시하는 바 하나님의 방법과 구조는 메시지와 일치한다. 선포는 개인적인 협박 혹은 유용한 제안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오심에 대한 것이다. 세례는 우리의 결단에 기초를 두고 헌신을 다짐하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에 의하여 우리에게 헌신하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하나님의 주장은 우리의 헌신을 전제하기보다는 헌신을 만들어 낸다. 성찬은 우리가 기억하고 재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우리의 음식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초점을 두는 일이다. 우리가 은혜의 언약 안으로 편입되었음을 인증하고 비준하는 일인 것이다.
이 모든 말을 통해 우리는 메시지가 방법과 분리될 수 없고, 구원론(구원의 교리)이 교회론(교회에 대한 교리)과 나누어질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차이를 인식하기는 하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메시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는 방법(매체)에서 분리될 수 없다.
스스로를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말하는 교회들에서조차 지금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경험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반적인 강조점이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봉사의 수단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지쳐 있으면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겪은 많은 경우들에서, 그 이유는 복음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신자들에게는 끊임없이 요구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교회는 복음이 아니다. 높은 교회(제도적인 장소로서 교회)이든 낮은 교회(변혁된 개인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형태이든, 교회가 구속의 사명, 즉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생명과 사명을 세상으로 확장시키는 일을 한다는 개념이 만연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모았던 초점을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옮긴다면(성경을 적합하게 해석하는 일은 고사하고), 우리에게 너무 많은 신뢰를 거는 일을 반드시 그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구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구속받는다. 성육신(아들이신 하나님이 육체가 되심)은 우리와 이 세상에서의 성육신적인 삶과 사명에 원형적인 사건이 아니다. 성육신은 한 유일무이한 인격의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한 한 협조자가 아니라 증인이다. 거듭난 기독교인의 집합체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편배달 주소를 가지고 있는 역사의 제도로서도 교회는 구세주가 아니다. 교회는 언제나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다. 교회는 자신의 거룩성 혹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리스도에게 이르려는 열정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세우고, 설교자,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의 제도로서 교회는 우리의 영적 여정 내내 우리의 어머니 노릇을 한다. 이 사역은 세상을 향해 넘쳐흐르는 진정한 선물의 시혜를 받는 감사하는 공동체를 만든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세우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무엇이다.
7장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저항하라
복음 자체처럼, 이 전략은 직관을 거슬리는 것처럼 보인다-특히 거짓과 타협하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하는 전략들에 철저히 주입된 후에는, 더 이상 복음을 번역하지 말라! 복음은 언제나 같은 이유로, 정확하게 같은 지점에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다. 복음을 현대어로 번역하려는 노력은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믿음직한 것으로 만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복음이 우리의 타락한 교만에 직관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 없이는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 위대한 일을 이루실 때 복음을 통해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회심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유일한 가능성을 제거한다. 번역할 때 잃어버리는 것은 복음 자체다. –그러므로 참된 변화의 유일한 희망과 용서도 사라진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펠라기우스 추종자가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율법과 복음을 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이다.-은혜의 수단(말씀과 성례)을 경시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 세상을 변혁하는 우리의 수단들을 선호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설정된 기본 값은 자기신뢰이기에, 진정 복음을 이해하고 이제 우리 자신의 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고 절대로 추정할 수 없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 순간에도, 그것은 행위가 아닌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교회가 교리(“가르침”을 뜻하는 어휘)에 관심을 잃을 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종교와 도덕적인 전제들로 표류하는 것은 놀랄 일이 못 된다.
사람들이 들을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떠나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확증할 수 있는 어떤 논증도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그러므로 교회를 깨우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선포함뿐이다. 그리스도를 선포함은 인간의 말 너머의 초월적인 말씀이 있다는 믿음의 증거다.
Ⅱ. 느낀점
이 책을 통하여 두 가지 느낀 점을 말하고 싶다. 첫째는 무지의 위험성이다. 둘째는 복음의 메시지가 자주 반복적으로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무지의 위험성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지배적인 모습이 지식 없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다.”
