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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성령-싱클레어 퍼거슨- 요약

훈나겸 2018. 3. 30. 05:00

성령

싱클레어 퍼거슨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계시들을 성경신학적으로 그리고 구속사적 방법으로 추적해 가는 것

-성령에 대한 우리의 모든 고찰에서 가장 커다란 바람은 당연히 그분과 긴밀하고도 인격적으로 교통하는 것이요, 그분에 의해서 우리가 성부와 성자를 영화롭게 하며 순종하고 경배하도록 인도를 받게 되는 것

 

제1장     성령과 그리스도의 몸

 바울의 신학 가운데, 그가 유일하게 사용한 다음의 비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즉 교회란 우리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들어가게 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성령 세례로 말미암아 가능케 된다. 곧바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1) 바울이 교회를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사회적문화적 장벽이 무너진 그리스도의 ’(body)이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한 바는 무엇인가? (2) 성령은 어떻게 세례를 통해 이런 몸으로 들어가도록 관여하는가?

1.     그리스도의 몸

 이 은유의 기원에 대한 설명 중 가장 단순하지만 최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공동체를 하나의 으로 보는 개념이 공중에있었다고 보는 견해다. 바울은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고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서 이 용어를 채택한다. 특별히 그가 묘사하고 있는 은 매우 독특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분은 몸의 머리요 지배자이시다. 여기서 머리’(kephale)는 신체의 일부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해부학적 단어가 아니라, 관계성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는 주님이시요, 우주와 교회를 동시에 지배하시는 분이다. 개인들은 그리스도의 몸, 즉 은혜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의 생명덩어리로 분리 불가능하게 묶인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또한 서로에게 속해 있다.

2.     성령 세례

 다음으로, 이러한 몸으로 들어가게 하는 세례에서 성령의 활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울이 성령을 매개체(with/in the Spjirit)로 보고 있지 집행자(‘by the Spirit’)로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주제를 만나는 곳마다 본질적으로 변함없는 한 가지 용어, 즉 성령-세례(Spirit-Baptism)라는 언어 표현을 마주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일관되게 세례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한 몸으로 세례를 받으며 성령은 그 세례의 매개체이다. 그러나 이 몸 안에서 삶은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정해 놓으신 수단들, 특별히 세례 의식, 주의 만찬과 사역 등에 의해서 지배 받는다.

3.     세례

 성령 세례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시작하도록 한다. 물로 받는 세례는 이것이 외적으로 드러난 상징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2:38). 여기서 회개, 물 세례, 죄의 용서, 그리고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는,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속으로의 교제로 진입하는 하나의 실재의 연결된 측면들로 보인다( 28:19).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은혜의 상징이요 인치심이며, 우리를 위해 그분이 예비하신 부요함의 상징이다. 상징되고 인침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이다. 물 세례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은혜이다. 따라서 믿음은 세례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인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표에 의해서 인쳐지며, 말씀 가운데 있는 약속에 대해서처럼 믿음이 그것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말씀으로 해석되는 상징과 함께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우리에게 확증되며, 그 확증에 의해 믿음이 강화되고 확실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세례를(성찬도 마찬가지다)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 성례 신학에서 흔히 범하는 두 가지 잘못을 피할 수 있다.(1) 한 가지 오류는, 의식의 상징적인 성격을 매우 주관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행동, 결단, 경험에 의존하게 만들어 믿음의 기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 믿는 자 스스로의 자원이나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은혜로 돌이키게 하는 믿음의 기능을 망각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오류는, 상징의 축복의 효력을 지나치게 객관화함으로써, 상징의 수납을 그것이 상징하는 것의 수납과 동일시하고, 그 상징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믿음의 여지나,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에 대한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는 것이다. 세례와 성만찬의 유효성은 성경을 잃는 것과 듣는 것의 효력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듯이 성령의 사역으로부터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

4.     주의 만찬

 세례와 성찬은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언약의 상징이자 인을 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가리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성례는 독특한 기능과 독특한 목적을 갖고 있다. 세례는 시작이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상징으로서 단 한 번 받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의 상징이요 자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성령은 어떤 것을 특별히 증거하는가?

