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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구원론
-안토니 A. 후크마-
제1장 방향설정
개혁주의 구원론의 강조점
1) 누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가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은 비록 인간의 결정이 중요한 역할을 함은 분명하나,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다.
2)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구원은 그 뿌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두고 있으며 그 계획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인간 편의 어떤 공로를 근거로 해서가 아니라, 전적인 그의 미쁘신 뜻대로 그의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그들을 택하신 것이다.
3) 비록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모든 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그의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초청되었으며, 더욱이 그를 영접하도록 간곡히 권유되어질지라도,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그의 택한 백성(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택함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부여되어지며 그러기에 그의 구속의 은혜는 보편적이 아니라 특별한 것이다.
4) 그러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유효하며 또한 유기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임의로 행하는 신자들일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을 상실토록 허락지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5) 구원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이러한 구원의 적용은 좁은 의미에서 중생과는 구별된다) 비록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포함하긴 하지만 이 구원의 적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로 성령의 역사이다.
개혁주의 신학이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을 강조한다고 해서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p12-13)
1. 역설의 의미
우리는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인간의 책임성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역설이 갖는 양면을 굳게 지킬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성경의 진리들을 바르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기에 하나님께서 우선권을 갖고 계신다. 그런 연유에서, 우리는 구원의 과정 가운데서 궁극적이며 결정적인 요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p18)
2. 상관관계들
구원론은 신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결국에 가서는 구원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일방적이며 배타적인 강조는 컴퓨터가 로봇을 조종하듯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자아낼 것이다. 다른 한편, 인간의 책임성에 대한 전적인 강조 역시, 인간의 결정에 전적으로 종속된 그런 하나님을, 그러기에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냐에 대해서 아무런 통제 능력이 없는자로, 단순히 사람들이 기꺼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만을 기대하며 숨어서 기다려야만 하는 그러한 하나님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기에 구원론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의 이해는 비성경적인 것들이다.(p18)
구원론은 인간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중립의 상태로 태어나기에 중생해야 될 필요성이 없으며, 단지 바른 교육과 좋은 환경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펠라기우스적인 구원론에 이르게 될 뿐이다. 또한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인하여 단지 부분적으로만 부패되어졌으며 그러기에 인간은 죄로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병들어 있으며, 그런 연유에서 먼저 중생되어야 하며, 또한 인간은 그들이 구원을 얻은 후에도 그 구원을 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하는 이 모든 가르침은 반펠라기우스적인 구원론에 속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되어졌으며(그래서 인간은 본질상 죄로 죽은 자들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로 인해 중생되어지며 새 영을 힘입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적인 구원론을 굳게 믿는 자이다.(p19)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교리인 기독론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믿는 자만이 성경적인 구원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믿는 자만이 그 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구세주임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는 칭의론에 대한 이해에 필수적이며, 그의 백성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중보적 역할에 대한 이해 역시 성도의 견인에 관한 교리를 이해함에 매우 필수불가결한 것이다.(p19-20)
구원론은 성령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원론에서 다뤄지는 모든 과정 전체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구원을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시는 그의 사역에 관한 서술인 것이다.(p20)
구원론과 종말론 사이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먼저 우리는 “시작된 종말론”(inaugurated)과 “미래적 종말론”(future)을 구분지어야 하낟. 시작된 종말론이라 함은 신자들이 종말론적인 축복들을 현세적으로 향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스도게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마지막 날들이 시작되었기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성취케 되는 구원의 축복들은 우리가 이미 이생에서 향유하고 있는 종말의 여러 측면들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강림-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사역의 열매-은 현세 속으로 침투한 미래를 말하는 것이었다. 성령을 받음으로 신자들은 다가올 세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새로운 존재양식적 삶에 참여자가 된 것이다. 성령은 첫 열매요(롬 8:23), 미래의 축복들에 대한 보증이며(고후 5:5; 엡 1:14),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증표요(고후 1:22), 우리의 양자됨에 대한 확증이며( 롬 8:15~16),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드러나지 아니할 충만한 부요인 것이다(롬 8:23).(p20-21)
미래적 종말론이라 함은 다가올 종말론적인 사건들에 관한 교리를 말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생에서 우리가 얻는 구원의 축복들은 우리가 다가올 세상에서 얻기를 대망하고 있는 더 큰 축복들의 전조일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한 우리의 구원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현실적인 긴장으로 점철되어진다는 사실이다. 신자는 이미 새로운 세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새로운 존재 양식의 삶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러나 아직도 마지막 단계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죄와 계속적으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언젠가 이 싸움이 끝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제2장 “구원의 순서”에 관한 문제
벌코프 교수는 구원의 순서를 시간상의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인 순서로 기술하고 있으며, 구원과정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다양한 활동들 사이의 상호연관 관계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p23)
1. 세 가지의 다른 접근 방식들
1) 존 머레이(John Murray)
그는 성경으로부터 구원의 명확한 순서가 추출될 수 있다고 믿는다. 머레이는 로마서 8:23로부터 부르심(calling), 의롭게 하심(justification) 영화롭게 하심(glorification)이란 구원의 순서를 추출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순서상 믿음(faith)과 회개(repentance)를 칭의 앞에 그리고 중생(regeneration)을 믿음 앞에 놓을 만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성경의 교훈에 근거한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그는 칭의 뒤에 양자삼으심(adoption), 성화(sanctification), 그리고 성도의 견인(perseverance)을 첨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적인 구원의 순서는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 삼으심,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2) 루이스 벌코프
구원의 순서에 대한 중간적인 입장
그는 부르심, 중생, 돌이킴(conversion; 회개와 믿음을 포함함), 칭의,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
3) 벌카우어(G. C. Berkouwer)
그는 구원의 순서란 개념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워 한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구원의 고정된 순서를 추출할 수는 없으며, 예를 들어 로마서 8:30에서의 바울이 의도하는 바 역시 구원과정에 나타나는 명료한 단계의 순서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믿음은 구원의 여정 속에 있는 하나의 구분점으로 생각되어져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에 널리 편만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단언하고 있다.(p23-25)
2. 어려운 문제들
1) 우리가 구원의 순서를 설정하는 데에 사용하는 용어들이 조직신학에서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경의 저자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중생, 믿음, 돌이킴, 새로워짐 등등의 표현들은 성경 속에서 구원의 여정에서 나타나는 연속적인 단계들을 가리키기보다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전체 과정을 한 단어로 요약시키는 것이다.”
2)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난다는 다양한 단계들의 순서 역시 항상 똑같지 않다는 점이다.
3) 구원의 순서를 정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토대로 사용되어지는 로마서 8:30에서도 이 구절의 주요 목적이 구원의 순서를 정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구원의 순서는 부차적인 목적이다. 바울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누릴 안전과 영원한 축복을 수사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있다.
4) 믿음이 구원의 순서에 나타나는 여러 관계 중 하나의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되어져서는 결코 아니된다. 믿음은 신자의 일평생의 삶을 통해 지속되어지며 수행되어져야 한다. 믿음은 칭의의 단계에서 필수적이듯이 성화와 성도의 견인 가운데서도 필수적이다.
5) 칭의와 성화는 성도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연속의 과정이 아니라 동시에 나타나는 사건들이다.
6) 머레이와 벌코프가 주장하는 구원의 순서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소망이 이들의 순서 속에서는 언급되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컨대 사랑과 소망 역시 믿음 만큼이나 구원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필수적인 것들이다.(p25-27)
3. 우리가 꼭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가?
우리는 연속적인 단계로 나눠질 수 없는 하나님의 단일사역에 대해서, 어떠한 연대적인 순서를 정하려는 시도인 구원의 순서란 개념을 내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구원의 길의 어떤 국면들은 비록 하나님의 능력이기 하지만 인간이 해야하는 것에(믿음과 회개) 주된 관심사가 있는 반면에, 다른 국면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중생과 칭의)에 주안점이 있다. 어떤 국면들은 법정적인 행위(칭의)이나, 다른 국면들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갱생(중생과 성화)이 주안점이다. 어떤 것들은 순간적인 행위들(중생, 위기를 통한 돌이킴과 단회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인 반면에 다른 것들은 지속적인 행위들이다(점진적인 성화와 견인).
