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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론
-헨드리쿠스 벨콥-
3. 성령과 교회
1) 성령, 교회, 개인
칼빈의 견해가 급진적 기독교나 로마 카톨릭의 견해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로마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위해 교회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으로서 성례를 베풀고 성직제도가 있는 기관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성령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목표가 개인의 마음 가운데 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강조하지만 교회를 이 역사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말미암은 소산일 뿐 아니라 그 역사의 거룩한 기초라고 생각한다.
개혁주의 교회는 카톨릭 교회형의 열매이고 자유교회형의 근원이기 때문에 두 가지 형태 모두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의지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개혁주의 교회의 고백과 소책자 속에서는 칼빈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데 먼저 성령과 개인과의 관계이고 다음으로 성령과 교회와의 관계이다. 그러나 요한 오웬(John Owen)의 성령론(Pneumatologia 1674)에서와 아브라함 카아파(Abraham Kuyper)의 성령의 역사(The Work of the Holy Spirit :1888)그리고 브루너의 교의학(Dogmatics) 제 3권에서 말했던 것처럼 어떤 이들은 이 순서를 바꾸기도 한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k)는 그의 유명한 개혁신학(Reformed Dogmatics)에서 전통적 순서를 따르면서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각 신자의 개인적인 신앙은 교회의 터에서 출생된다. 모든 기관에서 전체가 부분에 우선하듯 교회도 개인적 신앙에 앞선다.” 이와 비슷한 양면성이 칼 바르트에게서도 볼 수 있다. 성령과 개인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강조하고 동시에 교회는 인간이 아닌 성령이 만드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이 모두를 지속시키고 싶어 하는 개혁주의 고백의 특징이다. 이 두 견해간의 순서가 개혁주의 고백에서 미결된 채로 있다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 우리는 전통적인 입장을 넘어서 그 순서를 결정해야만 된다고 믿는다.
내가 보는 올바른 순서는 교회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개인이다. 성경에서 성령은 그냥 개인이 아니고 공동체의 대표자로서의 개인으로 항상 시작한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공동체에 참여하게 하셨으며 또한 교회에도 참여하셨다.
2) 교회 안에서 성령의 두 가지 역사
우리가 교회를 우선으로 생각하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교회의 특성이 카톨릭 교회가 했던 방식대로 공식화된다는 뜻은 아니다. 교회학에서 양쪽 접근 방법을 함께 지속시키면서 교회를 제도적인 입장뿐 아니라 공동체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전형적인 개혁주의 입장이다. 우리가 한쪽 면에만 치우친다거나 한 제목만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먼저 교회의 어떤 제도적인 면에서 성령을 다루어야 하는가를 알아 본 다음 공동체적 요소가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되는지를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이 양측 입장이 성령의 역사 속에서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3) 교회의 제도적인 면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이 교회의 제도적이고 조직적인 면과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기란 어렵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령에 대해 개인적이면서도 성령주의적 혹은 기껏해야 인격주의적 개념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이 구조뿐 아니라 인격도 창조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구원하는 역사 중 그 구조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는 성령이 외적 활동, 사역 그리고 조직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등에 장애가 없다. 이와 관련 지어 일곱 가지 예를 들어보자.
먼저 성령은 세례와 관련이 있다. 구체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13)
두 번째로, 안수하는 것은 성령을 전하는데 자주 쓰였던 방법이다.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7)
세 번째로, 성령은 거룩한 성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가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이는 성령이 그의 회중 가운데에서 스스로 활동하시는 다시 사신 그리스도이시고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다시 나타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관계인 때문이다.
네 번째로, 성령은 말씀 선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기 때문에(엡 6:17) 우리에게 성령을 공급하는 분이 믿음으로 들음으로써 그렇게 행하시기 때문이다.(갈 3:5)
다섯 번째로, 성령은 교회 내에서의 권위 및 훈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2-23).
여섯 번째로, 일반적으로 사도들의 사역과 성령의 역사는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고린도후서에서 이 관계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대개 목회자를 그의 도구로 삼는다. 이것은 바울 서신에서 목회자를 묘사하는 전제조건이다.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는 분은 바로 다시 사신 그리스도 즉 성령이다.