 성찬의 핵심은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찢겨진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그것을 받아 먹는 것은 우리를 위해 몸을 찢으시고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수단이다.

 이것 역시 세례처럼 언약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유월절의 어린양을 먹는 것은(그것의 성취가 성만찬이다, 고전 5:7-8), 하나님의 심판 곧 죽이는 사명을 수행하는 천사들의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그 저주로부터 보호를 받고 어린양의 죽음으로부터 오는 축복에 참여함을 의미했다( 12). 그것은 언약에 의해 구속되고 축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한데 묶여있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제2장     성령의 은사들과 사역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의 상관 관계는, 성령의 선물과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승리와 왕좌에 오르심을 외적으로 현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 시대에 이런 행위적인 은사들’(성령의 은사들), 이전 교회사에서의 상징적 은사들’(성례)과 마찬가지로, 불일치와 논쟁이 가장 많이 얼어나는 영역이 되고 말았다.

 우선 이 소란스러운 주제에 대한 서론적인 설명의 일환으로 두 가지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성령의 어떠한 은사의 행사에서도,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의 사역이다. 하나님의 계시적인 말씀의 사역이 모든 다른 은사를 사용하는 데 핵심이 된다. , 사도와 선지자를 통한 계시의 말씀이 기본 토대이고( 2:20), 그 외의 모든 것은 말씀으로부터 흘러 나오고 말씀에 의해서 알려지게 된다.

(2)   신약 성경은 영적인 은사들의 사용에 있어서 사랑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이는 롬 12:3-8에 함축되어 있고, 벧전 4:10-11에 좀더 분명히 드러나 있으며, 고전 13:1 이하와 엡 4:16에서도 지배적인 원리이다). , 이 은사들이 사랑 안에서 사용될 때 몸은 스스로 석 된다. 따라서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은사들과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지만, 은사의 사용에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그리고 그것을 수반하는 겸손이 없다면( 12:3; 고전 4:7), 성령의 은사들의 목적은 좌절되기 때문이다(고전 13:1-3).

 신약 성경에 언급된 모든 은사의 정확한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과 관계된 은사들의 경우에는 그 본질이 비교적 분명히 밝혀질 수 있다. 비록 거기에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지만 말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직접 임명을 받은 사람들이요, 그분의 부활( 15:26-27; 20:1-3; 고전 9:1-2)에 대해 증거하도록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반면 신약 성경에 사도들이라고 묘사된 또 다른 사람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자라기보다는 교회가 보낸 사신들로 보인다( 14:14은 그 단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선지자들 역시 기초를 놓는 사역을 수행하였다. 교회는 그 주요한 모퉁이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다”( 2:20). 여기에서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동시대 사람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받은, 초대교회 내의 구별된 그룹으로 보인다. 하지만 바울의 설명을 증언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한다. ‘선지자인 사도들.’ 후자의 견해는 웨인 그루뎀(현재 시카고 트리니티 신학 대학원 교수-역주)의 영향력 있는 저술「신약 성경과 오늘날의 예언의 은사」에서 매우 상세히 변호되고 있다. , 신약 선경 안에 예언의 두 가지 다른 수준이 있는데, 그러므로 성경의 최종성과 충족성을 훼손시키지 않고서도 현대 교회에서 지속되는 비계시적인예언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선지자와 사도를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4:11; 참고 고전 12:28), 이것이 그 본문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목사들과 교사들은 때때로 두 가지 구분되는 역할로 해석되었지만, 최근에는 한 사람의 사역을 두 가지 기능의 관점에서 기술한 것으로 보는, 이른바 증언법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호칭들이 로마서 12:7-8에 나오는 섬김, 가르침과 리더십 등가 같은 개념들 속에 암시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짐작컨대 치유의 은사(고전 12:9, 30에 있는 복수형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들의 직접적인 병 고침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예를 들어, 3:6-8; 5:16; 8:6-7; 14:9; 28:9). 더욱 어려운 것은 지혜와 지식의 말씀과 같은 개념에 대한 교리적 확실성이다. 아마도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전자를 하나님의 길에 대한 실제적인 통찰력으로, 후자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통찰력으로 간주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일찍이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불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여기에 엄격하고 확실한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훗날의 교회가 매우 편협하고 집중적인 사역 개념을 발전시킨 것에 비추어 보면 다양한 사람에 의해 사용된 몇몇 은사들 간에 미묘한 구분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 지혜는 지식과 다르며, 가르치는 은사는 권위(권면)하는 것과 다르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역은 항상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은사적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한 방식이 전적으로 신적이면서 또한 전적으로 인간적인 성격을 지닌 것을 볼 때, 그분이 이 같은 다른 은사들을 나누어 주실 때에도 우리 인성의 독특한 성격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분석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방언과 예언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이는 상황의 역설적인 결합에 기인한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사도의 시대가 종결된 후 그 다음 시대에 이 은사들이 급격히 감소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세기에 이 은사들의 회복과 계속성을 주장하는 극적인 상승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에서 방언과 예언의 연속성과 재출현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지만, 그러한 증거의 돌발적인 성격은, 주류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에서는 그러한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줄 뿐이다.