요약하면, 구원의 길에 나타나는 다양한 국면들은 뒤의 것이 앞의 것을 대치하는 식의 일련의 연속적인 단계들로 이해되어져서는 안되며, 오히려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다양하면서도 동시적인 국면들, 즉 이 모든 국면들이 시작된 후에도 계속적으로 나란히 지속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p29-30)
후크마는 구원과정을 중생→돌이킴→칭의→성화→성도의 견인 과 같이 일련의 연속적인 경험으로 이해되어져서는 안되며 오히려 구원의 과정은 동시에 시작되어 지속되는 다양한 국면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단일한 경험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도표에서 부르심은 생략되었다. 왜냐하면 복음초청은 실제적인 구원의 과정을 앞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롭게 됨도 이 도표에서 빠졌다. 이것은 종말론의 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과정의 이러한 국면들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발생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비록 중생이 다른 국면들에 대해서 원인적인 우선순위를 갖고 있으나 그것은 시간적인 우선순위가 결코 아니다. 여기서 성화는 점진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뒤에서도 보겠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성화는 단회적 혹은 순간적이기도 하다.(p30-31)
4. 함축된 의미들
1) 비록 중생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처음에서 일어나지만 그것이 주는 여파는 신자가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 되어진다. 또한 믿음과 회개가 시초에 일어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역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행되며 계속 되어져야 한다. 또한 비록 칭의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자마자 일어나지만 칭의가 수반하는 혜택들의 소유를 위한 일평생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성화는 신자의 일평생에 걸쳐 지속되며 죽기 전까지 완료되지 않는다. 믿음 가운데의 인내 역시 일평생의 행위이다.(p31)
2) 구원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국면들은 동시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상호적이다. 중생은 반드시 믿음과 회개로 나타나게 마련이며, 또한 성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믿음은 칭의가 수반하는 축복들을 소유키 위한 수단으로, 또한 성화에서 진전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인내케 하는 수단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생에 걸쳐 필수적이다. 사실상 중생은 이미 견인을 내포하고 있다. 즉 새 생명의 잉태와 함께 갖게 된 새로운 삶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돌이키고서는 믿음에서 인내치 못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듯이, 성화없는 칭의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이다.(p31-32)
3) 배척되어야 될 견해들은, 돌이킴 이후에도 어떤 분명하고도 인진가능한 두 번째 단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자들, 또한 회심에 뒤이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단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자들을 포함한다. 왜 이러한 형태의 구원론들은 배척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미 구원과정에 대한 적절한 이해란 구원과정의 다양한 국면들을 연속적인 것들로 보기보다는 동시적인 것들로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본바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진보된다는 것은 회심 이후에 이르게 되는 어떤 특정한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진적이고도 지속적인 성장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p32-33)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여러 수준의 성숙도가 존재하며, 그러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계속적으로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하나의 분리된 범주로서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한 것이다. 첫째로 이 개념은 두 형태의 그리스도인, 즉 세속적인 그리스도인과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둘째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개념은 돌이킴 이후에도 뚜렷하고도 인지가능한 제 2의 어떤 단계의 필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반드시 일어나야 할 중요한 변화는 제 2의 단계로, 돌이킨 자로 하여금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개념은 그리스도를 주(Lord)로 받아들이지 않고도 그를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다는 의미를 자아낸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그를 주로서 항상 따르는 것은 아니며 그러기에 우리가 그에 대한 순종 속에서 계속적으로 자라나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아만이 여전히 삶의 권좌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약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케 되는 것이다. 넷째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개념이 암시하는 바는 사람이 육체를 따라(혹은 자아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의 성품을 따라) 살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신자들이 육체로 인해 여전히 유혹을 받으며 때때로 육체에 굴복함이 사실이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육신에 혹은 “육체를 따라” 걷고 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되어 질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의 진리와 부합되지 못한다.(p38-40)
그러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교리를 부인한다고 해서 세속적인 삶으로 빠져들어갈 수도 있다는 항존하는 위험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p46)
돌이킴 이후의 절정의 경험(postconversion peak experience)이 “구원의 순서”라는 구조의 틀 속으로 프로그램 되어져서는 안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경험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자녀들을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치는 않으신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삶 속에는 이러한 유의 경험을 받아들일 만한 여지가 항상 남아 있어야 함도 분명하다.(p47-48)
제3장 성령의 역할
1. 우리의 구원과정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할
구원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주된 역할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구원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주요 요소들이 성령에 의해서 발생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전혀 없다.(p50-51)
2. 성령의 은사들
구원과정에서의 성령의 역할을 다루는 또다른 방법은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결코 서로 분리되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P55)
우리는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은 사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 메신저들이요,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증키 위한 “사도의 표징”이었음을 배울 수 있다. 사도들의 사역과 증거가 기초를 놓는 일들이었기에(엡 2:20을 보라), 그런 의미에서 되풀이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사도들을 인증했던 기적적인 은사들은 오늘날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이다.(p59-60)
3. 교회의 치료사역
첫째로 치료는 교회의 정상적인 사역의 일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치료라 함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는 치료를 말한다. 교회가 병자에 대한 치료사역을 교인 가정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병원에서 할 것인가, 혹은 교회 예배 중에 할 것인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사실은 비록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기도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 기도가 반드시 병고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로 이러한 치료사역은 의학적 전문가들의 도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용한다. 소위 신유의 은사를 갖고 있다는 사람들이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바, 의학적 도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 속에서 이미 질병의 치료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을 소홀히 여김이요, 결국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을 나타내는 행위인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기도해야 될 병고침은 단순히 육체적인 병고침 그 이상이어야 한다. 즉 그들의 치유는 영적이며 정서적 측면의 치유와 근심의 제거 그리고 파기된 가족관계의 회복 등을 포함해야 한다.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요청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의 기도제목 즉 육체의 병고침 뿐만 아니라 뿌리깊은 죄의식 문제의 해결, 개인적인 슬픔의 치료, 자신의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등의 제목을 갖고 오도록 격려되어야 한다. 교회의 치료사역의 목표는 다름 아닌 전인적인 치유이다.(p74)
4. 성령의 열매
많은 성령의 은사를 갖지 못해도 구원받을 수 있으나, 성령의 열매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p76)
성령의 열매가 하나라는 사실은 또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영적인 성숙도가 높아간다는 것은 단편적으로 이번에는 이 열매를 다음에는 저 열매를 맺는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적인 성숙은 자신을 끊임없이, 또한 전폭적으로 성령께 내어 맡김으로, 매일 그리고 매시간을 성령 안에서 걷고 살아감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함께 어우러진 이 모든 열매 속에서 자라날 수 있게 될 것이다.(p76)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단회적이며, 극적인 특정한 시간상의 사건이나 혹은 소위 “두번째의 축복”을 경험하는 사건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영적인 성장의 지속적인 과정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이 성장은 자라나는 과정 속에서 우리 자신들을 수동적인 자세로 머물게 하는 그러한 성장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성장은 일평생 동안 지속되는 기도와 신뢰의 훈련이요, 영적인 전쟁인 것이다.(p77)
5. 성령세례
고린도전서 12:13에서 바울은 성령세례가 중생을 뒤잇는 사건이요, 그러기에 중생과는 구별되는 경험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될 사건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옷누절 계통의 가르침과 함께 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라는 진리 이상의 대답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이 진리를 증명하고자 여기서 이렇게 확언하고 있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약관화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여기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함이 중생-즉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이요, 이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었고 그의 몸이 되었음-과 동일한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p84)
6. 성령의 충만
중생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충만함 가운데 계속적으로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p85)
성령충만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은 다음 세 가지 형태의 경험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1) 신자들은 특별한 임무를 감당키 위하여 특별한 성령의 충만을 언제라도 구할 수 있다. 2) 우리의 목적은 그 임무를 행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관찰하면서 우리가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3) 우리 모두는 마땅히 계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p86)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성령충만은 과격한 감정주의나 특별한 현상(본 구절에서는 방언으로 말함이나 병고치는 은사들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음을 주의하라)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과 같은 행동 패턴이라 할 수 있다: 1)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고 서로에게 덕을 세우는 일; 2) 우리의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어 주께 드리는 일- 즐거운 내면적 성향이라 할 수 있다; 3) 항상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 4)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부터 나오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들을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복종시키는 일.(p87)
제4장 그리스도와의 연합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될 때 비로소 구원에 이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만이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신약은 이 놀라운 진리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될 수 있다는 진리를 두 가지로 기술하고 있다. 믿는 자들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가르친다.(p92)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의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더욱이 이 연합은 역사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행하셨던 구원역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마침내 이 연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 위에 태어난 이후 그들에게 실제로 적용되어졌으며, 그들의 평생에 걸쳐 지속되며 다가올 세상에서 그들이 온전히 영화롭게 될 때까지 계속 되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그 뿌리를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두고 있으며, 그 근거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두고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실제적 적용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p93)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들
에베소서 1:3절에 비춰볼 때 “그” 안에라 함은 그리스도를 말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라 함은 우리가 얻은 구원의 은혜로움, 즉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택하셨으되, 그가 우리 가운데서 미리 아신 바 된 어떠한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도록 정하신 그의 뜻에 따라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더욱이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함은 우리 택정함을 입은 것이 결단코 그리스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의 연합은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사 그의 소유삼으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 속에서 이미 계획되어졌던 바이다.(p95-96)
2.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근거
요한복음 10:26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그를 에워싼 불신앙의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여기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무리에 속해 있지 않다라는 증거로써 인용되고 있다. 이 말이 그들 중 어떤 이가 후에라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라는 뜻을 꼭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p97)-약간 모순이라고 생각함 잘 이해가 안 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그의 친백성이요-영원토록 그에게 속해 있는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사역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공로적 근거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소유된 자들의 실제적 연합이 가능케 된 것은 오로지 우리의 구세주가 그의 백성을 위해 이 모든 일들을 행하셨다는 이유 때문이다.
