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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1

 

 

1장 교의학의 명칭 및 개념

[1] 교의학이란 명칭은 비교적 최근에 사용된 이름이다. 다른 신학 과목들과 구분하기 위해 신학이라는 이 이름은 더 상세하게 규정되어야만 했다. 그것을 위해 교육학적’, ‘체계적’, ‘이론적’, 혹은 실증적이라는 관형어가 덧붙여졌고, 라인하르트의 교의신학개요이후로는 교리적이라는 관형어가 덧붙여졌다.

 

[2] ‘교리’(δογμα) 라는 단어는 헬라어 동사 도케인’(δοκειν, ~로 생각되다)에서 나와 확정되고 결정되어서 확고히 서 있는 것을 지시한다. 성경에서 그 단어는 나라의 명령, 옛 언약의 규정들,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을 언급할 때 쓰여졌다.

첫째로, 그것은 여러 가지 명령들, 결정들, 진리들, 주장들, 생활 규범들로 지칭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공통적으로 교리라는 이름은 확고하여 의심을 뛰어넘는 어떤 것을 항상 지칭한다. 이방인들은 신탁에서, 기독교인들은 성경에서, 로마교 신자들은 교회로부터 그 권위를 도출한다. 교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믿든지 혹은 순종해야 하는 그러한 진술들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혁교회 신학자들은 다음의 주장을 반복했다. “모든 신학적 교리들이 해결되는 원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는 것이다.”

둘째로, 교리라는 개념은 사회적 요소를 포함한다. 진리가 매우 확고하다 할지라도, 만일 그것이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진리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떤 선생의 가르침, 즉 한 특정 개인의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교리의 개념이 암시하는 바는 교리가 가진 권위가 스스로를 인정받게 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로서의 교리우리와 관련한 교리를 구분해야만 한다. 만일 하나의 주장이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한다면, 모든 승인을 불문하고 그 자체로 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은 우리가 그러한 것으로 승인하도록 의도된 것이며 그 자체 내에 촉구를 담고 있다. 진리는 항상 진리로서 인식되기를 원하기에, 오류와 거짓과는 결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각 신자와 특히 교의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의 어떤 진리가 성령의 인도하에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보편적 승인을 받았는지 아는 것이다. 그로 인해 결국 그는 사적 견해를 분별없이 하나님의 진리로 여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의 고백은 우리와 관련한 교리’, 즉 하나님의 진리라고 불릴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진리가 회중의 의식 속에 받아들여지고 회중의 고유한 언어로 고백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교리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는 특정한 의무를 가진다. 교회의 권위는 어떤 교리를, 실질적 의미에서 모든 의심을 뛰어넘고, 권위를 행사하는 교리로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교회의 교리란 오로지 그것이 하나님의 교리들이라는 조건과 그 범위 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존재해야만 한다. 교리를 확정하는 교회의 권세란 주권적이지도 입법적이지도 않고, 다만 봉사적이며 선언적이다. 교회가 고백한 진리는 교회가 인정했기 때문에 교리가 아니라 유일하게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하기 때문에 교리다.

 

[3] 교리라는 단어의 사용은 종교적 혹은 신학적 교리에 항상 두 가지 요소가 연관된다는 점을 가르친다. 신적 권위와 교회적 고백, 만일 하나의 교리가 신적 권위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이름을 부당하게 지닌 것이며, 따라서 회중의 신앙에 어떤 자리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하나의 진리가 성경 가운데 감추어져 아직 회중의 의식 가운데 소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교리라고 불릴 수는 있으나, 아직 우리와 관련한 교리는 아니기에 이 교리가 미래에 더 발전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교의학자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 요소, 즉 신적 진리와 교회적 고백의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임무 중의 하나다. 어느 누구도 교리에 있어서 내용과 표현, 본질과 형태가 적절히 완벽하게 부합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종교의 진리를 확고히 붙드는 자는 교리가 반드시 필요하고, 교리에는 항상 불변하고 상존하는 요소가 있음을 인정한다.

네 번째로 교리라는 단어의 사용은 그 단어가 때때로 좁은 의미에서보다는 넓은 의미에서 사용된다는 점을 가르친다. 폴라누스는 어디선가 교리란 넓은 의미에서 성경에 담긴 모든 것, 즉 복음과 율법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모든 강론들과 거룩한 역사들까지 포함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 단어는 더 좁은 의미에서 복음과 율법의 가르침,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믿든지 혹은 순종해야 하는 진술들에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교리적 진리뿐만 아니라 윤리적 진리도 포함했다. 하지만 나중에 교리라는 단어는 더욱 좁게 제한되어 율법의 가르침이 복음의 가르침과 구분, 분리되었다. 이제 교리들이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믿어야 하는 진술들만을 의미했다.

 

[4] 초대에 일반적으로 이해되었던 교의학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 그 다음으로는 원리나 목적에 있어서 하나님과 관련된 피조물에 관한 교리였다.”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교의학의 주개념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여 교의학의 대상을 다르게 칭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경향은 칸트의 철학에 의해 견고하게 진전되었다. 왜냐하면 이 철학자는 인식 능력에 대한 자신의 비평적 탐구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사람인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데, 이는 우리의 지식이 선천적인 형식에 매여 결국 경험의 범주에 제한되기 때문이다. 베르노올리와 트뢸취와 같은 학문적 신학자는 소위 모든 편견들, 심지어 기독교에 호의적인 것들조차 버려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렇지 않으면 교의학은 다른 학문들과 아주 멀리 격리되고, 교의학은 입증 불가능한 기초에 세워져서, 실제 의미에서 학문이 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 입장에서 교리란 성경, 신앙고백서, 기독교 경건, 교회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편견 없는 연구를 통해 종교의 핵심을 발견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삼는다.

 

[5] 학문은 진리를 목적으로 하기에 만일 교의학이 참으로 학문이 되고자 한다면, 무엇에 대한 서술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로 고려되어야 하는지를 지적해야만 한다. 교의학은 ‘~라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현실이 아니라 진리를, 현실적이 아니라 이상적이며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것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교의학이란 신학 전체가 전혀 구속을 받지 않는 것처럼, 사전에 어떠한 교리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종교에 대한 역사적, 심리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것처럼, 종교의 실질적 내용에 대한 서술과 정당화 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교의학이란 어떠한 교리도 포함하지 않고, 다만 경건한 종교철학자의 신학적 공리들의 체계만을 내포한다. 종교의 진리와 가치는 하나님의 존재, 계시 그리고 인지 가능성에 의존한다. 형이상학을 수용하는 종교학 역시 원리적으로 신학이며, 하나님의 존재와 인지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만일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지 않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다면, 교의학과 신학뿐만 아니라 종교마저 붕괴된다. 왜냐하면,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의학은 신 지식의 학문적 체계이며, 오로지 그렇게만 존재할 수 있다.

 

[6] 카프탄은 교의학이 신적 계시를 전제하며, 이것을 원리와 근거로서 수용해야 함을 인정한다. 카프탄에게 있어서 교의학은 경건한 마음의 정서에 대한 묘사도 아니며, 종교적 경험의 자료들에 대한 고찰도 아니고, 또한 심지어 가치판단에 입각한 적나라한 종교적 세계관도 아니다. 교의학은 계시의 권위에 근거하여 절대적인 어조로 말하는 표준 학문으로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을 공포하고 해설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옛 교리와 교의학의 개념에 머물지 않으려 했다. 일찍이 종교개혁 이전과 또한 개신교 정통주의에서는 신앙, 교리, 교의학에 대한 지성적 견해가 우세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둘 사이의 커다란 차이를 발견하여, 주지주의를 복음적 신앙의 주의주의로 대치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이 개혁을 수행한다면, 이 개혁의 첫 번째 의미는 교리가 아닌 계시가 신앙을 선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계시란 종교적, 윤리적 성격을 내포하기에, 사람은 계시를 이성을 통해 이지적으로가 아니라, 의지를 통해 자발적으로 자기 소유로 삼는다. 따라서 신앙이란 실천적으로 확립되고, 지식과 같은 최고의 활동, 정신적 생활은 의지에 의존하여 뿌리를 내린다. 더 나아가 개혁이 두 번째로 의미하는 것은, 교리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교리는 그 기원에 따라 이지적, 학문적 특성이 아니라, 종교적, 윤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교의학은 우리가 지적으로 수용해야만 하는 교리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에게 참된 믿음을 일으키고 진리에 상응하는 내적인 신앙 지식을 교육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선포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순서는 계시(성경), 신앙, 교리다. 신앙은 성경과 교의학 사이에 있다. 마지막으로 이 새로운 원리에서 교의학은 하나님에 대한 학문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학문적 체계도 아니라는 사실이 흘러나온다. 이 지식은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윤리적 의지의 활동을 통해서 획득되며, 따라서 우리가 학문적 분야에서 획득하는 지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지식이 있을 뿐이다.