 이러한 현상이 부활하고 회복되었다는 오늘날의 주장은, 그 현상이 통계적으로는 매우 압도적이지만, 신약 성경과 현대의 현상들 사이의 동일성에 대한 주장을 평가하는 데 어려움을 더하고 있다. 또한 그 의미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 역시 더 복잡한 양상을 불러일으킨다. 현대에 은사가 회복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에 대한 설명의 일환으로, 2세기와 20세기 사이에 살았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적절한 방법으로 믿음을 행사하지 못했든지, 아니면 이 은사들의 재출현이 종말에 대한 여명의 전조이든지 둘 중 하나라고 결론을 내린다. 전자의 견해가 지닌 약점은, 그것이 자주 반복되는 간증과 일관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방언을 말하는 체험들은 자발적이고 주권적인 형태로 찾아온다는 것이다(그러면 왜 이것이 모든 세대를 통해 주권적으로 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후자의 약점은 그것과 연결되는 특이한 종말론에 있다.

 따라서 두 가지 주제가 탐구되어야 한다. 그것은(1) 신약 성경의 시대에서 이런 현상들의 본질과(2) 연속이냐 종결이냐의 문제다.

1.     방언

 방언(glossa, 참고. 2:4; 고전 12-14)은 일반적으로 실제 언어를 의미한다. 더욱이 바울은 방언을 말할 때 통역이나 해석이 요구됨을 주지시키는데, 그 이유는 방언이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다른 은사들은 결코 그렇게 간주되지 않는다.