종종 얘기하듯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비록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만 유효하긴 하지만, 능히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하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p99)
3.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연합
1) 우리는 제일 먼저 중생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다. 성령께서 먼저 그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산연합에 이르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한때는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이제 영적으로 새롭게 살리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간의 연합이 실제로 성취되는 것은 중생의 시점임을 알게 된다. 이 연합은 우리 구원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이 연합은 구원의 전 과정을 지탱해 주며, 채워 주며 온전케 한다.(p99-101)
2)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이 연합을 소유케 되며, 이 연합을 통해 계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이미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우리를 이러한 생명의 연합에 이르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나, 이 연합을 소유하며 계속적으로 향유할 수 있음은 믿음을 통해서만이다.(p101)
믿음을 통해서만이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을 인식케 되며, 그 내주하심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자각하며 사는 매일의 삶을 의미한다.(p102)
3)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칭의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와 의를 부여하심으로 그들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온전히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p102)
때때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단순히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다”라는 식의 완전히 비인격적인 무감각한 방식으로 생각해 버리려는 유혹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속전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생각지 않은 비인격적이고 무감각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또한 발견케 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인격적인 방법으로서만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내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그렇게 됨으로 또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p103)
4)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거룩케 된다. 점진적 의미의 성화는 성령께서 믿는 자의 삶을 점진적으로 새롭게 하시며,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성화라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개성을 잃어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이 성화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재능과 여러 능력들이 점진적으로 다듬어지고, 발전되며, 순화되어 우리의 최상의 모습을 이룬다는 것이다.(p104-105)
5)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통해 믿음의 삶을 견디어 낸다. 이 견인의 축복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이 경험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p106)
6) 심지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로마서 14:8에서 바울은 우리가 주를 위하여 죽는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리가 계속적으로 주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p107)
7)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을 받을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믿는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살아남을 받은 자들이다.(p107)
8)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영화롭게 되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미래의 영화로움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영화로움을 함께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p108)
4.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중요성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사역의 두 개의 중요한 측면 사이이서 균형을 잘 잡도록 도움을 준다; 아마 법적인 측면과 역동적인 측면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터툴리안이나 안셈과 같은 신학자들로 대표되고 있는 서방측 기독교회는 그리스도 사역의 “법적”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죄의 측면에 대해 이런 신학자들이 강조하려는 부분은 죄책이었고 이 죄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죄를 통해서 제거하셨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죄책에 대한 만족을 성취시키고 우리의 빚을 갚으셨다. 따라서 두드러진 구원론적 축복은 칭의이며 교회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은 수난 금요일로 생각되었다. 한편 이레니우스와 아타나시우스와 같은 신학자들로 대변되는 동방교회는 그리스도 사역의 “생동적” 혹은 “삶을 같이 하는” 측면에 강조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신학자들이 강조하는 죄의 측면은 오염인데 이 오염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와 연합함으로써 제거하셨다. 특별한 구원론적 축복으로는 성화를 들며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축제의 날은 부활적이었다. 서방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적 혜택은 죄를 용서받는 일로 간주된 반면에 동방교회에서는 영원한 생명이었다. 서방교회에서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에 강조를 두는 한편 동방교회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축하하는 경향이 있다.(p112)
제5장 복음의 초청
개혁주의 신앙을 지켜온 교회들이 변함없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창조 이전에 그의 백성을 택하셨다는 무조건선택론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자들의 죄를 사하셨다는 제한속죄론의 교리를 지지해 왔으나, 이 교회들 역시-간혹 몇 교회를 제외하곤-복음의 초청은 누구든지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보내져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다.(p114)
1) 복음의 진상과 구원의 길의 제시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일은 명확하고도 조심스럽게 제시되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살마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를 통해 전달되어야 하며 현시대의 필요와 문제점들에 상관이 있는 방법을 통해서 전달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현실적인 접근방법을 취한다 하더라도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에 충실해야 한다. (p115)
2)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라는 초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죄의 심각성을 축소해서는 안된다. 반면에 더욱 강조해야 할 것은 진실된 회개의 중요성이다.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할 것은 믿음이 어떤 진리에 대한 지적 동의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그 분의 사역에 대한, 사명감을 동반한 전 인격적인 그리스도의 받아들임이라는 것이다.(p116)
복음의 초대는 누가 볼링치러 가자는 초대처럼 응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요, 만물의 주로부터 내려진 구원을 위해 그에게 오라는 명령인 것이다. 이 명령에 대한 거절의 값은 오직 영원한 멸망이다.(p116)
기성교회 교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로의 초대를 권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헤르만 바빙크가 말하길 잘 균형잡힌 설교는 언약적 중요성과 복음전도적 중요성을 함께 연합하여 강조할 수 있는 설교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p116)
3) 용서와 구원의 약속
누구든지 복음초청에 응하는 사람은 죄의 용서와 주님과의 교제속의 영원한 삶을 얻는다는 약속이 반드시 복음초청의 내용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약속은 회개하고 믿을 때에만 용서와 구원을 받는다는 조건적 약속이다. 내가 복음초청에 포함된 약속이 조건적이라 칭한다 해서 이 조건이 인간 자신의 힘으로 실행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이 복음초청을 듣는 자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게 하실 수 있다.(p117)
1. 복음초청은 듣는 사람 모두를 초대한다.
첫째는 복음초청이 일반적이며 보편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듣는 자 모두에게 전달된 초대라는 것이다.(p117)
2. 복음의 초청은 진지하게 의도되었다.
훅스마의 견해를 요약하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달된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원하시지는 않는다; 오직 선택자만이 구원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정말로 제공하는 것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p122-123)
이 점에 관해 미국 기독개혁교단은 훅스마의 주장을 문제 삼아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와 동의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결정하였다: 복음의 전파행위는 설교자의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의하는 좋은 의도로 행해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복음초청이 전달되는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진지하고도 간절하게 원하신다.(p123)
3. 좋은 의미로 의도된 복음제시와 돌트신경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진지하고 성실하고 위선없이 그리고 가장 진정으로 복음이 간 모든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부르신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 사실을 표현함에 있어서 우리는 심지어 기꺼이 당신들의 문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동일한 용어마저도 사용한다: “진지하게 부르심을 받은” 그러나 우리는 좋은 의도로 제시된 복음의 초청과 또 한편으로 선택과 제한속죄교리를 다함께 수용하고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잘 의도된 복음 초청을 확신하기 위하여 선택교리와 제한속죄교리를 배격해야 할 하등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p131)
4. 합리적 해결을 피하여
1) 하나님은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사람들이 진심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얻기에 충분한 은혜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 은혜는 언제라도 거절될 수 있다.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절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의도를 좌절시키게 된다. 이것은 알미니안적 해결방법인데,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주권적이 아니시며 따라서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진리를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2) 또다른 형태의 합리적 해결방법은 훅스마와 초칼빈주의자들의 견해이다: 성경이 분명히 선택과 유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달된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바라신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은 자들 중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셨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식의 제안은 우리의 생각에 만족을 주는 듯하긴 하지만 에스겔 33:11; 마태복음 23:37; 고린도후서 5:20; 베드로후서 3:9 등과 같은 성경과 정면으로 충돌 된다.(p132)
그러므로 이러한 두 가지 합리적 방향 모두를 배격해야 한다. 성경은 영원한 선택과 잘 의도된 복음초청 모두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비록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이 둘을 잘 조화시킬 수없다 하더라도 모두 받아들여 붙잡아야 한다.(p132)
제6장 효력있는 부르심
어거스틴과 그의 신학적 전통에 따르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복음초청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아닌(물론 인가의 의지가 복음초청에 응답하는 과정에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 속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듣는 자의 마음을 여시거 믿게 하시지 않는 이상, 사람은 결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여시는 일을 가리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내면적” 부르심 혹은 “효력있는” 부르심이라 불러왔다.(p136)
1.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한 성경적 기반
유효적 부르심이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의 초청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p145)-성경적 근거를 제시한 것들이 많이 있다.