 

[7] 카프탄은 학문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교의학을 신앙의 영역 밖에 놓았다. 그는 학문으로서의 교의학을 주장하기 위해, 그는 신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지식을 교의학의 내용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신앙의 지식에 대한 학문만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카프탄은 자신이 슐라이마허를 비난했던 그 오류에 빠진다. 카프탄에게 있어서 교의학은 신앙의 지식에 대한 묘사, 주체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기술이 되었다. 물론 카프탄은 신앙을 지식으로,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이해함으로써 주관주의자들과는 다른 이점을 지닌 구별된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교의학을 유익하게 하는 이런 입장 대신에, 그는 그만 중도에 멈추어 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지식은 존재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학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카프탄 자신이 인정하듯이 그의 신칸트주의와 학문에 대한 경험주의적 견해의 결과다. 그는 칸트에 동의하여 초감각적 존재는 인지할 수 없으며, 엄격한 의미에서 학문은 경험에만 의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카프탄은 학문으로서의 교의학을 주장하기 위한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고서, 다만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경험 사실, 즉 신앙의 지식, 종교적 경험을 교의학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카프탄은 다른 진영이 제기하는 이런 주관적 입장을 수용하는 것에 연관된 반대들을 매우 잘 인식하고서 슐라이마허의 경험신학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그는 이제 중용의 길을 시도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지식은 받아들이되 하나님에 대한 학문은 수용하지 않는 데서 그 길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8]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학문으로서의 교의학에 대해 가장 정당하게 말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이 지식을 하나의 체계로 요약하는데, 어떠한 반대도 없다. 카프탄은 이런 견해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면서 교의학자는 신앙의 진리를 일정하고 선명한 순서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학문에서, 특히 철학과 신학에서 조직적 구조가 많은 해를 끼쳤다는 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그로 인해 자주 내용은 형식에, 현실은 이상에, 가능성은 의지에 희생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교의학에서 체계와 체계적 구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달려 있다. 교의학은 전제한 원리에서, 예를 들면, 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 중생의 사실, 경건한 경험 등에서 신앙의 진리들을 이끌어 내려고 시도하는 체계를 위한 여지를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의학은 실증적인 학문이며 그 모든 자료를 계시로부터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와 상관없는 추론을 통하여 계시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확장할 권한이 없다. 만일 교의학이 자신의 취약점과 제한 때문에 신앙의 진리들을 단순히 나란히 늘어놓든지, 아니면 체계적 형태를 위해서 그 진리들 중 하나에 해를 끼치든지 선택해야 한다면, 교의학은 무조건 전자를 택하고 하나의 가지런한 체계에 대한 욕망을 뿌리쳐야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확고히 붙들어야 할 것은 그런 딜레마는 단지 우리의 통찰력의 제한에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신 지식이 하나님 자신을 통해 말씀에 계시되었다면 그것은 모순되는 요소를 포함할 수 없고, 자연과 하나님의 역사에서 알려질 수 있는 것과 상반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각들은 서로 상충될 수 없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유기적 통일성을 형성한다. 따라서 교의학자는 좋든 나쁘든 결과는 차치하고 준비된 체계 속에 계시의 내용을 짜내기 위해 준비된 체계를 들고 계시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심지어 그가 자신의 체계 속에서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숙고하고 하나님의 생각 속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신앙의 안목을 위해 기록된 성경에 포함된 그 통일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교의학은 신 지식에 연관된 계시의 내용을 사유함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물론 계시의 내용에 대한 이 같은 재현에는 실수나 오류에 대한 온간 위험이 있다. 모든 학자들처럼 교의학자는 겸허하게 이것에 동의해야 한다. 교회의 고백과 더 심하게는 개인의 교의학은 실수가 있기 마련이므로 성경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며, 결코 성경과 동일한 권위의 선상에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의학자는 다른 학자들과 비교하여 좋은 형편에 처해 있다. 카프탄이 말하듯이 교의학자는 어느 정도 절대적인 어조로 말하거나 말할 수 있다. 교리란 진리로 여겨져 사람들의 인정을 요구하는 신앙의 진술이며, 교의학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규정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그 절대적 어조는 교리와 교의학이 자신의 고유의 권위나 이름으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에 의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는 사실에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며, 거기에 호소하는 한도 내에서 가능하다. 교의학의 취약점은 그 스스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별로 믿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오늘날 교의학이 지닌 경시는 그것이 그 고유한 임무를 잊고 그 독특한 특성을 포기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고 카프탄이 한 말은 완전히 맞는 말이다. 교의학은 다시금 규범적 학문이 되어 담대히 권위의 원리를 존중하고 절대적 어조로 말해야 한다.

 

7장 학문의 원리들

 

 

1. 합리론

[64] 학문이란 항상 주체와 대상 사이의 논리적 관계에 존재한다. 이 학문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어 왔는데, 바로 합리론과 경험론이다. 합리론에서 감각적 인식은 지식을 제공할 수 없는데, 이는 변하는 현상들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 있고 그러하다는 점만 말할 뿐, 왜 그것이 그러한지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오직 사고 작용만이 지식을 제공하며, 학문적 지식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산물이다.

헤겔에 의해 객관적 합리론으로 확대되어서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존재 역시, 표상들만이 아니라 물자체 역시 오로지 사고 작용에서 산출되므로 사고 작용과 존재는 동일하다고 생각되었다.(형이상학적 관념론)

이 합리주의가 어떤 다른 형태로 등장했든, 항상 단 하나의 근본적 사상, 즉 추구해야 할 지식의 근원이 주체에 있다는 사상을 가진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의식적인 것만이 존재한다. 나는 단지 사물이 아닌 개념만을 생각할 수 있다. 나의 개념이 아닌 것은 내가 생각할 수 없고, 알 수 없고,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65]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론에 대해 매우 심각한 반대들이 있었다. 관념론은 지식의 기관을 지식의 근원과 동일하게 만들고, 말하자면 눈을 빛의 근원으로 삼고, 생각을 사고 작용으로부터 도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물과 그 표상, 존재와 사고, ‘존재하는 것인식하는 것은 두 가지 별개의 것으로 동일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경험론

[66] 경험론 역시 다양한 형태와 체계로 등장했으나, 그 출발점은 항상 감각적 인식만이 우리 지식의 근원이라는 원리였다. 합리론이 객관적 세계를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인간 정신에 초점을 맞춘 반면, 경험론은 인간 의식을 완전히 우리 외부 세계에 종속시켰다. 따라서 초감각적인 것(물자체)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란 불가능하다. 형이상학, 신학, 일반 정신과학들, 심지어 꽁트에 따르면 심리학조차 고유한 의미에서 학문이 아니다. 학문의 목적은 더 이상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다만 현실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여 우리가 그 지식에 따라 우리의 삶을 정돈하고 그것으로부터 실재적인 유익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인식 세계에 이렇게 절대적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단지 정신이 인식하는 내용만 아니라, 세계로부터 의식과 정신 자체를 해설하도록 이끌어 결국 경험론은 유물론에 귀결되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역시 과정, 역사, 발전이 주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론은 심각한 반대들에 의해 압박을 받았다. 제일 먼저, 확고부동한 사실은 인간의 정신이란 지성적 활동에 있어서 완전한 의미에서 결코 수동적이거나 심지어 수용적이 아니라, 항상 다소간 능동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보고 듣는 것은 눈이나 귀가 아니라,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듣는 사람 자신이다. 가장 단순한 인식과 표상은 이미 자각을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영혼의 활동을 전제한다.

3. 실재론

[67] 인신론의 출발점은 지식의 객관성과 진리에 대한 인간의 일상적 경험,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확신에 속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감각을 신뢰하고 외부 세계의 존재를 받아들이지만, 이는 자기의식 속의 표상이라는 결과에서 자기 외부의 원인까지의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며, 또한 자기 의지가 경험한 저항에서 그 저항을 제공한 하나의 객관적 실재까지의 추론을 통해서도 그러한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은 모든 반성과 추론 이전에 세상의 실재적 존재를 전적으로 확신한다.