기독교 신학에는 성령의 이러한 역사에 대해 정당성과 적절성을 완전히 인정하는데 놀랄만한 이해력을 보이지만 이런 면에 너무 관심을 가지므로 말미암아 교회가 성령의 도구가 아니라 성령이 교회에 갇혀버린 꼴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보인다. 이런 우려는 매우 이해할 만 하다. 종교개혁이란 어떻게 보면 교회 스스로 성령을 가두고 있는 교회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도구들을 통해 성령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만나고 싶어 하느냐의 여부와 만난 결과 교회 안에 그분이 거하심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시느냐 아니면 책망하시느냐의 여부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간격이 생긴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과 개혁주의 입장간의 차이는 성령과 제도로서의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질 수 없다. 진정 차이는 그들의 성취시키는 만남의 도구와 성격 중 어디에 우선권을 둘 것이냐에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는 우선권을 말씀 선포보다는 성례전에 두고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개인적인 만남에는 큰 해로움을 입는다. 개혁주의에서도 도구로서의 성령의 임재를 의심스럽게 함으로써 이런 오류를 피할 수 없는데 오직 그것만이 살아계신 성령의 유일한 도구라고 강조함으로서만 이 오류를 피할 수 있다.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에서 성령의 역사와 관련 지어 두려워하는 것을 떨쳐버리는 일이 기독교 신학의 의무이다. 교회 내에서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 의식, 활동을 떨쳐버리고 권위와 살아계신 성령의 역사와 관련을 맺으면서 우리의 모든 활동이 그 역사에 종속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사실에 모든 성직자와 교인이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를 우리가 서 있는 거룩한 땅, 하나님의 적극적인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발견한 것은 이른바 프로테스탄트보다 훨씬 앞 서 있는 점이다.
4) 교회의 공동체적인 면
여기서 혼란을 야기시키지 않기 위해 분명히 한계를 지어야겠다. 우선 여기서 개인의 마음속에서의 성령의 역사나 몸을 세우기 위해 성령이 각 개인에게 주는 은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제도로서의 교회가 개인을 낳을 뿐 아니라 실제 공동체도 만든다는 위대한 사실에 우리의 관심을 국한시켜야겠다.
성령이 공동체를 만드시는 역사를 한다는 첫 번째 증거는 교회 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처럼 매우 적대시되는 두 집단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자연적인 유사성과 다양성을 초월하는 이 몸은, 성령의 통일시키는 능력의 징표로서, 위대한 미래 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삶의 방식을 예언하는 방법으로, 그리고 인간성과 하나님 나라의 자유, 평등, 박애의 목표를 완전히 성취시키는 방법으로 세상 속에 거한다.
이런 공동체적인 면을 강조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성경 속에 있는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낱말을 중심으로한 문제들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코이노니아라는 낱말이 어떻게 두 가지면 즉 성령과의 교통과 성도간의 교제를 뜻하는지 알아보자. 두 가지 모두 뗄 수 없을 정도로 함께 속해 있다. 우리가 말씀과 성찬을 통해 성령 속에 동참하게 되면 성령에 동참한 사람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동시에 참여하게 된다. 이 양면성의 사실은 다음 두 가지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첫 번째는 성도간의 교제 없이 개인적인 방법으로 성령과 교통할 수 없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결합력이 같은 국적, 사회적 계층, 종족 속에 동참하는 데에서 유래한다면 그 공동체를 기독교적 교제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성령이 만드시는 공동체는 성령 자신이 그 중심이 되시고 그 속에서 인간은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 교제케 되는데 그렇게 되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똑같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자녀로 같이 인침 받고 하나님 나라를 같이 소망하며 사랑과 순종을 같이 요구 받기 때문이다.