2. 효력적 부르심의 목표들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부지런한 참여를 요구한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의 열매들이긴 하지만, 우리의 전적인 책임성을 요구한다.(p146)
3.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유효적 소명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종종 복음의 부르심과 효력있는 부르심을 한 부르심의 두 가지 측면 혹은 양면이라고 말하였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외적(혹은 복음의) 부르심을 통하여 전파되게끔 하시는 말씀이나, 내적(혹은 효력있는) 부르심을 통하여 성경에 의해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시는 말씀이나 동일한 한 말씀이다.”(p149)
4. 반대 의견들에 대한 고찰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한 교리는 결코 복음전도나 선교의 열기를 방해하거나 저하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격려의 자극제와 원천이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말씀의 전파와 교육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p150-151)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효력적으로 부르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복음의 배척은 항상 인간이 믿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p151)
만일 오늘날 인간의 자연적 상태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중립적이어서 자기 좋을 대로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다고(펠라기안의 견해) 믿는다면, 당신은 더욱더 유효적 부르심이나 중생이 별로 필요치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자연적 상태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병들어 있지만 그래도 복음의 초청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면(반페랄기우스주의적 견해) 당신은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만일 비록 우리 부분적으로든지 전적으로든지 부패하긴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충분한 은혜를 주시어서 누구든지 복음의 초청을 받은 자마다 다 이 충분한 은혜와 협력하여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면(알미니안의 견해) 당신은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성상 전적으로 죄 가운데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다시 영적으로 살아나도록 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우리가 복음의 초청에 대해 긍정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개혁주의 견해) 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절실하게 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한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p152-153)
제7장 중생
1. 세 가지 의미에서의 중생
성경은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연관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1)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의 중생이다(요 3:3,5); 2) 심겨진 새 새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약 1:18; 벧전 1:23);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마 19:28; KJV, ASV, NASB 참조). 마지막으로 언급된 구절에는 팔링게네이시아(palingenesia)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위에서 언급된 영어 번역본에는 중생 혹은 거듭남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는 디도서 3:5에만 사용되고 있는데 온 우주가 새롭게 갱신되는 것을 칭하고 있다. 즉 베드로후서 3:13과 요한계시록 21:1~4에서 말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p156)
본장에서 나는 위에서 언급된 의미들 중 첫 두 가지의 의미들만을 다룰 것이다. 초기 개혁신학에 있어서는 중생이란 단어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의미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칼빈은 중생을 우리가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돌이킴과 성화를 포함하여-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561년의 벨직 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17세기 신학자들 역시 중생을 돌이킴(회심, 개종으로 구체적으로 번역함)과 동일시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중생(위의 1)의 의미)과 넓은 의미의 중생(위의 2)에 해당)을 구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성령에 의해 새로운 생명이 심기워지는 것과 돌이킴을 통하여 새 새명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과의 구별이다.(p156-157)
나는 일차적으로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의미를 다루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볼 때 중생이란 성령의 사역이라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사역을 통하여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시사 그들로 하여금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으나 이제는 영적으로 살아나게 하여 죄를 기꺼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며, 주님을 섬기도록 하게 하신다.(p157)
2. 인간 부패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타락한 인간본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의 지도 아래 중생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중생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역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p159)
3.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요한복음 3:3절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중생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중생은 육체적 출생에서와 같이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건이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출생은 위로부터 온 것으로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행위자에 의해 가져온 것임을 3절로부터 배울 수 있다.(p162)
요한복음3장 5~8절을 요약하여 말하자면, 중생을 이루시는 신적 행위자는 성령이시며, 이러한 신생을 통해 얻어진 새생명은 단순히 생물학적 목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비록 중생이 신비롭게 발생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열매들을 봄으로써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p164)
바울은 중생은 성령의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활동의 열매이며, 이 열매는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새로운 창조세계의 한 부분인 것을 의미한다.(p165)
베드로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중생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새 생명의 시작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을 바라보게 하는 영광스런 전망대 역할을 하게 된다.(p165)
요한일서로부터 우리는 중생한 자가 다음과 같은 특성으로 옷입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특성이란 옳은 일을 행하며, 죄 가운데 계속적으로 살지 않으며, 동료 신자들을 사랑하며,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으며, 계속적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들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묻기를, “내가 거듭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거든, 그 사람은 먼저 위와 같은 증거들을 갖고 있나 살펴보라고 조언을 해주어야 한다.(p168)
4. 중생의 본질
1) 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점진적인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으나 순간적임에는 틀림없다.(p169)
2)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이다: 알미니안들(처음에는 레몽스트랑트:Remonstrants라고 불리움)은 중생이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이루어지는 변화라고 돌트총회(synod of Dort)에서 주장하였다. 이 돌트회의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펠라기우스주의이며 비성경적이라고 배척하였다.(p170)
3) 중생은 근본적(radical) 변화이다. “근본적”(radical)이란 영어는 라틴어 “우리”(radix)로부터 유래되었는데, 중생은 우리 본성의 뿌리부터 변화됨을 뜻한다.
a) 중생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이식”을 의미한다.
b) 중생은 한 인격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변화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죄된 성향성들이 제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생한 사람은 새로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것은 아니다.
c) 중생은 의식 밑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중생시에 일어나는 변혁이 너무도 근본적이라서 우리라는 존재의 무의식의 뿌리로부터 변화가 있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에 있어서 인간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다.(p171-173)
5.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나는 첫 번째 반대 의견에 대해 이미 유효적 부르심을 다루면서 취급한 일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마저도 무시하고 침범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는 본성상 죄 가운데서 죽었으므로 우리의 의지마저도 새롭게 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 섬김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일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행위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숨이 멎은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다: “불가항력적 은총”이란 용어는 칼빈주의자들이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 용어를 사용한 자들은 돌트총회 때(1618~19)의 레몽스트랑트(알미니안들)들이었는데 그들은 이 용어를 카톨릭의 예수회파로부터 빌려 중생에 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특징짓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철벽같은” 혹은 “정복될 수 없는” 은혜라고 불렀으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는 “최종적으로 정항될 수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실상 거역될 수 있으나 세상의 창조 전부터 구원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p174-175)
6. 중생과 다른 교리와의 관계
1) 중생과 효력적 부르심과의 관계: 어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중생과 효력적 부르심과를 구별하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루이스 벌코프는 효력적 부르심은 좁은 의미의 중생을 뒤따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죤 머레이는 효력적 부르심이 중생을 선행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협의의 중생을 효력적 부르심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려 한다. 이미 17세기의 신학이 이 두 가지를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이 사역을 통하여 복음초청을 듣는 자들이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과 별다를 바가 없다.(p175-176)
2) 중생과 돌이킴과의 관계: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은 돌이킴(회심, 개종)과 동일시될 수 없고 구별되어야 한다. 중생은 돌이킴에 이르게 된다(즉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다시 말해서 돌이킴은 중생이 일어났다는 외형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사도행전 16:14절의 루디아의 경우에섯처럼, 중생과 돌이킴은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원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생이 돌이킴보다 “앞선다”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주신 후에야 비로소 사람은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다.(p176-177)
3) 중생과 성화의 관계: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 두 가지는 동일하다. 앞으로 보겠지만, 성화는 단회적(definitive)이다. 단회적 성화는 한 순간에 일어난다. 어떤 특정한 한 순간에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물론 죄없는 완전한 상태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성화가 이해되어질 경우 중생과 성화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생각되듯이, 성화는 평생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성화를 이해하게 되면 중생이란 성화의 출발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중생은 점진적 성화의 첫 번째 단계이다.(p177-178)
중생은 사회적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흔히 “거듭난다”는 말을 개인주의적 의미로 “개인 구원”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중생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도록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중생은 공동체적 사회성을 지니고 있고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여러 가지 내용이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중생의 사회성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한 일원들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p178)
4) 중생과 세례와의 관계: 신약성경은 종종 세례를 새로운 영적 생명과 관련을 맺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세례를 중생이 부여될 때 수단으로 사용되는 도구로 간주하지 않는다. 세례는 우리의 중생에 대한 증표와 인이라 생각되어진다: “세례는 신약성경의 성례이다. 이 성례를 통해 세례는 세례받는 자에게 은혜의 언약, 또 그가 그리스도께 접붙임바 되었다는 사실, 중생했고,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 가운데 걷게 된다는 증표와 도장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세례는 자동적으로 중생을 가져오지 않는다. 세례는 중생의 축복들을 그려주고(증표로서의 기능) 확인해 준다(인으로서의 기능).(p180)
7. 중생과 설교자
설교자는 중생의 교리를 어떠한 식으로 다루어야 하는가?
중생은 일반적으로 설교시나, 성경을 가르침받는 동안, 성경을 읽을 때 등에 일어난다. 넓은 의미의 중생은 성경을 통한 설교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돌트신경에는 복음을 가리켜 “중생의 씨앗”이라고 부르고 있다. 설교자는 청중들에게 중생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청중들에게 복음을 믿고 죄로부터 회개하라고 외쳐야 하는 것이다. 설교자들도 하나님께서 그의 청중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복음에 반응하도록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또한 청중들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힘을 주시어 믿는 마음으로 전파된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p181-184)
제8장 돌이킴(Conversion)
1. 돌이킴이란 무엇인가?