실재론은 표상과 사물 사이에 있는 차이를 부인하지 않고, 그 둘 사이에 뗄 수 없는 연관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표상이 스스로를 보여 주는 표상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이미 단 하나의 이 사실, 즉 감각의 신뢰와 외부 세계의 실재에 관한 자연적 확신은 학문적, 논증적 확신과는 다른 확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경험론자들은 부당하게 이것을 부정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인식이나 추론이 아닌 선험적으로 확신하는 보편적, 필연적 진리들도 가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학문적 혹은 매개적 확신 외에 또한 형이상학적, 직관적, 즉각적 확신을 수용했고, 이를 신앙의 확신, 자명의 확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무엇이 부분이고 무엇이 전체인지를 알게 되지만, 지성은 전체가 부분보다 크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한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를 배우지만, ‘실천적 지성은 어떤 것은 반드시 해야 하지만 다른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안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이 이 근본 개념들과 근본 원리들에 대해 스스로 혹은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심지어 가장 단순한 사람조차도, 이 근본 개념들과 근본 원리들을 어떤 학문적 반성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가장 큰 확신을 가지고 삶에 적용한다.

이러한 인식 능력에 대한 이론과 합리론-경험론 사이의 차이는 다음 두 가지 요점에 놓여 있다. 첫째, 지성에 대한 독특한 견해로서 지성은 고유한 속성을 수반하고 그에 따라 고유한 방식으로 활동한다. 둘째, 이 지성은 자기 고유한 속성에 따라 활동하지만, 오로지 인식된 사물로부터 자연적으로 그 사물에 잠재된 논리적 요소를 추출하는 것이다.

[68] 인간의 모든 지식은 감각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단순한 인식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모두 이미 다른 다양한 것들로 조합된 것이다. 우리가 보는 각각의 대상, 우리가 듣는 각각의 소리는 이미 인식들의 종합이다. 따라서 인간 정신은 가장 단순한 인식들에 있어서 이미 활동하고 있기에, 정신이란 외부 세계가 원하는 대로 단지 쓰는 서판이 아니며, 대상이 단순히 반영되는 거울도 아니다. 하지만 의식 자체 안에 있는 모든 인식의 상은 다양한 감각들을 통해 대상으로부터 얻어진 요소들로 형성된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의 의식 가운데 있는 인식의 상, 표상과 우리 외부의 실재, 대상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식의 상은 외부 세계의 외양이나 형태가 아니라, 기껏해야 기호, 상징, 도표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은 감각과 신경을 거쳐 외부에서 우리 두뇌 세포에 들어온 변화들을 따라 우리 정신 속에 자유롭게 형성된 것이다. 만일 이것이 그렇다면, 객관적 세계는 점점 더 우리 시야로부터 사라지고, 겉모양 가운데 녹아 사라진다. 왜냐하면 실재에 대한 인식의 상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결코 실재에 다가갈 수 없으며, 인식의 상은 항상 실재와 우리 사이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 이론의 근본적인 오류는 우리가 인식하는 실재적인 대상이 우리 외부의 사물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떤 인상 혹은 신경의 진동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 같다. 신경의 진동이 먼저 우리 두뇌에 전달되고, 그리고 난 뒤 비로소 의식이 깨어나 두뇌 세포의 변화로부터 표상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통한 인식 자체가 의식의 활동이다. 따라서 인식의 대상은 내 속에 있는 어떤 현상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 있는 사물이다. 대상을 보는 동일한 정신이 또한 표상을 형성하는 정신이다. 둘 다 정신적 활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표상 가운데 우리 외부의 대상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관념적인 재현을 가진다는 것은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표상들을 사물의 양상, 외양, 형태, 기호, 상징 등으로 부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단어들 역시 상들이고 대부분 시각적 인식에서 차용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표상이 전체적으로 부분적으로 우리 외부의 현실 세계에 대한 신뢰할 만한 재현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인간 정신은 이러한 표상들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적인 지식은 감각이 아니라 지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 지성은 감각적인 인식들로부터 구체적인 것을 제거하고, 빛처럼 그것들 위에 비추어 그것들을 알기 쉬운 명료한 것으로 만들며, 그것들 가운데 보편적인 것을 알 수 있게 만들고, ‘가능한 지성’, 즉 지성적 지적 능력으로서 그 보편적인 것을 자기 안에 흡수하여 정신의 소유로 삼는다.

[69] 사실상 여전히 차이가 없었던 것은 감각적 인식이 아니라 지성이 학문의 기관이라는 사실이다. 경험론 역시 이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바코, , 스튜어트 밀이 전적으로 인정했던 점은 감각적 인식이 물론 일차적이지만 유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지성은 귀납법을 통해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을 도출하려는 시도라는 사실이다. 지성적 개념들과 현실 세계는 어떤 관계인가? 여기서 유명론과 실재론은 갈라진다.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의 논쟁은 스콜라적 까다로운 억지가 아니라, 근본적 의미에 대한 문제였다. 유명론은 경험론이라는 다른 형태로 다시금 현대 철학에 등장했다.

만일 유명론이 옳다면, 모든 학문은 끝난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둘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한 그룹의 사물들의 상응하는 특징들을 한 개념이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근거 없이 생겨나 이 단어들과 개념들은 현실적 가치를 전혀 대변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사물들은 실제상 서로 유사하여 공통적 특징들을 가지든지 할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개념들은 공허한 상념들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적 속성들의 총합으로 이름들이 아니며 사실들이다. 따라서 실재론이 또한 틀림없이 올바른 것은 실재론이 플라톤적 혹은 존재론적 의미의 사물에 앞서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사물 안에서’, 따라서 또한 사물에 뒤따른 인간 정신 안에서보편적 개념들에 대한 실재를 수용했을 때였다. 우리가 표상들을 개념들로 전환하고, 개념들을 다시 사고의 법칙에 따라 작업하여 실재와 일치하는 결과들을 얻는다는 것은 기묘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이 확신을 저버리는 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 확신이 오로지 기초할 수 있는 신앙은 우리 외부의 실재와 우리 안에 사고 법칙을 창조하고, 이 두가지를 상호 유기적 연관을 갖고 상응하게 한 이가 동일한 로고스라는 사실이다. 학문은 오직 이런 식으로만 가능하다.

모든 학문에서 세 가지 원리들은 구별되어야 한다.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은 본질적 기초원리. 하나님의 자의식 가운데 모든 사물의 관념들이 놓여 있다. 만물은 생각들에 기초하며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신적인 의식 가운데 있는 이 원형의 지식으로부터 자기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에게 모사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하되,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 가운데 있는 관념들을 보거나, 또는 우리가 태어날 때 이미 그것들을 받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들을 자신의 손으로 우리 정신에 펼쳐 보임으로써 한다. 따라서 피조 세계는 모든 학문에 대한 외적 인식의 원리.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상과 주체 사이에는 반드시 상응, 연관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 비추는 동일한 로고스가 또한 반드시 자신의 빛을 우리 의식에 비춰야 한다. 로고스에서 나와 사물들 가운데 있는 로고스를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은 지성, 이성이다. 이것이 내적 인식의 원리.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이 자신의 신적인 의식으로부터 진리의 지식을 피조물들을 통해 우리 정신에 전달한다.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한다.

 

12장 계시와 자연

 

 

[98] 계시론은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 이 둘과 대조되어 더 상세하게 밝혀져야 하고 옹호되어야 한다. 특별 계시는 초자연적인 것과 동일시되어 자연적인 것과 대립되었다. 성경의 계시는 이 자연과는 다른 더 높고 더 좋은 세상을 가정하며, 따라서 이 자연을 초월한 사물들의 질서가 존재함을 전제한다. 따라서 자연적, 초자연적 개념들은 선명하게 규명될 필요가 있다.