 오순절 사건과 고린도 교회의 차이점은, 예루살렘에서 이 방언을 들었던 사람들은 이미 그 해석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즉 그들은 외국어를 이해했는데 그것이 곧 그들의 모국어였기 때문이다( 2:11). 통역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고린도에서는 통역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두 상황에서의 방언이 성격상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방언들은 확인 가능한 인간의 언어였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고전 13:1)이라는 바울의 흥미 있는 언급을 볼 때, 방언이란 천사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천사의 언어는 외경 욥의 유언” 48:3에 언급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욥의 딸 가운데 한 명인 헤메라가 천사의 방언을 한다. 하지만 천사의 방언(고린도전서에 있는 많은 표현들처럼) 사도가 그렇게 이해했다기보다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주장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당시 고린도에서 일어난 거짓 교훈의 요소들과 연결될 수도 있다[과도하게 실현된 종말론으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부활이 이미 일어났으며 따라서 성도들은 이미 천국에 있는 천사처럼 되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방언이 천사의 언어를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21에서 이사야 28:11-12을 인용하여 사용한 경우와 일치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바울은, 해석되지 않은 방언의 내적인 중요성의 일부는 바로 그것들이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증표’(고전 14:22)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방언은 부분적으로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증표로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탑 사건의 역전을 표시하며, 새 언약의 보편성을 지시하는 방언의 은사는 또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언약의 백성에 대한 심판의 전조다. 그러나 천사의 말은 거부의 신호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사야의 말씀을 적용한 것을 고려할 때, 고린도의 방언을 통역과 해석이 요구되는 외국어로 보는 것이 더욱 일관성이 있다. 오순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방언이 해석될 때에는 예언과 같은 역할을 한다( 2:17-18; 고전 14:5). 비록 그 현상이 실제적으로 동일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분명히 교회내에서 기능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2.     예언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유일하고도 완성된 저장고라는 확신이 교회 내에 널리 퍼진 결과, 신약 성경에서 예언에 대해 언급하는 많은 구절을 설교와 동등한 것으로 해석하는 일이 일반화되었고, 그러한 단락들이 당시 교회 생활의 질서 유지에 직접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받아들여졌다.

 최근에는 수많은 저술가들이 신약 성경에서 우리는 예언적 사역의 두 가지 수준을 발견하게 된다고 제안했다. (1) 사도들과 직접 연관된 것으로서 무오성 주장을 암시적으로 내포한 예언(첫 번째 수준)(2) 하나님이 주신 통찰력이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 발언이 반드시 무오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 두 번째 차원의 예언으로 분류된다. 이런 관점은 특히, 웨인 그루뎀의 여러 저술에서 주장되고 있다.

 그루뎀은 사도행전에서 자신의 명제를 지지해 준다고 믿는 몇 가지 시사점을 강조한다. 다음에 나오는 것은(나의 관점에서) 그의 논증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다.

 (1) 기근이 올 것이라는 아가보의 예언에서( 11:28), 누가의 표현(‘성령으로’)성령과 그 선지자 사이의 비교적 느슨한 관계성을 보여 주는데, 그 이유는 인간에 의해 개인적으로 영향 받은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여지를 남겨 두기 위함이다.’ 그루뎀은 여기서 로마서 8:37과 디모데전서 1:14의 유비에 대해 논증한다.

 하지만 이것은 유익한 논증이 아니다. 성경에 대한 그루뎀의 교리를 따른다면, 예언적 성격과 무오성을 가져오는 성령의 사역은 일반적으로 인간 저자의 개인적 특성과 행동을 충분히 표현할 여지를 남겨 두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대로 이것이 그 권위를 낮은 수준으로 절하시키거나 무오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기록된 신약 성경의 예언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기본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성령이 말씀하시되’( 21:11)라는 아가보의 표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점에서 그루뎀의 가설은, 아가보를 역설적인 상황에 두었기 때문에 부적절해 보인다. 즉 아가보가 성령의 일반적인 영향 아래서 말했을 때 ( 11:28. ‘성령으로 말하되’), 바울의 운명에 대해서 성령이 말씀하신’( 21:11)것에 따라 말했을(그루뎀에 의하면 덜 정확하게)때보다 미래를 더 정확하게 예언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명제에서 아가보의 경우가 본질적인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거짓 예언이 아니면서도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신약 성경의 예언의 실례로서 분명하게 주장되기 때문에, 그 명제를 입증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주장의 문제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류 가능성과 거짓 사이의 구분이 위험스러울 만큼 희미해진다는 점이다.