돌이킴이란 거듭난 사람이 의식적인 행동을 통하여 회개와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돌이킴은 두 가지 돌아섬을 의미한다: 하나는 죄로부터의 돌아섬이며 또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에로의 돌아섬이다.(p187)
2. 돌이킴: 하나님과 사람의 일
돌이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역이다. 돌이킴(개종)의 두 가지 측면인 회개와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들이다.(p188)
좁은 의미에서, 돌이킴을 거듭남(중생)으로부터 구별짓는다면 돌이킴은 사람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신구약성경을 통하여 돌이킴은 하나님의 사역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사역으로 종종 묘사되곤 한다.(p189)
돌이킴은 하나님의 일인 동시에 사람의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셔야 한다. 그러나 우리도 그 분에게로 돌이켜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진리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부지런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그의 청중들에게 돌이키라고 외쳐야 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하실 것을 믿으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p190)
3. 여러 가지 형태의 돌이킴
진정한 돌이킴은 단회적 사건이다. 성경은 이따금씩 소위 민족적 개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시적 개종이란 것도 있다-진정한 회심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또다른 종류의 개종으로 우리는 제2의 회심을 말할 수 있다. 진정한 돌이킴은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것이지만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나가 있다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경우가 있을 수 있다. (p192-193)
4. 돌이킴 형태의 다양한 변형들
돌이킴의 유형들은 다른 측면에서도 설명되어질 수 있다. 비록 돌이킴이 한 사람의 전 인격이 관영되는 일이긴 하여도 주로 지, 정, 의에 관계하고 있다. 주로 지성적인 개종의 좋은 예가 루이스(C. S. Lewis)의 경우이다. 의지적인 개종의 좋은 예로는 어거스틴(Augustine)을 들 수 있다. 그 본성상 주로 감성적인 개종의 예로는 죤 번연(John Bunyan)을 들 수 있다.(p195)
회심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구별은 점진적인 돌이킴과 급진적, 위기적 돌이킴이라 할 수 있다. 급진적인 회심의 가장 좋은 성경적 예는 바울이다. 루디아의 회심과 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개종 역시 위기적 형태의 급진적 돌이킴이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자녀들이 겪는 회심은 일반적으로 급진적인 위기심보다는 점진적인 형태의 회심이라 할 수 있다.(p196-197)
제9장 회개
1. 회개의 중요성
신약성경이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시작하여(마 3:2) 회개의 촉구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은(계 3:19)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p201)
2. 회개와 믿음과의 관계
실제적으로 우리는 어느 것이 우선인지 말할 수 없다. 회개가 믿음과 구별될 수 있고 또 마땅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중생(거듭남)으로부터 나오며 돌이킴(회심, 개종)의 두 가지 측면들이라 할 수 있다.(p203)
3. 단어 연구
회개에 해당하는 구약의 단어는 “니함”(nicham), “수브”(shubh)이다 니함은 나함이란 동사의 니팔형인데 “유감스럽게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잘못에 대해 회개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수브는 “돌이킨다”, “반대 방향으로 가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어 간다는 뜻이다.(p204-205)
회개에 해당하는 신약 원어로는 “메타노이아”(metanoia)와 “에피스트레포”(epistrepho)가 있다. “메타노이아”의 동사형은 “메타노에오”인데 칠십인경(구약성경의 헬라어역본)dms 히브리어 “니함”을 이 단어로 번역하였다. 반면에 “에피스트레포”는 히브리어 “수브”의 헬라어 번역 단어라 할 수 있다. 두 단어 사이를 엄밀하게 구별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겠지만 일반적으로 “메타노이아”는 회개의 과정 중 내면적 변화를 지칭하며 “에피스트레포”는 내면적 변화가 외형적 생활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를 가리키는 단어라 할 수 있다.(p205)
“메타노에오”는 너무도 감정적인 변화에 강조를 두고 있는 인상을 준다. 즉 지나간 죄에 대한 슬픔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챔버래인(Chamberlain)은 이러한 번역이 가져온 영향들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적당치 못한 번역은 많은 유럽과 북미주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잘못된 음조에 맞추어 노래하도록 하였다: 후회, 유감, 탄식, 자책 등이 마치 경건한 경건의 특성들인양 간주되어 왔다.”(p206-207)
안트-깅그리히 헬라어 사전은 “메타노이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마음의 변화, 회개, 돌이킴, 바꿈…대부분의 회개의 긍정적인 측면이며 새로운 종교적, 도덕적 삶의 출발이다.” 그러므로 “메타노이아”는 단지 악한 행동들로부터의 돌아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새로운 방향에로의 돌아섬이다.(p207)
챔버래인은 회개에 관한 풍부한 성경적 의미들을 발전시키고 있는데, 회개는 소망과 기대 가운데 앞을 바라다 보는 것인 반면에 후회와 유감은 단지 수치 속에서 뒤를 돌아다 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p208)
회개에 해당하는 신약의 또다른 단어로 “에피스트레포”가 있다. 이 단어는 행동의 전적 변화, 사람의 생활양식의 전환, 온전한 돌아섬을 묘사하는 단어이다.(p209)
신약에서는 이 두 단어 중 한 가지만을 쓸 때도 있고 동시에 함께 사용할 때도 있다.(p210)
4. 회개의 개념
회개란 중생한 사람이 온전한 삶의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반영하면서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하는 의식적인 돌아섬이라 정의를 내릴 수 있다.(p210)
회개는 단일적인 경험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회개는 여러 부분들로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다음과 같은 측면들은 구별될 수 있다.
1) 지적인 측면: 참된 회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엄섬을 아는 지식을 포함한다. 회개는 마땅히 우리 자신의 죄와 죄책을 인정하는 일과 우리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법을 범하였음을 고백하는 인식이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죄를 기꺼이 사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자비하심에 대한 이해를 수반해야 한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 지식이 없이는 공포와 절망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p210-211)
2) 감정적인 측면: 단지 죄의 결과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죄 그자체에 대한 가슴저리는 슬픔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죄에 대한 비탄에 또한 기쁨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한 기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쁨, 다른 사람과 갖는 교제를 인한 기쁨들이 그것이다.(p211)
3) 의지적인 측면: 죄로부터의 내면적인 돌아섬과 용서를 추구함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목적과 동기의 변화도 있어야 한다. 내면적인 변화는 반드시 외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p212)
5. 회개: 하나님과 사람의 일
성경은 회개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인간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토록 촉구하는 것이 설교자의 엄숙한 의무이다. 회개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주권적으로 부여하시고 그들로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p213-215)
6. 회개는 한평생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반부에 있는 처음 회개와 그뒤 평생토록 계속되어지는 회개 사이에 구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로 평생에 이르는 의미에서의 회개가 근본적으로 성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회개는 결코 우리에 의해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p217-218)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회개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공로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들 때문이다.
제10장 믿음
1. 믿음의 중요성
믿음은 회개와 함께 돌이킴의 본질적 측면에서 구원의 필수 요건이다. 믿음은 우리가 구원받는 방법이며(롬 10:9) 확실한 소망으로 가는 길이다(히 11:1). 우리가 부활할 때까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보호를 받는다(벧전 1:5).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의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2. 단어 연구
믿음이란 메시지를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또한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서 안식하며 그를 의지하는 것을 포함한다. 신앙은 증거하는 사도들이나 다른 자들의 증거의 근거가 참된 체계로 받아들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구속주로서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p222)
3. 여러 성경 저자들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 믿음
구약시대에는 오실 구속주를 기대하는 믿음이었고 신약시대에는 이미 오신 구속주를 회고하는 믿음이라 할 수 있으나, 양자 모두에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산 믿음을 통해서만 획득되었다.(p226)
4.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언급된 믿음
6. 칼빈의 견해
죤 칼빈은 믿음에 관한 스콜라주의적 견해를 맹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믿음을 단지 찬동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나 교회의 가르침들에 대한 참된 이해가 없이 맹목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단지 “맹신적 믿음”으로 생각한다는 그런 믿음의 개념을 거절한다. 그는 말하기를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 특히 그 분의 자비를 아는 지식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진리에 기초한 것으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에 계시되었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진 것이다.”(p230)
7. 믿음의 개념
믿음의 여러 측면은 비록 분리될 수 없으나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1) 지식. 성경은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p232-234)
2) 찬동이다. 찬동이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들을 참되다고 확고히 받아들이는 행위를 뜻한다.
3) 신뢰이다. 믿음은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신뢰에는 순종이 또한 포함된다는 것을 첨가시켜야 한다. (p234-235)
8. 믿음의 중심적 신비
믿음의 중심적 신비란 의미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1)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의 열매이다.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는 분이다.(p236-239)
2) 인간의 행위로서의 믿음- 비록 복음을 믿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지만 우리의 믿음이란 전혀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p240)
9. 구원의 확신
벌카우워는 로마교회가 구원에 대한 확신을 부정하는 것이 로마교회의 구원관과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로마교회는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인간의 선행에 의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복으로 생각하기에 신자에게 당신은 당신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음이 확실하다.(p242)
이제 확신의 문제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 유형의 구절들을 살펴보자.