생성되다에서 유래한 자연은 일반적으로 외부로부터의 이상한 힘이나 영향을 받지 않고, 단지 그 자체의 내적인 힘과 법칙들에 따라 발전한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것이란 피조된 자연의 능력을 초월한 모든 것들로, 그 원인은 피조물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에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특별 계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에 그 근거를 두었는데, 그 행위는 평범한 자연 질서가 아닌, 그와는 구별된 사물들의 고유한 질서 가운데 계시되었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개념은 기독교 신학에서 점차 더 좁게 제한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창조와 구분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중생과 같은 영적 기적들과 구분되었다. 전자의 구분이 생긴 까닭은 초자연적인 것이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를 위한 것이며, 창조를 통해 존재하게 된 자연적 질서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으려면, 자연이 이미 앞서 존재할 때 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중생, 용서, 성화, 신비적 연합 등은 물론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들로 여겨진다 할지라도, 초자연적 계시로 고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교회 안에서 비범하고 드문 일이 아니라 일상적인 사물들의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교회 자체가 초자연적이지만 기적은 아니다. 심지어 초자연적인 것과 기적은 다시금 구별된다. 모든 초자연적인 것이 기적은 아니나, 기적은 항상 초자연적이다.

한편으로, 특별 계시는 창조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었다. 비록 초자연적인 계시가 타락 이후만 아니라 이미 그 전에도 있었기에, 그 자체로 자연과 모순될 수 없다고 인정될지라도, 이 점에 대해 충분한 관심이 주어지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특별 계시는 영적인 기적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은혜의 사역들과 대립되었기에 결국 재창조와 은혜로부터 격리되었다. 이러한 구분이 하나의 분리로 이해되었을 때, 특별 계시는 자연과 역사와 상관없이 완전히 그 자체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특별 계시가 하나의 교리로서, 이해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들에 대한 선포로서-이 신비들의 진리는 기적을 통해 확정되었다-이해되었을 때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특별 계시는 한마디로 말하면, 온 세상의 추가된 선물이었고 그렇게 지속되었다.

이러한 초자연적이고 이원론적 체계는 로마교에서 지속적으로 공교하게 발전했다.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순수 자연적인간은 사실상 타락 후 여전히 그러한 것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자연적 능력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에 관한 순수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며, 하나님께 대한 정상적이고 올바른 종의 관계에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더 높고, 초자연적인, 하늘의 목적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를 위해 반드시 타락 전후에 인간에게 추가된 선물들을 주어야 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에게 초자연적 은혜를 주어야 했으며, 인간은 그로 말미암아 다른 더 좋고 더 좋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다.

[99] 그러나 종교개혁은 인간에 대한 단일 사상, 단일 개념,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라는 개념을 가졌는데, 이 개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만일 좁은 의미에서 이 형상이 상실된다면, 이로 인해 인간의 본성 전체가 손상되고, 인간은 하나님의 요구와 자기 자신의 개념에 응답하는 어떤 종교와 어떤 윤리도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종교와 미덕은,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든, 근본적으로 부패했다. 순수한 자연종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까닭에 기독종교는 완전한 상태의 참된 종교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로써 아담 역시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과 신앙을 가졌고, 로고스는 당시에 화해의 중보자가 아니라, 통일의 중보자였으며, 성령은 당시에 모든 미덕과 능력의 저자였다는 것까지 말했다. 여기에 담긴 올바른 생각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으로 번갈아 바뀌는 변덕스러운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개념, 하나님의 속성과 형상, 그리고 따라서 종교 역시 단일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결국 이로부터 뒤따르는 사실은 계시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실체에 관해서가 아니라 방식에 관해서 필연적이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이런 점에서 계시란 자연과 절대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마교에서는 이 둘 사이에 양적 대립이 존재한다. 자연적 종교는 초자연적 종교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전혀 다른 두 개의 개념들이며, 완전히 구분된 두 가지 체계와 질서다. 은혜의 질서는 자연의 질서 위에 높이 올라선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 나뉜다. 세상은 세속적인 불경한 영역으로, 사탄이 자신의 더러운 영들로 지배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불경한 세상 한복판에 자신의 거룩한, 절대 오류가 없는 교회를 세우고, 교회에 은혜의 보물을 위임했다. 여기에 신인이 존속하며, 다스리고 일한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세계관을 반대했는데, 이 세계관은 중세 말엽에 한편으로 속박,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자연적인 것에 대한 염치없는 방종으로 귀결되었다. 종교개혁은 계시와 자연의 양적인 대립을 질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물리적 성격 대신에 윤리적 성격을 부여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계시는 이처럼 자연에 완전히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낯선 요소로서 창조에 들어온 죄에 대해서만 대립한다. 계시와 창조는 그 자체로 대립하지 않는데, 이는 창조 자체가 이미 계시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이미 타락 전에 있었다. 계시는 지금도 여전히 자연과 역사에서 일하는 하나님 손의 모든 사역 가운데 있다.

[100] 초자연주의가 오른편에서 자연을 부인하듯이, 자연주의는 왼편에서 계시를 정당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계시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는 일차적으로 현대 철학에서 시작되었다.

첫째, 합리론은 물론 초자연적 계시를 수용하되, 그 계시의 진정성과 의미를 이성이 결정한다는 경향을 의미했다. 둘째, 합리론은 초자연적 계시가 여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성만이 언젠가는 발견할 수 있는 진리에 관한 것이라는 견해의 명칭이었다. 그런 점에서 계시란 단지 일시적으로 우연히 필요한 것이다. , 계시란 단지 이성 종교의 보편적 지배를 위한 준비와 양육으로서 사용될 뿐이다. 그것은 이성이 달리 더 힘들게 오래 걸려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을 단지 더 빠르고 쉽게 해 주는 것일 뿐이다. 셋째, 합리론으로 알려진 신학은 모든 초자연적 계시를 부정하지만,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특별한 조처를 통해 사람들을 적격자로 삼아 인류가 더 좋고 순수한 종교적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있는 길들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수용한다. 마지막으로, 합리론의 명칭이 주어진 경향은 17세기 중반 이후로 자연주의라 불렸는데, 영국에서는 이신론 또는 무신론과 유물론으로도 일컬어졌으며, 그 경향은 모든 계시를 부정하면서 자연종교를 완전히 충분한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합리론이 계시에 대해 제기했던 논증들은 다음과 같다. (1) 계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계시란 하나님은 변하는 분이고, 하나님의 창조는 불완전하고 결함을 지니기에 개선이 필요하며, 하나님 자신이 단지 특별한 방법으로 일할 때만-그 외에는 한가한 하나님이다- 오로지 사역한다는 사실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2) 더 나아가 계시는 세상 편에서도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세상은 항상 어디서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간섭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깨뜨릴 수 없는 법칙체계에 의해 통제된다는 사실을 과학이 점점 더 발견했기 때문이다. (3) 비록 계시가 일어났다 할지라도, 계시를 받은 사람 자신과 더더욱 그 후세대 사람들에게 계시는 인식될 수 없고 증명될 수도 없다. 예언이나 기적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예를 들어 마귀로부터 왔는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계시에 대한 이런 기준들은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은 단지 인간적 권위를 믿고, 가장 숭고하고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인간을 의존한다. (4) 마지막으로, 계시는 인간의 이성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뭐라 하던 간에 모든 계시는 이성을 초월하는데, 이로 인해 계시는 또한 이성과 대립하고, 따라서 이성을 억압하고 광신주의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만일 계시가 이성을 초월한 무엇인가를 전달한다면, 계시는 우리 의식에 결코 흡수되어 동화될 수 없고, 알 수 없는 신비로서 계속 우리 의식 밖에 머무른다.