5) 이 둘간의 관계
에베소서 4장에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되고 있는데 그는 성령과 같은 분으로써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8절). 이 선물은 그 구절의 처음(7절)과 마지막에서(16절)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은사라고 언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물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은사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신다.”(11절)고 말하고 있다. 이 요소가 성령의 직접적인 선물로 여겨지기 때문에 분명히 여기서 제도적인 요소를 다루어야 한다. 성령은 마음과 신실한 공동체뿐만 아니라 조직체에도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목적을 위해 조직체에 관심을 갖지는 않으시는데 왜냐하면 성경에서 이 은사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기”(12절) 위해서 주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제도에 우선권이 있지만 제도는 도구인 공동체 속에서 그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성령이 이룬 역사는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역사이며 또한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를 이식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연합의 역사이다. 연합하는 방법 즉 역사적인 몸에서 교회의 몸으로 변하는 방법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게 될 뿐만 아니라 물로 인하여 거듭나는 방법이며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속죄에 동참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몸의 개념 속에서 “물질적인” 측면과 “영적 측면” 또는 제도적인 측면과 공동체적 측면이 어떻게 함께 속하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또한 전자가 후자의 근원이 되어서 살찌우게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와 에베소서 4장에서 제도적인 요소가 공동체 요소에 어떻게 우선하는지도 또한 알 수 있다.
이런 예들을 통해 성례와 개인적인 결단, 성직자의 조직체와 공동체의 성장, 육체적 행위와 영적 연합을 신약성경 속에서 조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통찰할 수 있다.
성령의 운동은 한 분께서 많은 이들을 향하는 즉 부분이 전체를 향하는 운동이다. 역사 중인 그리스도처럼 성령은 두 가지 면의 역사를 하는데 첫 번째가 다시 나타나심이고 두 번째가 연합이다. 세례, 설교, 그리고 성찬 속에서 또 일반적으로 사역의 역사 속에서 성령은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에 거하게 하신다. 제도적인 측면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길이 된다. 우리 가운데 다시 나타나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연합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통해 죽었다가 살아나며 떡과 잔을 통해 그의 임재를 함께 나누며 단번에 그리고 계속해서 그의 역사 속에 동참하게 된다. 이것이 많은 이들이 한 분의 삶과 역사에 동참하는 방법이다. 다시 나타나시는 목적이 연합 속에 있듯이 연합의 목적은 새 사람의 예언이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존재로서 공동체를 이룩하는데에 있다. 그러므로 이제 양면성이 아니라 한 운동 즉 다른 관계를 함께 묶는 한 개의 사슬로 이야기 해야 한다. 다른 비유를 사용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제도적 요소와 공동체적 요소는 뿌리와 열매처럼 서로 관련되어 있다.” 뿌리는 열매에 우선하지만 열매는 뿌리의 목적이 되고 뿌리는 그 기본이 된다. 열매는 맺혔다가 사라지지만 뿌리는 새로운 열매를 맺는 기본적이면서 지속적인 요소라고 이야기 한다면 이 비유는 훌륭하다.
우리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서로 다른 교회형태 사이에 있었던 긴장을 이제는 잘 이해하게 된다. 카톨릭 교회형은 뿌리를 강조하고 자유 교회형은 열매를 강조하는데 두 가지 형태가 모두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위험스럽게도 서로 다른 요소를 경시 여기고 있다. 열매를 경시하는 것이 뿌리를 경시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한편 신학뿐 아니라 실제를 통해 제도적인 교회가 평신도와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 공동체적 교회가 제도적인 구조를 성령의 선물로 새롭게 평가하는 것보다 쉽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4. 성령과 개인
6) 거듭남의 세 번째 요소?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차이점은 누가는 역사가적인 관점으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싶었다는 점이다. 이 목적과 결부시켜서 네 번의 다른 시점에서 성령의 성공 장면을 묘사하면서 성령 충만하여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첫 번째 성공은 예루살렘에서 오순절 사건(2장)이고 두 번째는 사마리아에서였고(8장) 세 번째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들인 개종자들에게서이며(10장) 네 번째는 에베소서의 이방인 세계(19장)에서였는데 뒤의 세 사건은 고넬료(10:47, 11:15)의 경우 베드로가 분명히 밝힌 것처럼 오순절의 반복으로 여겨진다. 희랍식의 역사가와 작가로서의 누가의 능력은 이야기들 속에서 명백하다. 우리는 조직신학에서 그것들을 직접 적용하지 않지만 누가가 비슷한 현상들이 기독교인들의 삶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이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으리라고 가정할 수 있다.