 (2) 그루뎀은 에베소에서의 제자들의 예언에 의해 자신의 견해가 정립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예언은 분명히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의 신적인 권위가 있는 예언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감과 그 의미를 서로 혼동한 것이다. 그루뎀의 견해에서 볼 때, 에베소 성도들이 예언한 것은 사도들의 무게 있는 선언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우발적인 것이다. 그것은 옳은 말이지만, 이 문제와는 무관하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우발적이며 덜 중요한 예언이라고 해서 비중 있고 중요한 예언보다 정확성이 떨어지거나 신적으로 덜 영감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 23-25)는 선언이 내 친척 헤로디온을 영접하라”( 16:11)는 메시지 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루뎀은 앞의 본문( 3:23-25)이 뒤의 본문( 16:11)과는 확실히 다른영감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울 역시 뒤의 구절을 기록할 때, 앞의 구절을 기록할 때보다 더 능동적으로(성령의 영감 없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3) 이 가설에 따르면, 사도행전은 바울이 순종하지 않은 예언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 예언들을 무오한 신적 권위를 지닌 것으로 인정했다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은연중에 예언 말씀의 다양한 수준을 인식했다는 말이 된다. 사도행전 21:4에서 누가는 두로에 사는 제자들에 대해 성령의 감동으로 그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간청했다고 적었다. 여기에 예언이라는 말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사도행전 11:28(“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과 병행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만일 우리가 분명한 하나님의 지시를 거절하는 바울을 고소하고 싶지 않다면, 그러한 예언에 이차적인 지위를 부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루뎀 자신조차도 이 사건을, 마치 그런 예언이 이차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무효화시키는 듯한 태도로 해석하고 있다.

 두로에 사는 그리스도인 상당수가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직면하게 될 고난에 대해 어떤 종류의 계시혹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면 그들이 그에 따른 예언(이 계시에 대한 그들의 보고)과 더불어 그들 자신의(오류 가능성이 있는)해석을 덧붙여, 바울에게 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구절은 그 실제 말씀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예언의 한 유형임을 시사하고 있다. 두로에서 행해진 예언은 주님의 말씀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첫 문단에 주어진 설명은 그 자체로는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두 번째 문단에 있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주어진 계시와 그리스도인이 그것에 대해 해석한 것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있었다(그루뎀의 용어로는 예언해석의 구별). 바울은 분명히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이 주시 계시로 받아들이지만, 두 번째 것은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미 계시하신 목표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고 거부하고 있다

 (4) 그루뎀은 사도행전 21:10-11에 호소한다.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그루뎀은 이것을 두 가지 작은 오류를 가진 예언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a) 유대인들이 바울을 묶지 않았고, (b)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준 자는 유대인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를 묶은 사람들은 로마인이었고( 21:33; 참고. 22:29), 그가 유대인들에 의해서 그들에게 넘겨진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에 의해서 유대인들로부터 구출되어야만 했다( 22:24).

 여기에서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된다. 하나는 그러한 일반적인 진술을 읽을 때, 마치 그것이 특정한 세부 사항까지도 알려 주고자 의도된 것처럼 해석해야 하느냐는 문제다. 그루뎀은 사실, 이런 세밀한 부분들도 이 특정한 예언에서 본질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이 함축하는 바는 아가보의 예언의 신빈성을 크게 약화시켜 버린다. 만일 초대교회가 두 수준의 예언이라는 그루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아가보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스스로 심각한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성령의 대변인으로 말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에서의 실수가 어떻게 작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지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한때는 정확한 선지자로서 그의 예언이 사도의 행동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나, 지금은 바보가 되어서 오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는 아가보가 두 가지 작은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의 기록은 사도행전의 독자들로 하여금, 바울이 일련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스스로 인식했다고 느끼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 수준의 예언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입증되었지만, 그루뎀의 주장 가운데 일부는 그리스도인의 하나됨과 교제를 증진시키는 점에서 훌륭한 것이다. 그의 명제는 일반적으로 예언과 영적인 체험의 문제에서 은사주의자와 종결론자 사이에 놓인 간격을 메우는 중용의 길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3.     연속주의자의 견해

 연속성에 대한 주장은 다음 네 가지 기본적인 사항에 근거하고 있다.

 (1) 현대인들이 체험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그렇게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잘못되거나 오도될 수 있겠는가?)

 (2) 신약 성경 어느 곳에서도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어떤 것이 폐기되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들은 지속된다.