성경 가운데 우리에게 다가오는 계시는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사실들은 모든 자연주의적 혹은 합리론적 해설을 지속적으로 거부한다. 결국, 문제는 마치 계시란 오로지 확실한 사람들만을 포함하고, 그 사실들의 해석은 우리의 통찰력에 맡겨진 것과 같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계시 자체는 이 사실들을 독특하게 비춰 준다. 계시는 말하자면, 이 사실들에 대해 독특한 관점과 고유한 이론을 갖는다. 성경의 계시에는 말씀과 사실, 예언과 기적이 언제나 서로 협력한다. 둘 다가 필요한데, 이는 인간의 의식과 존재가 재창조되고 온 세상이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다. 말씀과 사실 둘 다는 계시 가운데 아주 긴밀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기에 다른 것 없이 하나가 수용되거나 거부될 수 없다. 그래서 계시에 대한 사실들을 자연주의적으로 해설하려는 모든 시도는 지금까지 언제나 성경의 초자연적 세계관과 자연주의자들의 세계관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벌어져 둘 사이의 중재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계시의 인정 여부는 결국 신앙의 문제로서, 초자연적 견해도 자연주의적 견해도 모든 어려움을 제거하거나 모든 반대를 해소할 수 없다는 사실로 충분히 증면된다. 자연주의적 관점은 소수의 기적 설화들을 그 자체로 취하고 전체에서 따로 격리시킬 때 강력해 보인다. 하지만 그 전체 자체는, 즉 계시 체계와 그 가운데 다시 그리스도의 인격은 그 관점에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거침돌이다. 그 반대로, 초자연적 관점도 계시의 모든 구체적인 사실들과 말씀들을 전체 질서에 끼워 맞추는 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전체적이 계시가 체계적인 통찰과 놀라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101] 성경의 세계관과 대립하고 원리적으로 반드시 모든 계시를 반대해야 하는 세계관은 일원론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 일원론은 그 범신론적 형태와 유물론적 형태에 있어서 자연에서 인지할 수 있는 모든 능력, 물질 그리고 법칙들을 단 하나의 힘, 물질 그리고 법칙으로 축소하려고 애를 쓴다. 유물론은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기계적 법칙들을 따라 작용하고 연결과 분리를 통해 모든 사물들과 현상들을 발생하고 소멸하게 하는 단지 질적으로 동일한 원자들만을 수용한다. 범신론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동일하고 어디서나 동일한 논리적 법칙을 따라 변경되고 변형되는 단 하나의 실체만을 인정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일원론이 아니라 유신론이며, 자연주의적이 아니라 초자연적이다. 이러한 유신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실체의 다수, 힘과 물질과 법칙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 정신과 물질, 심리적 현상들과 물리적 현상들, 윤리적 현상들과 종교적 현상들 사이의 구분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결합하고 연결하는 조화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 결과는 하나님의 창조적 사고에 관한 것이다. 그 목표는 단일성이나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초자연적 계시는 이와 같은 세계관과 절대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서 자연은 한순간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고,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인다. 자연 가운데 나타난 모든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이 자연에 주입했던 법칙을 따라 작용한다. 하나님은 내부에서 나오는 힘으로 사역하고, 기존의 능력들과는 성격과 효과가 다른 새로운 능력들이 활동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더 높은 능력은 그보다 낮은 능력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나란히 그리고 그 가운데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다. 문화 전체는 하나의 힘인데, 인간은 이를 통해 자연을 다스린다. 유사하게 새로운 신적인 능력이 계시, 예언과 기적 가운데 활동하는데, 우주 안에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저급한 능력들과 그 법칙들과 절대 모순되지 않는다. 소위 기적으로 인한 자연법칙의 중지란 있을 수 없다. 진실로 심지어 인과법칙은 무효화되지 않는다. 비록 화덕의 불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불태우지 못했을지라도, 그 불 가운데는 여전히 사르는 법칙이 지속된다. 기적은 자연에 내재한 능력들과 작용 법칙들을 바꾸지 못한다.

[102] 기적은 외부로부터 기존 세상을 어지럽히기 위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개념자체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타락한 자연을 회복시키고 완전하게 하는 데 사용된다. 진실로 예언과 기적은 심지어 죄가 없었다 할지라도 세상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초자연적인 것은 타락으로 인해 비로소 필연적이 된 것이 아니다. 계시와 기적 그 자체가 현재 지니고 있는 구원론적 성격은 죄로 인해 생겨난 필연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심지어 기적조차 타락한 창조 세계에 첨가된 낯선 요소가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전적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세상 개념과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정한 때에 수행할 세상 계획에 포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는 일반적인 자연 질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물들의 질서를 형성한다. 한편으로 자연과 계시의 연관을 유지하는 것이 필연적인 것처럼, 다른 한편으로 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고수하는 것도 동일하게 필요하다.

계시란 자연 전체와 격리되어 시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개별적 행동이 아니라, 자연과 구별되나 자연을 구성하고, 자연과 연관되고, 자연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세계 그 자체다. 낙원에서 시작하여 비로소 재림으로 끝나는 이러한 계시 체계에는 여전히 모호하고 설명되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 하지만 주요한 줄거리는 간추려질 수 있다. 예언과 계시의 역사 가운데에는 순서와 발전이 드러난다. 심지어 계시는 자신의 고유한 법칙들과 규칙들을 가진다. 이것들을 추적하고 계시의 역사 가운데 숨겨진 체계를 발견하는 것이 계시 역사의 멋진 임무다. 하지만 많은 사실들이 전체에 대해 갖는 그 참된 의미와 연관은 아직까지 파악되지 못했다.

 

13장 계시와 성경

[103] 종교는 일차적으로 관념들, 가르침, 교리를 내용으로 삼는데, 이는 계시로 말미암은 것으로 언어로 표현되고, 전통을 통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고, 마지막으로 경전에 기록되어 보존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 역사에 대한 가장 거대한 개념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세상 역사 가운데 성경 자체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따라서 역사적 진리들은 우연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계시 역사도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계시 역사는 아주 필연적이어서 계시 역사 없이는 역사 전체와 인류 전체가 붕괴된다. 역사는 하나님의 생각의 전달자이며, 사도 바울이 반복해서 경탄과 경배로 가득했던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묵시다.

[104] 인류의 이상적 자산의 전달자는 언어이며, 언어의 육체는 글이다. 이런 점에서 계시의 하나님도 자신을 포함시켰다. 계시는 인류 안에 완벽하게 개입하여 인류의 완전한 소유가 될 수 있도록 성경의 형태와 양식을 취했다. 로고스 자체는 단지 인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과 육신이 되었다. 계시의 말씀도 역시 글이라는 불완전하고, 부적절한 형태를 취했다. 하지만 계시는 오로지 이런 식으로 인류의 유익이 되었다. 계시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계시의 중심이며 수단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이 다시 그 피조물 가운데 거하고 우주 가운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계시의 말씀은 글로 옮겨졌다. 따라서 성경 역시 수단이자 도구지, 목적은 아니다. 성경도 역시 계시 전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일시적 행동이다.

이로 인해 성경과 계시의 관계가 선명해진다. 과거의 신학은 계시를 거의 전적으로 신적 영감, 성경의 은사에 포함시켰다. 계시를 단지 지나가듯 언급했고, 너무 좁게 이해했다. 계시는 꿈과 이상 등의 다양한 형태들로 발생했고, 감추어졌던 것을 알리고자 한 것이 목적이었다. 신적 영감은 언제나 인간의 의식 가운데 일하는 성령의 내적 사역이었고, 성경 내용의 보증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현대신학은 올바르게 계시와 성경 사이를 구분했다. 하지만 그것은 종종 다른 극단에 빠지곤 했다. 현대신학은 성경을 계시에서 완전히 분리함으로써, 성경은 계시에 대한 하나의 우연한 부록, 임의적 첨가물, 인간적인 기록에 불과한 것으로, 아마도 유익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주제는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칭송되었다. 문자가 아니라 성령이, 성경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이, 말씀이 아니라 사실이 신학의 기초 원리다. 이러한 관점은 다른 관점에 비해 잘못이 적은 것이 아니라, 심지어 더욱 위험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계시와 신적 영감은 많은 경우에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전에 계시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고, 다만 기록자의 의식 가운데 기록 당시에 나타난 것이었다. 누구든지 신적 영감을 부인하고 성경을 멸시하는 자는 또한 아주 상당 부분의 계시를 잃을 것이다. 그 결과 그에게는 오로지 인간적인 글들만이 남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계시란 기록에 선행하는 사실이든 말씀이든,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진다. 우리는 이스라엘 가운데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문자 그대로는 전혀 모르고, 다만 성경을 통해서 알 뿐이다. 다른 기초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계시, 그리스도의 인격 역시 성경과 운명을 같이한다.

[105]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는 전체적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비로소 그 마지막 목적에 도달한다. 계시의 최종 목적은 계시 자체도, 중보자인 그리스도도 아니라, 새로운 인류, 즉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시는 한 번 발생했다가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한 가지 사실일 수 없고 사실이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성경을 통해 계시를 세상에 전달하며, 인류의 삶과 생각 가운데 계시의 내용을 실현한다. 계시 자체는 현현, 예언, 기적을 통해 발생했다. 이러한 세 가지 종류에 대해 하나님은 인류가 계시의 내용을 소유하도록 세 가지로 사역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자신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처하는데,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한가운데 계신다. 하나님은 항상 기적을 행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중생, 성화, 영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영적인 기적들은 그치지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일하기 때문이다.