1) 이상적으로 믿음은 확신을 수반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들: 히 11:1, 요일 5:13
2) 참 신자들도 때때로 확신이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들: 마 6:30; 8:26; 눅 17:5 막 9:24
3) 구원에 대한 더 큰 확신으로 성숙해야 할 필요를 보여주는 구절들: 벧후 1:10 롬 8:16(p245-246)
제11장 칭의
1. 단어 연구
디카이오오는 “의롭게 하다”가 아니라 “의롭다, 선포하다”는 뜻으로 이 사람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디카이오오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는 죄인에게 법적으로 전가하는 것으로 사용한다.(p253)
2. 칭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3. 칭의에 대한 로마교회의 견해
1) 트렌트 신조에 일치한 로마교회 신학에서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킨 선포적 행위로써 보다는 인간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본질에 변화를 주는 은혜의 주입으로써 주로 생각된다.(p266)
우리는 칭의에서 죄의 제거와 성화에서 갱신을 말하나 트렌트 신학에서는 성화와 갱신을 칭의의 국면으로 생각한다.(p267)
2) 그러므로 믿음은 칭의에 있어서 중심적 의미가 아니라 부차적이다. 트렌트 신조의 가르침에서 진실로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세례인 것이다.(p268)
3) 칭의의 은혜는 한 번 받으면 다시 잃지 않는다. 그러나 트렌트 신조는 이것에 반대하여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한다. 칭의는 도덕적인 죄를 범할 때 사라지나 믿음은 그 죄가 불신의 죄가 아닌 한 사라지지 않는다.(p269)
4) 칭의로 받은 의 또는 의로움은 향상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칭의를 받았다 또는 안받았다고 말하거나 만약 그 사람이 칭의를 받았다면 칭의 가운데서 성장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트렌트 신조는 신자들이 칭의 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p269)
5) 칭의는 신자들로 하여금 영생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공로가 된다. 트렌트 회의는 의로운 자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영생이 보장된다고 가르친다.(p270)
4. 개혁주의 고백서들에 나타난 칭의
5. 칭의의 개념
1) 칭의의 교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실상”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범했던 그리고 여전히 범하고 있는 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져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깨닫지 못하고서는 우리가 칭의되어야 할 필요성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p282-283)
2)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 혹은 “법적인” 행위이지 어떤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 혹은 선고하시는데 우리 자신들이 사실상 어떤 존재냐는 것에 의거하지 않고, 또 우리의 착한 행실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하신다. 칭의는 과정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단 한번 일어난다. 그렇지만 신자는 끊임없는 믿음의 실천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칭의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9p283-284)
3)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으며 우리 자신들의 선한 행위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롬 3:28). 많은 신자들은 자신들이 칭의된 사실을 계속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여전히 죄에 빠지곤 하는 그들의 체험이 칭의된 사실을 거짓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에 의하면 끊임없이 죄로 굽어지는 우리의 본성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칭의에 대한 확신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다.(p284)
4)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일 뿐이다.(p285)
5) 칭의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자리를 바꾸어 우리의 신분과 입장이 되신 것과 우리가 받아 마땅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 대신 받으신 것을 포함한다.(p285)
6)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을 포함한다.(p287)
7) 칭의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함께” 나타난다.(p289)
8) 칭의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다 가지고 있다. 소극적인 면에서 칭의는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한다. 적극적인 면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입적되는 것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권리를 받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p290)
9) 칭의는 “종말론적인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날 우리에게 선고하실 판결을 현재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 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졌기 때문이다(요 5:24).(p290)
10) 칭의가 “성화로부터 절대 분리되어서는 안되지만” 이 두 복은 “서로 구별된다.” 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된 결과들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면 반드시 동시에 성화의 과정,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을 통하여 우리가 당신의 형상을 점차적으로 닮아가도록 만드시는 이 일에 우리가 몰두하게 된다.(p290-291)
다음과 같은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들이 인식되어야 한다.
a) 칭의는 죄에 대한 책임을 제거하는 반면 성화는 죄로 인한 오염을 제거하여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자라갈 수 있도록 한다.
b) 칭의는 신자의 밖에서 일어나며 신자의 법적 신분 혹은 법정에서의 상태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선고이다. 그러나 성화는 신자의 안에서 일어나며 점진적으로 신자의 성품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c) 칭의는 평생에 단 한번 일어나며 어떤 과정이나 반복되는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성화는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생애에 걸쳐서 계속되는 과정이며 현생이 끝나기까지 완성되지 않는다.(p292)
6. 칭의의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
우리는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 때문에 정죄받은 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칭의될 때 하나님과 우리의 법정적 관계는 유죄에서 무죄로 바뀐다. 이런 법정적 변화의 소극적인 면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거나 사면받는 것이다.(p293)
칭의에서는 어떤 죄들이 용서되는가? 원죄의 책임까지를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의 죄들만 용서되는가? 혹은 미래의 죄까지 용서되는가? 어떤 개신교 신학자들은 신자들의 모든 미래의 죄까지 칭의의 때 용서받는다는 생각을 반대해 왔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그런 가르침이 신자들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문란해지고 죄와의 싸움에서 게을러지도록 만들 것을 염려해서이다.(p293)
만약 우리가 단번에 칭의된다면 왜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죄들을 고백해야만 하는가? 반면에 우리가 매일 죄들을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이것은 미래의 죄들은 우리의 칭의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p294)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하신다는 말에는 어떤 반대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신자의 미래의 삶도 펼쳐진 책과 같이 하나님 앞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p295)
신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칭의라는 것이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들을 용서하는 것을 의미하며, 미래의 죄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p296)
칭의는 그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양되는 것과 영생의 권리를 부여받는 것을 또한 품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두가지 성격을 살펴야 하는데 보통 그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일컫는다. “수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는 17세기 루터파와 개신교 신학자들의 라틴어 저작물들에서 비롯되었다. 그들 중 하나인 요하네스 볼레비우스(johannes Wollebius)는 수동적 순종이라는 표현을 “고난을 받다”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동적 순종을 결국은 십자가에 죽게 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나는 “고난받는 순종”이라는 용어를 쓰기를 좋아한다.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율법준수의 순종”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p297-298)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난받는 순종을 통하여 우리의 죄들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셨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갈 3:13, 롬 3:24~26; 5:8~10과 비교해 보라). 그렇게 해서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는 공로를 이루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율법준수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적되는 권리와 영생을 누릴 권리를 획득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입어서는 안되는 것은 고난을 감당하는 것과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하나의 순종해위의 두 국면들이라는 사실이다.(p298)
7.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됨
양자됨이란 말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의 신분에 놓여져서 그 신분에 수반되는 모든 특권들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는 법적인 의미를 가진다.(p303)
엡 1:5~6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양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p304-305)
갈 4:4~7에서 “율법 아래 태어나다”(즉, 율법 준수의 의무를 지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혹은 율법 준수의 순종을 시사한다. 바울이 여기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즉, 그의 백성)을 그들이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지키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율법 준수의 순종은 이제 우리의 양자됨과 결부되어 있다.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심이라”-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그의 자녀들로 입적되어서 그 자녀됨에 내포된 모든 권리를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자녀됨을 받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에 동반되며,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삶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그 구속을 적용하시는 것이다.(p305)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양되면 어떤 혜택들이 뒤따르는가? 1) 이제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권세를 가진다(히 4:16, 요일 5:14). 2) 우리가 하나님의 방호와 보호의 복을 누리게 된다( 마 6:25~34, 벧전 5:7). 3) 우리가 여전히 겪어야 하는 역경들은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훈육이다( 히 12:5~11). 4) 우리는 성령으로 인쳐졌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켜진다( 고후 1:22, 엡1:13; 4:30.
8. 영생의 권리
칭의의 두 번째 적극적인 혜택은 영생에 대한 우리의 권리이다. 이것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된 결과들 중의 하나이다.(p308)
영생은 신약에서 현재 소유하는 것이며 또 미래의 소망인 것으로 함께 서술된다. 영생이 현재 소유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라는 요한복음 3:36에 분명히 진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가 그것을 받을만한 자격이 생겼고 우리가 칭의될 때 우리에게 부여되었던 영생의 권리는 하나님의 양자된 복과 마찬가지로 현재와 함께 미래의 것을 함께 가리킨다. 질적인 면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영생을 현재 여기에서 소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깨달으며, 신뢰하고 예배하며 기도하고 찬송하는 중에 그와의 귀중한 교제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다가올 대추수의 단지 첫열매로서만이다.(p308-309)
9. 믿음과 칭의와의 관계
칭의의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라는 것은 그가 우리의 죄들이 받아 마땅한 형벌들로 고난받으시면서 또한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시면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 완전한 의라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전가되거나 우리의 것으로 계산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칭의를 위해서 전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p313)
제12장 성화
하나님은 그 자신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우리들에게도 역시 거룩해지기를 바라신다.(p315)
1. 정의
우리는 우리의 책임있는 참여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의 본성 전체를 새롭게 하시어서 우리가 주님을 즐겁게 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를 성화라고 정의한다.(p315-316)
2. 거룩의 성경적 의미
성경적 의미에 있어서 거룩은 범죄하지 않고 거룩하게 산다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죄 가운데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영적인 성별이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318)
바울은 성화란 단지 각자 개별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전체적인 공동 생활체 속에서 진보한다는 것을 계속 명백히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점점 성장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같이 성장한다. 우리는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성화되어 간다.(p320)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성화시키는 중요한 방편 중의 하나가 성경이다. 성경은 역시 우리가 신앙에 의하여 성화된다고 가르친다.(p321)
신앙은 어떻게 성화의 방편이 되는가?