 (3) 종결론자들의 견해는, 새 시대에는 두 가지 구별되는 혹은 구별 가능한 세대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곧 예수님이 자신의 죽으심, 부활, 그리고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시작하신 새로운 시대에, 사도 시대와 속 사도 시대라는 구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오직 한 시대, 즉 종말론적 성령에 의해서 시작된 한 시대를 알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런 은사들은 새로운 시대 전체를 통해서 교회를 위해 의도된 것이요, 그 시대의 특징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4) 바울은 예언이 궁극적으로 종결될 것을 인식하면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이것들이 폐하리라”(고전 13:10)고 지적하고 있다. 불완전한 것은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최종적인 종말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이 함축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예언이(그리고 다른 은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4.     종결론자의 견해

 종결론자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요약해 볼 수 있다.

 (1) 회복주의는 교회가 존재해 온 장구한 기간 동안 어떤 은사들이 사라진 것에 대해 설득력 있는 신학적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믿음의 결여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는 성령이 자신의 은사들을 자유롭게 주권적으로 나누어 주신다는 원리를 말하지 않더라도 이전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훌륭한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2) 회복주의자나 연속주의자의 견해를 보면, 초자연적이며 기적적인 것은 모두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이요 규범적인 것이며 따라서 자연스레 연속되고 있다고 어림짐작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사실 성경에서 그러한 특별한 은사들은 성경 역사상 매우 짧은 기간에 제한되어 나타나며, 새로운 계시와 그 대사들을 확정하는 징표로 사용되고, 획기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변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초점은, 이런 은사들이 오직 사도들에 의해서 행사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사도적 복음과 사역의 확증적인 증거로서 독특한 기능을 했다는 점이요, 따라서 주어진 새로운 계시의 신뢰성을 뒷받침하였다는 점이다.

 복음의 기적적인 증명들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의 교회에만 국한된 특별한 것이 아니고, 종결론자의 입장이 워필드의 발명품도 아니고 단지 20세기에 일어난 운동들에 대한 반작용도 아니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릴 때가 많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의 시대에 이 논쟁은 주요 쟁점으로 등장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제기된, 종교개혁에 대한 가장 엄중한 비판 가운데 하나는 그 운동이 전혀 기적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로마 교회는 자신의 교리의 진실성에 대한 주장의 일부 근거를 기적의 증거에서 찾으려 했다. 이에 대한 칼빈의 반론이,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낸 유명한 「기독교 강요」의 헌사에 들어 잇으며, 이는 내용 면에서 볼 때 본질적으로 구속사적인 것이었다. 즉 새로운 언약은 엄청나게 쏟아부어진 기적들로 인하여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적합한 증거이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메시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또 다른 엄청난 기적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4) 어거스틴을 따르는 전통에서 사도 시대에 속한 것으로 보는 개개의 은사들의 견지에서는, 방언 회복론자들의 견해는 특별히 더욱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 말하는 것을, 외국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서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현대의 방언들을 통상 외국어를 말하는 것과 일치시키지 않는다.

 더구나 고린도전서를 제외하고는 이런 현상의 발생이나 통제 규정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8:26)는 구절에 의지하여, 방언의 한 실례를 설명하려는 것은 그것을 확대 해석한 것이다. 탄식은 방언과 다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말로 표현되는 언어와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

 계시에서의 성령의 역사와 조명에서의 그의 역사 사이에 유비점이 있다는 원리가 유용하다. 일례를 들면, 은사 종결론자인 17세기의 신학자 존 오웬은 신약 시대의 어떠한 특별 은사들은 더 이상 교회에 주어지지 않는 반면, 어떤 지속적인 은사들은 그것들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이 모든 은사들과 그 사용이 어떤 면에서는 중단되었지만(그 중 어떤 것들은 완전히 중단되었고, 또 어떤 것들은 그 직접적인 전달 방식 및 탁월성의 정도 면에서 중단되었다) 그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는 그와 유사한 은사들이 과거에 있었고 지금도 계속된다.