 

16장 내적 원리의 의미

 

[131] 종교적 신앙과 또한 기독교 신앙의 토대들이 아주 다양하게 진술되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신앙에 이르고, 그가 왜 믿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은 아주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자기 안에, 자기 자신의 본성에 종교적 표상, 계시, 성경을 분별하고, 판단하며 수용할 충분한 요소들을 소유한다고 생각했다. 계시를 판단하고 수용하는 기관은 번갈아 가며 지성에서 추구되었다. 그래서 신앙은 역사적, 변증적 근거들에 기초한다. 혹은 이성이 그러한 기관으로서 지적되기도 했다. 그래서 신앙은 사색적인 논증 위에 세워졌다. 혹은 양심, 감정, 마음이 신적인 것에 대한 기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신앙은 종교적 경험 혹은 윤리적, 실재적 동기들에 기초했다. 이 모든 방법들이 진리에 대한 어떤 중요한 요소를 포함하고 변호할지라도, 그 방법들은 신앙의 가장 깊은 밑바탕, 그래서 또한 신학의 참된 내적 원리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사람이 단순히 지성과 이성, 마음과 양심을 통해 종교적 지식과 확실성에 도달했다고 말할 때, 심리학적 그리고 인식론적 정확성이 결핍된다. 이 모든 기관들이 종교적 내용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기 전에, 이러한 종교적 내용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이며, 어떤 기관을 통해 사람이 그것과 접촉하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응답되어야 한다.

만일 종교가 그 속성상 고유한 외적 인식의 원리를 갖는다면, 이와 더불어 인간 내부에도 반드시 고유한 내적 인식의 원리가 일치되어야 한다. 마치 눈이 빛에, 귀가 소리에, 우리 내부의 로고스가 우리 외부의 로고스에 상응하듯이, 인간의 주관적 기관은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에 반드시 호응해야 한다.

성령은 객관적으로 성경 안에서, 주관적으로 인간 자체의 영혼 가운데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강력한 증인이다. 인간은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외적인 계시에 대한 적합한 기관을 부여받는다.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 알 수 있다. 빛은 오로지 자신의 빛 가운데서만 볼 수 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종교와 신학의 본질적 기초원리.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객관적 계시는 종교와 신학의 외적 인식의 기초원리. 그리고 교회에서 쏟아 부어져 교회를 거듭나게 하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성령은 종교와 신학의 내적 인식의 기초원리. 계시는 이러한 성령의 증거를 통해 인류 안에 실현되고 그 목적을 달성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관적 계시는 충분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주관적 계시에서 지속되고 완성되어야만 한다. 그렇다, 전자는 단지 수단인 반면, 후자는 목적이다. 외적 원리는 도구적 원리이며, 내적 원리는 형식적 원리이자 주요한 원리다.

17장 역사 변증적 방법

[133] 스콜라주의는 신앙에서 출발했으나, 신앙의 진리를 이성의 내용으로 삼으려는 시도 가운데 자연적 진리와 초자연적 진리 사이를 분리했는데, 그 분리는 그 둘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전자는 이성을 통해 증명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오로지 권위에 의해서만 수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학문은 전자에서 가능했던 반면, 후자에서는 오로지 신앙의 여지만 있었다.

로마교에서 초자연적 계시는 자연적 계시의 토대 위에 수립되었다. 오로지 연속적 단계를 통해서만 초자연적 계시에 도달된다. 인간은 순전히 자연적인 것들에 있어서 먼저 증거들을 통해 자연신학에 이른다. 자연신학은 신앙의 전제다. 여기서는 심지어 학문도 가능하다. 증거는 설득력을 지닌다. 그 자체로 여기서 신앙은 아직 언급되지 않는다. 여기까지 도달하여 자연신학의 토대 위에 선 사람은 이제 더 나아가 신앙 가능성의 동기들, 특히 교회의 표시들과 표지들을 통해 계시의 신빙성을 이해하고 신앙의 합리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인간적 믿음이 획득되고, 인간이 예비적 행동을 통해 자신을 준비했다면, 그는 주입된 은혜 자체로 말미암아 초자연적 질서에 수용될 것이며, 그는 선행공로를 통해 다시금 천국, 하나님과의 대면을 준비한다.

이제, 종교개혁은 원칙적으로 이러한 로마교의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다른 입장을 취했다. 종교개혁은 자신의 입장을 연속적으로 신앙의 단계로 이끄는 자연적 이성에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서 취했다. 종교개혁은 나중에 증명될 것처럼 가능한 한 단호하게 선언하기를 그러한 신앙은 오로지 하나님의 권위에만 의지하며, 오로지 성령에 의해서만 활동하게 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 원칙을 항상 확고하게 취했던 것은 아니었고, 계시의 진리에 대해 자주 자연신학과 역사적 증거들의 교리로 되돌아가곤 했다. 칼빈은 자신이 성경의 신성을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고, 그에 대한 다양한 근거들을 제시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신학자들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행했다. 이런 증거들이 최소한 인간적 믿음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확신은 본의 아니게 이성을 신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연신학과 성경에 대한 교리들을 구원얻는 신앙 밖에 위치시키는 데 기여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개신교회 내에 합리주의가 시작되었다. 소시누스주의는 성령의 증거를 거부하고 기독교의 진리를 역사적 증거들 위에 정초했다. 이들은 신학을 신앙으로부터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해방시키고, 객관적, 역사 비평적 연구를 통해 기독교 지식을 얻고자 노력했다.

[134] 변증학은 신앙에 선행할 수 없으며 계시의 진리를 선험적으로 주장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변증학은 진리와 진리에 대한 신앙을 전제한다. 변증학은 서론적 부분, 또는 원리적 혹은 근본적 학문으로서 신학과 교의학에 선행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신학적 학문으로서 신앙과 교의학을 전제하고, 이제 교리가 노출된 반대에 대항하여 그 교리를 주장하고 변호한다.

그러나 변증학의 잘못은, 자주 수행되었던 것처럼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있다. (1) 변증학은 스스로를 기독교 신앙에서 분리하여 신학의 외부, 신학의 위에 그리고 신학 앞에 두었다. (2) 변증학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을 분리 하여 종교적 진리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자연신학, 주해적, 역사적 신학 등에서) 순전히 지성적 증거들에 기초하게 되었다. (3) 그 결과, 변증학은 마치 지성을 통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고, 논증을 통해 경건을 산출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학문적 작업으로부터 지나친 기대들을 바라게 되었다.

18장 사변적 방법

[135] 헤겔의 정신은 그 교리들에 집중하여, 그로부터 그 역사적, 상징적 형태들을 제거하고, 그 교리들의 관념을 추적했다. 역사는 단지 껍질, 껍데기일 뿐인 반면, 핵심 자체는 깊고 참된 철학이다. 하나님, 미덕, 불멸과 같은 합리주의적 교리들이 아닌, 삼위일체, 성육신, 속죄와 같은 기독교의 최고로 높고 심오한 교리들이 대담한, 철학적 사변의 대상이 되었다. 이 교리들은 성경과 그 어떤 권위와도 상관없이 이성으로부터 필연적인 것으로 도출되었고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증명되었다. 신학과 철학은 표면상 화해된 것처럼 보였고, 신앙은 사변적 이성을 통해 절대적 지식으로 바뀌었다. 이 사변적 방법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채용되고 교의학에 적용되어, 과연 아주 다양한 결과들을 낳았다. 비더만은 기독교 교리들에서 출발하여 이 교리들을 헤겔과 동일한 방식으로 교리들의 밑바탕에 놓인 종교적 원리와 그 교리들이 취한 역사적 표현으로 분해하고, 더 나아가 사변적으로 그리고 실재적으로 더욱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이런 과정에서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 존재와 지식의 궁극적 토대들에 대한 지식을 경험으로부터 엄밀한 논리적 추론을 통해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길을 통해 세계의 밑바탕에 대한 추상적,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여, 그 가운데서 종교적 진리의 핵심을 결정짓는 절대자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차이란 단지 신자가 그 진리를 표상으로 갖는 반면, 교의학자와 철학자는 그 진리를 개념들과 관념들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중재신학은 슐라이어마허와 더불어 그 입장을 교회의 의식, 신앙, 신앙고백에 두었으나, 거기에 헤겔의 사변적 방법을 연관시켰다. 이는 이를 통해 신앙을 지식의 수준으로 올리고, 권위로 하여금 독립적인 합리적 통찰력에 자리를 내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로데에게 있어서 중재신학의 이러한 사변적 방법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신 의식은 관념으로, 이 관념에서 그는 헤겔적 변증법의 도움으로 창조 전반, 자연, 역사, , 구원을 도출한다. 어쨌든 중재신학자들 가운데 다양성이 많으나, 그들 모두의 출발점과 방법은 서로 공통적이다. 그들은 어떤 권위가 아니라, 교회의 기독교적 의식에서 출발하며, 신앙의 진리에 대한 증거를, 어떤 권위에 대한 호소에서가 아니라, 내적인 자명함, 사고의 불가피성에서 찾는다.