첫째,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계속 유지한다. 둘째,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셋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를 극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움켜 잡는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수용하는 기능일 뿐만 아니라 작동하는 능력이다. 그 자체의 본성 때문에 믿음은 영적인 열매를 산출한다.(p322-323)
3. 성화의 모형
성화의 모형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성화의 모형이 그리스도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p324)
구속의 과정 가운데 특히 중생과 성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은 다시 회복된다.(p324)
우리의 형상 회복은 우리 속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가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이라는 두 관점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1) 하나님의 역사: 성경은 성화시키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시켜 자기의 형상대로 회복시킨다고 가르친다. 사실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 8:29에서 이 사실을 배운다.(p324-325)
2) 우리의 능동적인 노력: 우리는 역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p325)
4.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성경은 명백하게 하나님이 성화의 주체이시라고 교훈한다. 성화의 사역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공히 담당하신다고 묘사되었다.(p327)
하나님은 성화의 방편으로써 고통과 아픔과 같은 것들을 사용하신다. 에베소서 5:25~27에서 성례(세례와 성찬) 역시 성화의 방편이라는 점을 제시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말씀이라는 방편을 통하여 그의 교회를 죄악으로부터 정결하게 하신다.(p328)
우리는 성화란 성도의 노력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에게 노력할 수 있게끔 해주는 강력한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p333)
5. 즉각적이고 점진적인 성화
우리는 즉각적인 성화가 사로잡는 죄의 권세로부터 결정적으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즉각적으로 그리고 확고부동한 연합, 즉 신자들이 새로운 생활 가운데서 살 수 있게 하는 방편으로써 연합(롬 6:4) 되었으며, 그래서 모든 성도는 지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결론내린다(고후 5:17). 그러므로 우리의 즉각적인 성화에 대한 결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지금 스스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롬 6:11)여겨야 한다.(p335)
성도들이 죄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된 것은 언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주체와 객체라는 양쪽 측면이 존재한다. 객관적 의미에 있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그와 함께 죽었으며,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교훈을 완전히 정당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양쪽 측면을 강조해야 한다; 즉 과거 역사적 측면과 현재 경험적 측면이 그것이다. 과거 역사적 측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했을 때 죄에 대하여는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경험적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했을 때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다. 성령에 의해서 거듭났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음을 신앙으로 붙들어야 한다.(p336-337)
즉각적인 성화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은 신자들이 자신이나 다른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서는 죽었으며 지금 새로운 피조물이 된 존재로 생각해야 할 것을 시사한다. 확실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새로움은 무죄 완전한 것이 아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추악한 죄와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죄 가운데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비록 아직 전적으로 새롭게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나 다른 성도들을 진정으로 새로워진 인격체로 대우해야 한다. 그러나 즉각적 성화의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단호하고 분명하게 죄와 관계를 끊어버릴 것을 우리에게 암시한다.(p327)
즉각적인 성화는 “두번째 축복”의 종류와 같이, 그 전의 칭의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험적 의미에 있어서 즉각적인 성화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이라는 측면과 같이 칭의와 동시에 발생한다. 역시 즉각적인 성화는 영적 생명의 첫 번째 수여가 되는 중생과 동시에 일어난다. 우리는 중생함으로써 믿게 된다. 비록 중생이 인과론적이고 논리적인 순서에서 볼 때 믿음, 칭의, 그리고 즉각적인 성화에 앞서지만 시간적으로 앞서는 것은 아니다.(p337-338)
많은 신학자들은 내가 “즉각적인 성화”로 호칭한 것과 같은 의미로 “신분적인 성화”를 사용한다.(p338) 그러나 신분적인 성화를 즉각적인 성화와 동일하지 않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분적인 성화를 계속 발전시키는 사람들은 칭의의 교리에 속하는 “전가”와 “선언”과 같은 그런 개념을 소개한다. 그러므로 이런 개념들은 성화의 측면들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p339)
요한일서 1:8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속에 죄가 계속 현존한다. 때문에 신자의 성화는 계속적인 과정이어야 한다.(p340)
골로새서 3:9~10절은 성화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즉각적으로 모든 성도들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즉각적인 성화: 여기 시제는 과거에 단 일회적으로 완성된 것을 나타내는 부정과거이다). 그러나 한편 그들이 입은 새 사람은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점진적인 성화: 여기 시제는 현재 진행을 표시한다).(p342)
6. 신자는 “옛 사람”이면서 “새 사람”인가?
존 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 사람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다. 새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거듭난 사람이다. 신자를 새 사람과 옛 사람으로 부르는 것은 더욱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옛 사람을 비중생한 사람으로, 새 사람을 중생한 사람으로 불러야 한다. 이것은 신자가 그 속에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같이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전문용어는 타당하지 않다. 고로 신자 속에 옛 사람과 새 사람이 공존한다는 주장은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공고히 하는 바울의 교리에 정면 배치가 되고, 반감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비록 신자들이 새 사람이지만 아직도 무죄 완전함에 이르지 아니했다. 그들은 아직도 죄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할 존재들이다.(p349)
그러므로 신약에 묘사된 새 사람의 새로움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며, 지속적인 새로움, 성장 그리고 변화를 필요로 한다. 고로 신자는 자기의 단점에 대하여 깊이 의식하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죄인이며 그래서 나는 자신을 새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성도는 나는 새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목표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p350)
7. "완전주의“(perfectionism)의 문제
1) 그들은 현세에서 신자들이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획득할 수 있다고 하는 “기독교적인 완전”을 위한 일반 명칭“라고 불리우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2) “온전한 성화”는 칭의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며, 칭의 다음에 수반하는 것이라고 말해진다-즉 사실은 성도들이 의롭다 함을 받은 후 여러 해 동안까지도 “온전한 성화”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끔 성화는 (칭의 다음에) “두번째 축복”으로 불리워진다. 그러므로 두 부류의 기독교인이 존재한다: 즉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와 의롭다 함을 받고 성화된 신자이다.
3) “온전한 성화”는 믿음으로 받게 되는 즉각적인 경험으로 말해진다. 이 “두번째 축복”을 받고 난 후 신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기독교인의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4) “온전한 성화”는 우리의 더러운 본성의 근절을 포함한다고 말해진다. 웨슬리는 “온전한 성화”가 이룩되는 순간에 “우리의 모든 내적인 죄는 사라진다”고 말한다.
5) “완전하게 성화된 사람이 피할 수 있다고 언급한 죄는 항상 조심스럽게 제한을 받는다. 웨슬리는 죄를 소위 알고 있는 율법에 대한 고의적인 위반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계속해서 죄는 부당하게도 소위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고의적인 위반이다”고 말한다. 그는 “만약 여러분은 이런 위반을 기꺼이 죄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부언한다. 고로 “온전한 성화”는 이미 알려진 율법에 대한 고의적인 위반으로부터 지금 피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같은 묘사가 의미하는 바는 만일 누가 어떤 것이 죄가 된다고 인식했으면 그것은 죄이다. 역시 누가 그것이 죄가 되는 줄 모르고 어떤 잘못을 했다면 그 잘못이 그에게는 죄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6)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신자가 획들할 수 있는 “완전함”이란 항상 제한적이다.(p356-358)
이들이 자기들의 교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1) “온전한” 사람의 성경적 실례. 예를 들면 웨슬리는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은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하며”(히 6:2) 그리고 “바울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했기(빌 3:15) 때문에 완전은 획득할 수 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의미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완전해진 인간들의 명백한 예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지 않다.
2) 중생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고 하는 구절: 요한일서 3:9; 5:18. 사도 요한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태어난 사람은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로 계속 범죄하거나 죄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해서 중생한 성도는 죄 가운데 살지 않는다. 그러나 중생한 성도는 숙지하고 있는 말씀에 대항해서 의식적으로 범죄할 수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3) 데살로니가전서 5:23의 교훈.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 5:23은 “온전한 성화”가 하나님 백성의 삶의 어떤 순간에 발생할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기도는 확실하게 성도의 온전한 성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완성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4) 신자들에게 온전하라고 명령하는 구절들. 이들은 가끔 마태복음 5:48; 골로새서 1:28; 히브리서 6:1 등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48절의 “온전”하라는 말씀은 헬라어 텔에이오스에서 옮긴 것이다. 이 단어는 우리가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성숙한” 또는 “충분히 자란”이란 의미로, 사람들에게 적용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예수님은 원수에 대한 미움을 정당시하는 바리새인의 윤리와 대조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의 이상을 그의 제자들과 우리 앞에서 보이셨다.(p358-363)
8. 웨슬리적 가르침에 대한 논박
1) 웨슬리파는 죄의 정의를 약화시킨다. 죄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4문에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 어기는 것이다”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웨슬리파는 죄를 “알고 있는 율법의 고의적인 위반”으로 정의한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단지 고의적인 악행만 죄로 인식된다.(p363)
2) 웨슬리파는 완전의 개념을 희미하게 한다. 웨슬리에 따르면 “영혼이 몸에 거주하는 동안에 사람이 획득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완전은 무지나 실수, 그리고 수많은 다른 연약성 등을 제외하지 않는다.”(p364)
3) 웨슬리파는 “육감적 본성”이 “완전한 성화” 속에서 조절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계속해서 신자가 육체 또는 “죄의 본성”(the sinful nature)과 투쟁한다고 가르친다(갈 5:16~17).그리고 거룩하게 성별된 백성이 아직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유혹을 받을 수 있다고 교훈한다(롬 7:7; 약 1:14; 벧전 2:11; 요일 2:10).(p355-356)
4) 웨슬리파의 가르침에 따르면 “온전한 성화”는 칭의 다음에 오는 “두번째 은혜 사역”에 속한다. 그러나 신약은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발생하는 것으로 언급한다. 비록 칭의와 성화가 서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는 우리의 본질적인 측면이다. 그런고로 우리의 즉각적인 성화는 어떤 시점에서 발생하며 우리의 칭의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이 아니다. 고로 양자는 동시에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두번째 축복” 또는 “은혜의 두 번째 사역”으로 계산하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새로움과 성장, 그리고 성화의 방편 가운데서의 진보로 보아야 한다(롬 12:2; 엡 4:15; 벧전 2:2; 벧후 3:18).(p366)
이제 우리는 웨슬리파의 견해에 배치되는 성경적 교훈을 계속 숙고해야 한다.