누가의 선생인 바울은 이와 같은 현상이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누가와는 달리 그의 목적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기 보다는 목회적 지도를 하기 위함이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누가가 그 기원을 밝힌 전통이 발전하여 타락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너무 열중하다 보니 사랑 없는 자만심과 혼란을 야기하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성령충만의 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을 발전시킨다. 초창기의 어떤 역사적인 사건도 이미 설립된 교회 속에서의 교회 생활을 위한 정상적인 개념 속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물이 힘차게 솟음으로 새 샘은 시작되고 곧 이어서 더 잔잔한 흐름으로 발전한다. 어떤 이들은 새로 솟은 것이 계속되기를 바라지만 어떤 이들은 솟는 것이 중단된다고 해서 샘이 끝장이라고 믿기도 한다. 바울은 세 번째 생각을 갖는다. 조직신학은 그의 생각을 따라야 한다. 한편으로 기성교회가 이 생각을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점과 또 한편으로는 그 출발점을 바울의 생각이 아닌 누가의 개념으로 삼는 오순절주의 신학을 우리는 거부해야 한다.
7) 세 번째 은사의 특성
성령충만은 세상과 교회에서 성령의 하시고자 하는 일의 도구가 되게 하기 위해 각 개인을 무장시킨다는 뜻이 분명하며 사랑과 선한 사업 중에 이웃에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는 성화로 표시된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것은 공통적인 인간 본성과 관련 지어 흔히 있을 수 있는 명령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행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등 성령의 열매에 덧붙여 성령의 은사가 있는데 이것들은 사람마다 다르고, 성령의 역사가 보다 넓은 교회 및 세상적 차원 속에 우리가 참여하는 수단이 된다. 성령충만이란 의롭다 칭함 받고 성화된 자들이 소위 안에서 밖으로 전환한다는 의미이다. 사도행전에서 그들은 세상에 가장 주된 관심을 돌렸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전체 몸에 관심을 두었지만 이것은 단순히 상황과 강조점에서 오는 차이에 불과하다.
8) 은사의 다양성
로마서 12:6-8, 고린도전서 12:8 및 28, 14:6, 에베소서 4:1 등 다섯구절에서 바울은 은사를 열거하고 있는데 서로 중복되지만 결코 같은 것은 아니다. 특별히 놀랄만한 것은 로마서 12:6-8에서의 보통 은사와 고린도전서 12:8-10에서의 특별 은사간의 차이점이다. 바울은 특별 은사의 입장에 서서 매우 일관성을 주는 고린도에서의 경향을 반대하기도 했고 모든 사도의 권위를 들어 특별치 않은 은사에 있을 수 있는 다양성을 변호하기도 하는데 변호에서 공격으로 바뀌기도 한다.
9) 교회와 교파 속에서의 진리와 비진리
오순절 주의자들은 누가의 관점에서 바울을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건전하지 못한 해석방법이다. 바울에 관해 고린도전서 12장 7절부터 11절만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만 은사를 조직적으로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또 바울이 다른 성경구절에서 언급한 그리 중요치 않은 은사는 같은 방법으로 무시한다. 그 외에도 방언 말하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을 쏟는데 바울이 보기에는 방언 말하는 것이 부차적인 은사에 불과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특별히 관심을 쏟는 이유는 이 그룹 내에서 은사를, 은사가 부족한 사람을 섬기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측정하는 징표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교회는 오순절 주의자들이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부차적인 은사를 받는 자들의 원인을 변호하고, 은사를 모두 실천하는 것이 사랑에 의해 통제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목표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교회의 외침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비오순절주의” 교회들은 오순절 운동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소멸치 말고 성령의 은사를 갈망하라고 권면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오순절주의자들과 우리 주변의 세상에 우리가 그리스도께 하듯 모인 이들을 섬기라는 진리를 어디에서 보여줄 것인가? 오순절 운동은 수직 수평 운동처럼 내적 성장과 외적 팽창이 결여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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