[136] 이러한 사변적 방법은 합리주의적 시대의 변증적 방법보다 중요한 장점들을 가진다. 18세기에 진리의 척도로 여겨졌던 선명성은 계시를 하나의 교리로, 교회를 하나의 학교로, 중생을 도덕적 개선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나사렛의 현인으로 바꾸었다. 계몽된 인간은 계시와 종교, 교회와 신앙을 경멸하여 외면했다. 슐라이어마허와 헤겔이 했던 것처럼, 교회와 교회의 교리들로 되돌아가 거기서, 단지 어떤 의미에서든, 심오한 종교적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선명성에 대한 합리주의적 요구와 결별하고, 멸시받는 공동체의 종교를 변호하며, 다시금 기독교 신앙의 정당성과 가치를 선언한다는 것은 도덕적 힘의 표시였다. 더 나아가, 헤겔과 슐라이어마허의 출발점에는 멋진 진리가 담겨 있었다.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서로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고 상응되었다. 합리주의는 건전한 지성이라는 자격 없는 법정 앞에서 종교를 정당화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헤겔과 슐라이어마허 둘 다 종교란 인간의 삶 가운데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며, 종교는 독특한 현상이기에 인간 본성에 상응하는 고유한 기관을 지적하는 데 있어서 서로 달랐다. 전자는 그 기관을 이성에서 후자는 감정에서 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통속적인 합리주의를 초월했고, 주관과 객관의 조화를 지적했다. 만일 그들의 주관적 출발점이 이것만 의도했다면, 합리주의에 대한 그들의 승리는 단지 일치될 뿐이었다. 하지만 헤겔과 슐라이어마허는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이 서로 상응한다는 명제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인 이 둘을 동일시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동일시한 것은 사변적 철학의 첫 번째 잘못이다. 하지만 사고와 존재 사이에 여전히 커다란 일치가 있다 할지라도, 적지 않은 본질적 차이가 있다. 어떤 결론도 사고에서 존재로 귀결되지 않는 까닭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는 사고의 발산이 아니라 힘의 행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사물들의 본질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존재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은 존재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헤겔 철학은 원래 나타났던 것처럼 그렇게 해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가 비자아를 전제하고, 주관이 객관을 창조하는 피히테의 명제를 발전시키고 적용한 것이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에서 이 원리로 되돌아갔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종교의 모든 권위는 무너졌으며, 기독교에 대한 합리적이고 역사적인 증거들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또한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성을 통해 알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칸트가 순수이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잃었던 것을 실천이성을 통해 회복하고자 했던 것처럼, 슐라이어마허 역시 종교적 주체, 감정, 의식에서 출발하는 것 외에는 종교를 구출할 방도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는 거기서 멈추어 설 수 없었다. 우리는 종교에서 현실이 아니라 진리를 취급한. 그러므로 기독교의 정당화는 [신학]백과 첫 부분의 철학에 위탁되었다. 기독교 신앙이 기초할 다른 근거가 더 이상 없었기에, 철학은 종교의 정당성과 가치를 주장할 임무를 획득했다. 중재신학은 슐라이어마허의 주관적 출발점을 이어받아, 슐라이어마허가 종교적 진리의 변호를 위해 그려 놓은 자취를 따랐고, 그래서 자연히 헤겔의 변증법적, 사변적 방법과 연관을 맺게 되었다. 중재신학은 기독교적 의식의 내용에 대한 경험적 지식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한 지식은 결국 학문이 아니었다. 단지 신앙의 사실이 반드시 확인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타당성과 진리 또한 반드시 논증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다른 증거를 갖지 않았기에, 사변을 피난처로 삼았다. 슐라이어마허 이후 등장한 사변신학은 권위에 근거하고 신앙을 통해 획득된 것보다 더 높은 기독교 지식을 추구했다. 그것은 옛 영지주의의 현대판이었다.

19장 종교적 경험적 방법

[138] 일반적으로 프랑크는 이제 한 사람이 기독교적 신앙의 진리들에 관해 확신을 갖는 것은 역사적 혹은 합리적 증거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마찬가지로 성경, 교회나 전통의 권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중생의 경험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프랑크는 마치그리스도인이 이전에는 그리고 다른 길을 통해서는 기독교 교리를 전혀 몰랐던 것처럼, 중생 경험에서 시작하여 점차 모든 기독교 교리에 이르게 했다. 그런 식으로 프랑크는 모든 교리들, , 죄책감, 하나님, 삼위일체, 성육신, 부활 등을 취급했다. 우리는 마치 이 모든 진리들이 성경과 교회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의 중생 경험에서 도출될 수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프랑크가 그리스도인의 확신으로부터 객관적 교리들을 수립하는 방법은 기독종교와 신학에서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다. 그것은 사변철학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변철학이 자신의 출발점을 일반적 원리, 그리고 전적으로 추상화된, 모호한 원리에 두었던 것처럼, 모든 객관적 요인들로부터 분리된 그리스도인의 자기의식, 그의 확신 그 자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또는 프랑크의 [아르키메데스적 출발점인] “나에게 설 자리를 주시오.”라는 선언과 마찬가지다. 이 방법은 또한 모든 기독교적 경험과 모순된다.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결코 객관적 진리를 그런 식으로 확신하지 않았다. 이 방법은 완전히 비현실적이다. 게다가, 이것은 비실재적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의심과 불신 가운데, 프랑크가 말했던 그리스도인에게 자기 신앙의 객관적 진리를 보증할 수 있는 유일한 확신, 바로 그 확신을 놓치기 때문이다. 그런 때에 그리스도인은 바로 자신을 유지하며, 자신을 꽉 붙들어 매고, 깊은 의심과 시련에서 다시금 끌어올릴 수 있는 객관적인 말씀, 객관적 행위를 필요로 한다.

20장 윤리 심리학적 방법

[141] 윤리 심리학적 방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란 일반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 교리라든가 증명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겨냥한 종교적, 윤리적 힘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법은 기독교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수용될 수 있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지만, 사람 안에 선행하는 도덕적 상태, 선에 대한 성향, 구원의 필요, 불만족감 등을 요구한다. 그래서 만일 기독교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기독교는 논증과 증명 없이 그 사람의 양심에 스스로를 신적 진리로서 추천한다.

 

33장 하나님의 경륜

 

[232] 하나님의 순수 내재적 사역들은 하나님의 존재 밖에 있게 될 피조물들에 연관된 것과 구분된다. 이것들은 다시금 하나님의 내적 사역들과 외적 사역들로 나뉜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작정이라는 명칭으로 지칭되고, 모두 하나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 포함된다. 이 작정은 신전 존재의 내재적 사역들과 창조와 재창조의 외적 사역들 사이의 연관을 수립한다. 그와 같은 작정은 세 가지 특징들을 지닌다.

첫째,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된 것은 말하자면 단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깊이에 대한 하나의 대요, 요약일 뿐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가능하나, 그것들 모두가 현실 가운데 발생한 것은 아니다. 둘째,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기초한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 대한 생각들을 자기의 외부에 세상 가운데 부득이 실현시킬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한다. 셋째, 작정의 개념 가운데 포함된 것은 때가 되면 실현될 것이다. 비록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는 존재로서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작정으로 인하여 세상의 창조와 보존은 필연적이다.

성경은 이러한 작정을 우리에게 추상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역사 자체 가운데 제시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며, 자신의 주님 됨을 만물의 창조, 보존, 통치 가운데 매일 드러낸다. 이것은 선택과 유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선택과 유기는 구약 성경에서 영원한 작정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모든 페이지에서 역사적 사실로 등장한다.

비록 이러한 선택이 구약 성경에서 주로 역사적 사실로 나타나고, 따라서 소명 자체와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에 기초한다.