1) 죄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가르치는 구절. 우리가 기억해야 될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열왕기상 8:46; 시편 130:3; 잠언 20:9; 로마서 3:23 그리고 야고보서 3:2, 특별히 요한일서 1:8의 내용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이러한 구절들과 이와 유사한 다른 구절들의 조명 아래서 우리는 아직 성화의 과정 가운데 있는 신자가 감히 무죄 완전한 생활을 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p367-368)
2) 신자에게 죄의 고백을 요구하고 사죄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는 구절들. 성경은 계속해서 신자들 중에 가장 거룩한 이들에게까지 죄를 고백하고 죄의 용서를 구하라고 묘사한다(욥 42:6; 시 32:5; 130:3~4; 사 6:5; 64:6; 단 9:15~16; 미 7:18~19; 딤전 1:15; 요 1:9).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죄를 위하여 매일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확실히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 중에 어느 누구도 죄없이 하루를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그리지 않으셨다.(p368-369)
3) 신자 속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의 투쟁을 서술하는 구절들. 갈라디아서 5:16~17에서 바울이 “육체”(flesh)를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비록 신약에서 사용된 “육체”라는 단어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 육체는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께 반항하려고 하는 인간 존재의 성향을 의미한다. 우리는 마치 이 단어가 단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르는 “육적인 죄” 또는 “신체의 죄”를 의미하는 것처럼 이 단어의 의미를 제한해서는 안된다. “육체”는 전 인간이 범하는 죄들을 지시한다. 이 구절을 통하여 아직도 신자들이 육신으로부터 오는 죄의 충동과 싸워야 하며, 그러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린다고 지시한다. 이 앞에 구절에서 하나님은 만약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면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약속하셨다(갈 5:16). 그러나 기독교인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들 속에 있는 악항 성향과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p369-370)
결론적으로 우리가 웨슬리파로부터 배울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거룩을 위한 그들의 열정에 존경을 보내야 하고 자극을 받아야 한다. 이들을 따르는 기독교인 가운데는 우리가 할 수는 없지만 칭찬해야 할 거룩한 생활을 위한 깊은 관심이 있다.(p370)
9. 성화와 율법
확실히 어떤 의미에 있어서 신자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로마서 6:14에서 이 사실을 명백하게 말한다. 여기 “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말씀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저주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노력의 방편으로써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미에서 신자들은 참으로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 있어서 신자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신자들은 구원의 상급 때문에 하나님게 감사하는 표현의 방편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데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지켜야 한다. 즉 말씀에 대한 순종은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함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었다. 구약성경의 교훈을 더욱 확대시킨 신약성경은 신자들이 받은 축복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마태복음 5:19; 요한복음 15:10. 성령을 좇아 행하는 성도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최선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기독교인의 생활은 율법을 지키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즉 우리의 삶은 율법 조문에 관한 종교적 관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에 의한 생활이다. 신자의 율법 수행은 기독교인 사랑의 한 표현이며, 기독교인 자유에 이르는 방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편 중의 하나이다.(p372-377)
10. 성화의 사회성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단순히 개체적으로 성화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의 일원으로서 성화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만나는 동료 신자들의 성화를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하는 그런 방편으로써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풍부함은 양방면으로 역사한다. 일찍이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는 우리 자신의 성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들 중의 하나로 지적되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도들과의 교통 속에서 그리고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더욱 충만하게 성장한다. 더욱이 우리는 그리스도 지체의 한 일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로서 성화된다.(p377)
성경은 분명하게 성화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에게 관계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요구를 포함한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율법의 두 번째 중요한 명령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 동료 인간의 복지에 계속 관심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셨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회적 관심없이 성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성화는 우리가 법률, 정치적 행위 그리고 매개체의 사용을 통하여 전분야에 정의가 시행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모든 부정의 형태들, 즉 인종주의,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 인간대접을 하지 않고 기계처럼 노동자를 대우하는 것들에 대항해야 한다. 성화는 사회적 요구에 대한 성공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요구에 대한 실패는 잠재적 형상을 지닌 수백만의 살인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성화는 우리 어린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짐을 의미한다. 성화의 성장은 환경에 대한 관심을 요구한다.(p379-381)
11. 성화의 목적
성화의 목적은 최종적인 목적과 그에 가까운 근사치적 목적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부터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성화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성화의 최종 목적임을 지시한다.(p382-383)
성화의 가장 가까운 목적은 하나님 백성의 완전이다. 이 완전은 하나님 형상의 역사에 있어서 최종 단계가 될 것이다. 성화의 목표는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하고 전적인 형상,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는 데 있다. 이 전적으로 닮아진 형상은 우리가 우리의 개체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인격의 동질성의 상실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한 형상은 온전히 무죄한 존재를 의미한다(참고, 엡 5:27; 히 12:23; 계 22:14~15). 이런 미래의 온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신 목적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롬 8:29). 환언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미래의 행복이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은 완전한 형상이다.(p383)
제13장 참 신자들의 견인
1. 견인의 개념
참된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은 믿음을 전적으로 또는 마침내 잃어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관한 참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참 신앙을 가진 성도가 그 신앙을 언젠가 잃어버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개혁주의 노선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신자의 우수한 영적 능력에 토대를 두지 않고 그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대답한다. 칼빈주의자는 하나님께서 참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신앙에서 떨어지도록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참 신자는 그들의 능력 때문에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내한다. 여기서 우리는 타락할 수 없다고 언급된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중생한 사람들이며,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된 사람들임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이 견인 교리는 구원받은 다수의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도 관계가 없다고 가르치는 일반적인 의견을 거절한다.(p386-387)
2. 이 교리의 성경적 증거
1) 복음서에 있는 구절들
누가복음 22:31~32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신앙이 궁극적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그리고 흔적도 없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하셨다. 그래서 비록 베드로가 확실히 불충분한 의미에 있어서 믿음없이 되었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구원적 신앙은 잃지 않았다.(389-390)
요한복음 5:24, 요한복음 6:39, 요한복음 10:27~28
2) 서신서에 있는 구절들
로마서 8:29~30, 에베소서 4:30에서 바울은 성령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는 진술을 통하여 비록 참 신자가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버림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거한다.(p398)
3. 견인교리에 대한 이의
1) 견인교리는 나태와 방종에로 인도한다.
침례교회의 작가인 존 다그(john L. Dagg)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와 투쟁하지 않고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 견인교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이 문제에 관하여 오해하고 있다. 견인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투쟁하는 가운데 인내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없이 성도들이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이 교리와 모순된다. 한번 회개했던 사람은 그들의 생의 과정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결론은 이 교리에 대한 참담하고 치명적인 왜곡이다.(p405)
2) 견인교리는 성경과 상충된다.
믿음을 지속하라는 권면 (마 10:22; 요 8:31; 요 15:5; 고전 16:13) 이들 짧은 성구들과 이것과 비슷한 다른 성구들은 견인교리를 간과하고 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러나 사도들은 견인교리에 대한 오해를 반대하면서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들은 견인교리에 있어서 우리의 책임의 부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p405-406)
배교에 대한 경고(골 1:21~23; 히 2:1; 벧후 3:17) 이 성구들 가운데에 있는 명령들은 역시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어떤 방편들을 통해서 지키신다. 그리고 이들 방편들은 배교에 대한 경고가 포함된다. 이런 짧은 경고에 주의함으로써 신자들은 인내한다.(p406-407)
실제적인 배교의 경우들-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제에 소속된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거짓 신자들이 항상 있었고 지금도 존재함을 가르친다. 만약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배교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가정해야 한다: 그래도 주님은 그들을 다시 교제하기 위해서 찾으실 것이다. 또는 그 배교자들의 신앙은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내하기 때문이다.(p408-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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