 예컨대 사도의 사역과 설교자의 사역 사이에 중요한 유사점이 있다. 마음의 조명은 신약 성경 계시의 저작 과정에서 일어났으나, 성경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중에도 일어난다. 성경, 성령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작용이 위의 두 가지 상황에 모두 개입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유비가 있다고 해서 용어나 개념들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문제점은 부분적으로 범주화의 문제이다. 신학자들은 계시와 조명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하는가의 문제로 오랫동안 씨름해 왔으며, 종종 전자의 범주(계시)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여 왔다. 한편, 신전통주의 신학에서는, 계시와 조명을 합쳐 버리거나 심지어 혼동해서, 계시는 조명이 있을 때 까지는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다른 한편, 은사주의자들은 계시와 조명을 혼동하되 사도적 계시와 그 계시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반응의 차이를 사실상 붕괴시켜 버리는 위함을 안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성경을 떠나서 다른 방법으로 계속된다면, 그것이 결국 정경으로서 기능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복음주의자들이, 이것이야말로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성경 밖의 계시(전통에서)의 연속성 교리의 치명적인 오류임을 자주 지적하였음에도 개신교 안에서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령은 결코 소멸되어서는 안 되고 예언 역시 멸시되어서는 안 된다(살전 5:19-20). 성령이 주시는 모든 조명과 통찰력은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받아야 하며 환영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을 예언으로 규정하는 것은, 완전히 끝난 사역과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혼동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성경의 충분성으로부터 일탈시키는 위험이 있다.

 방언 행위는 널리 인정되는 바와 같이, 심리적인 행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자유롭게 말하는 체험과 달리, 그리스도인의 경우 그리스도 중심의 틀로 해석된 까닭에, 이것이 행복감을 만들어 낸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이것이 사단적인 것으로 간줄될 필요는 없다(비록 어떤 상황에서는 방언 말하는 것이 사단적인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는 영어로 말하는 것보다 더 영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많은 면에서 그보다 못한 것이다.

5.     한 가지 설명?

 우리는 위에서 방언을 다루면서 이 점을 주목해 보았다. 예언의 경우에는, 예언의 계시적인 성격(따라서 실존적으로 정경적인 기능)에 비추어 볼 때, 연속주의자들이 가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통찰력과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실제로 전혀 예언이 아니고, 조명, 곧 오류 가능성이 있는 통찰이자 성경적 진리의 현대적 적용임을 인정하는 것이 더 일관성 있는 태도이다.

 성령 세례의 체험에도 폭넓게 적용되는데, 이 문제는 종종 연속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적인(은사)체험을 부정하는 것을 불필요하다. 단지 그 체험의 해석이 필요할 뿐이다. 회심 이후에 오는 성령 세례를 옹호하는 주장이 지닌 오류는 그 체험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새롭게 강화되는 것, 확신과 희락의 새로운 충만함, 성령의 새로운 충만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중생, 회심 그리고 성령 세례가 일어나는 첫 번째의 성령 충만 때에 영단번에 체험적으로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광범위한 규모로 잘못된 해석이 20세기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체험을 좀더 성경적인 범주에 따라 규정하는 재해석 방법이 정립되면 성령론의 분야에서 좀더 폭넓은 신학적인 조화를 창출해 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삶과 특징 가운데 더욱 큰 안정성과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방향으로 체험과 진리를 결합시킬 것이다. 결국 성령의 모든 은사는 섬김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주어졌다.

6.     성령과 설교

 신약 성경의 은사목록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전파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부여하고 있다.

성령이 역사하는 설교의 증표는 담대함이다. 구약 성경에서 그러하였듯이, 성령이 하나님의 종을 충만케 할 때, 그분은 그의 인격으로 옷을 입으며성령의 권위가 용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가운데 나타난다. 이런 담대함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내포하고 있는데, 곧 자유로운 선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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