필자의 신앙생활은 ‘지식 없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바르게 교정될 수 있으므로 지금은 인정하면서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을 통해 필자의 무지한 점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복음과 율법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름 복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율법이라고 지적하면서 설명해 주었을 때 뒤통수를 얻어 맞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필자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가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고 믿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필자는 필자의 신앙의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가 맺혀지지 않을 때 마다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복음을 알고 믿는데 “난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할까?”라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 가운데 대면할 때면 필자는 “내가 복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복음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행위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래서 내 행위가 온전하지 않으면 더 나아가서 완전해지지 않으면 나의 구원도 의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과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와 다른 생각을 하거나 열심 없는 사람들을 보면 판단한다.
이러한 지식 없는 열심으로 인하여 복음은 뒷전으로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온전하게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까? 그리하여 말씀이 아닌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면 이러한 인들이 마치 자동적으로 이루어질까 생각해서 더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깐 기쁨과 어떠한 영적인 경험 같은 것을 하지만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과 결과는 필자를 더욱 절망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복음은 분명 나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난 그 복음 때문에 더 억압받게 되었다. 도저히 무엇이 문제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나에게 저자의 책은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볼 수 있는 길잡이가 되었다. 저자의 주장대로 필자는 복음과 율법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있었다.
저자가 복음과 율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해서 설명해 주었을 때 마치 수건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율법과 복음이 필요하지만 각각은 다른 일을 한다. 율법과 복음을 혼동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주는 외상도,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해방하는 능력도 맛보지 못하고 만다. 마치 복음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일에 대한 메시지인 듯, 복음을 살아내고, 복음을 행하며, 심지어 복음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율법에서 등을 돌리는 것도, 율법의 요구를 완화시켜 도움을 주는 조언으로 만드는 것도 합당한 반응이 아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바른 반응이다. 우리에게 복음을 살아내라고 하신 적이 없고,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비의 관점에서 율법을 따르라고 하셨다.”
저자의 이 설명은 다시 한 번 내게 복음이 선포되는 경험이었다. 이 책을 통하여 복음에 대한 나의 무지가 부끄럽고 한탄스럽지만 감사한 것은 복음을 더욱 깊이 넓게 알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복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다시 신앙의 오류를 겪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와 같이 복음과 율법을 구분하지 못해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길잡이의 역할이 되고 싶다.
둘째, 복음의 메시지를 자주 선포하라.
만약 당신이 생선을 사러 생선가게에 갔는데 그 생선가게에서 생선은 안 팔고 그 대신에 소고기를 판다면 당신은 그 생선가게에 또 생선을 사러 갈 것인가? 아니 지난 번에는 생선이 없어서 못 팔았다고 생각하고 다음에 또 갔는데 이번에도 생선은 없고 다른 것들 만 있다면 당신은 정말 그 생선가게에 또 생선을 사러 갈 것인가?
만약 나라면 다시는 그 생선가게에 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생선가게에서는 내가 원하는 생선을 팔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생선가게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기독교인들은(필자를 포함한) 기독교에 누가 있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상이 기독교에 나타나고 있을까? 저자의 주장대로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음을 청중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목회자들이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청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메시지만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일까? 안타깝게도 사실인 경우들이 허다하다. 현대 기독교에는 그리스도가 선포되기 보다는 자기계발이나 성공방법 도덕 또는 신비적인 영성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장해서 선포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그리스도를 다른 것과 함께 섞어서 전하고 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일들이 지금 우리의 교회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조차도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안타까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적 같은 방법은 없다. 오히려 기적 같이 해결하려다 더 미궁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교회를 깨우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선포함뿐이다. 그리스도를 선포함은 인간의 말 너머의 초월적인 말씀이 있다는 믿음의 증거다.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해결 방법을 주셨다. 바로 복음이다. 우리의 문제는 해결 방법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방법에서 돌아서야 한다. 우리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말이다. 세상이 어리석다 여기고 미련하다 여기는 바로 그 복음으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 귀에 매주 그리고 매일 들려지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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