[233] 하나님의 뜻은 특히 구속 사역과 연관된다. 신약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자세하게 묘사하기 위한 용어들이 풍성하다. 신약 성경은 기뻐함, 계획이나 목적, 예지, 선택, 예정을 언급한다. 따라서 용어들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계획이나 목적 하나님이 구속 사역에서 자의적이거나 우연하게가 아니라 확고한 계획, 불변하는 목적을 따라 일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선택 이것을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그 불변하는 목적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 따른 계획이나 목적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구원 얻음을 가리킨다. 예지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하는 뜻 가운데 있는 대상인 사람들에 관심을 두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단순한 예지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재적 기쁨의 대상이다. 반면에 마지막으로 예정 하나님이 사용하는 수단들에 보다 더 관련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아신 자들을 그들의 확정된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수단들이다. “계획이나 목적은 사건의 확실성을 가리키고, 예지는 사람들의 개별적 독특성을, 예정은 수단들의 질서를 가리킨다.” 선택은 목적에 의해 확실하며, 예지에 의해 결정되었고, 예정에 의해 배열되었다.” 비록 이 영원한 목적이 복합어를 구성하는 접두어 프로προ, 앞에, 미리 에 이미 자동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에베소서 311, 디모데후서 19절에는 분명하게 선언되었다.

[234] 기독종교 밖에서도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 철학은 번갈아 가며 범신론적 결정론이나 이신론적 자유론에 이르렀다. 유대인들은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있다고 여겼다.

초대 기독교회는 이교의 숙명론과 영지주의적 자연론에 대항하여 인간의 도덕적 본성, 자유와 책임을 매우 강조했기에,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정당하게 다룰 수 없었다. 인간이 비록 죄로 인해 다소 부패되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자유로우며, 하나님이 제공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절대적 예정과 불가항력적 은혜는 가르쳐지지 않았다.

비록 펠라기우스가 고대 신학자들의 표현 방식을 따를지라도, 그의 합리주의와 금욕주의적 도덕주의는 과거에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인정되었던 교리, 즉 원죄, 죄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죽음 등과 같은 교리적 요소들을 경시했다. 펠라기우스의 출발의 전제는 하나님이 선하고 의로우며,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도 역시 그 본성상 반드시 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본성은 특히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자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형상을 구성하는 자유의지에 해당된다. 이 의지를 통해 인간은 영광스럽고도 상실될 수 없는, 선과 악 모두를 행할 자유를 지닌다. 이러한 개념들로부터 맨 처음 흘러나오는 것은 아담의 타락이 그의 후손들에게 전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원죄란 없다. 죽음이란 죄의 형벌이 아니고, 보편적이고 자연적이다. 죄가 엄청나게 확대된 사실은, 사람들이 악한 예를 모방했기 때문이라고 해설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엄격히 말해서 죄는 결코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견해에 있어서 은혜란,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먼저 인간에게 자연적 능력을 주었고, 더 나아가 공로에 따라, 즉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선용하는 사람들에게 도덕법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 가운데서 신적 도움을 제공한다는 사실에만 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입장에서 예정이란, 오로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들과 공로들에 대한 하나님의 예견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형벌의 예정만 남을 뿐이다. 따라서 사실상 은혜나 구원을 위한 하나님 편에서의 예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반펠라기우스주의에서 카시아누스는, 죄가 인간의 본성을 부패시켰다고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죽은 것이 아니라 병든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죄 있는 사람은 은혜를 받을 자격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을 수는 있으며, 은혜의 도움을 받아 인내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받아 그 가운데서 인내하게 될 자들로서 자신이 미리 보았던 자들에게 그 은혜를 주시며, 그들 가운데에는 어린아이들과 민족들도 포함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리라는 것을 자신이 미리 보았던 자들에게는 그 은혜를 보류하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펠라기우스 논쟁 오래전에 예정을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지와 예정을 구별했는데, 예지가 예정보다 더 넓은 범위를 지닌다. 예정했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장차 행할 것을 예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정은 공로나 가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은혜에 따른 것이며, 믿음 때문이 아니라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도록 선택되었다.” 예정의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있다. 따라서 예정과 나란히 유기가 언급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기를 자주 예정으로 여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예정이란 항상 적합한 예정, , 구원으로의 예정과 따라서 은혜로의 예정이다. 예정된 자들 가운데에는 아직 믿지 않거나,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 까지도 속한다. 하지만 그들의 수효는 확정되어 변하지 않는다. 이제 왜 하나님이 단지 어떤 사람들만 구원하고 다른 이들은 멸망하게 버려두는지는 신비다. 이것은 부당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어떤 빚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정이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인 것처럼, 유기는 공의의 행위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자신의 미덕들을 계시한다.

[235] 로마교는 트렌트에서 다음과 같은 교리를 확립했다.

(1) 자유의지는 과연 죄로 인해 그 능력이 미약해지고 저하되었으나, 사라지고 제거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칭의를 받기 이전에 여전히 많은 자연적인 것들, 즉 결코 죄악이 아닌 참으로 선한 것들을 할 수 있다. (2) 원죄로 말미암아 추가된 선물들을 상실한 자연적 인간은 초자연적 의미의 선, 즉 믿음, 소망, 사랑, 칭의,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이를 얻기 위해 그는 자연적 능력과 율법의 가르침 이상의 것이 필요한데, 신적 은혜, 성령의 선행적 영감을 필요로 한다.” (3) 이러한 신적 은혜는 신자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세례 가운데서 주어지고, 성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복음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그들을 부르고, 주관적으로는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이 은혜는 공로 없이 주어진 것이며, “값없이 주어진 선행적 은혜다.” (4) 그러나 이 은혜는 불가항력적이지 않다. 이 은혜는 물론 인간을 소생시키고, 그를 돕고 감동시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칭의로 돌이키고 그 은혜에 자유롭게 동의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5) 칭의의 주입된 은혜는 계속 저항을 받고 상실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은혜가 수용되고 보존되었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며, 재량공로에 따라 영생을 얻게 한다.

[237] 개혁파 신학자들은 예정을 사변적 방법으로 선험적, 철학적, 결정론적 신개념으로부터 도출하고, 다른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장 엄격한 칼빈주의자들 역시 신론과 하나님의 작정 교리에서 다름 아닌 성경의 교리,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혁파에게 있어서 예정은 단지 인간론적, 그리고 구원론적 중요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특히 신론적 중요성도 지닌다. 예정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람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238] 개혁파 내부에서 또 다른 차이가 곧이어 발생했는데,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차이다. 펠라기우스주의에 있어서 작정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인간 창조의 작정, (2) 예지되었으나 예정된 것은 아닌 인간의 타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게 하며, 그들 모두에게 [구원을 받기에] 충분한 은혜를 주려는 작정, (3) 한편으로 예지된 신앙과 인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예지된 불신앙에 근거하여, 어떤 사람들을 영생으로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을 영벌로의 운명에 결정한 작정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그 순서는 전혀 달랐다. 그는 때때로 유기를 예정에 포함시키나, 심지어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도, 예지를 소극적으로나 수동적으로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뜻은 결국 사건들의 필연이기 때문이다. 유기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라는 타락전 선택설의 사상은 여기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타락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예지허용을 언급한다. 그래서 창조와 타락에 대한 허용의 작정이 첫 번째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선택과 유기의 두 번째 작정이 뒤따른다. 선택과 유기 모두가 타락한 인류, 부패한 집단을 전제한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작정의 순서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타락후 선택설이다. 그는 유기를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위로 여긴다. 원죄만이 선택과 유기의 작정 앞에 선행한다. 원죄는 유기에 대한 충분한 근거다. 자범죄는 비록 형벌의 정도를 정하는 데 있어서 고려될지라도, 유기의 작정에서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죄가 유기의 충분한 근거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궁극적이고도 가장 큰 원인은 아니다. 왜 하나님이 어떤 이들을 버리고, 다른 이들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하나님의 뜻과 기쁜 뜻 외에는 다른 대답이 없다. 마지막으로, 그래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들과 관련한 세 번째 작정이 뒤따른다. 하지만 유기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방편의 작정에 관한] 이 선을 계속 긋지 않는다. 물론 그는 하나님이 죄 가운데서도 적극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행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죄의 섭리자로서, 죄가 있어야 하는 것을 좋게 여겼으며, 죄를 죄로 벌했다. 하지만 그는 유기를 주로 소극적으로 묵과하고 내버려두는 것으로서 제시하여 대개 예정에 속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예정을 선택과 동일시하여 선택과 유기 둘 다를 섭리아래 둔다. 다른 한편으로, 구원을 위한 방편들에 대한 예정은 분명히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예정 또는 선택은 항상 영광으로의 예정이며, 이 예정은 자연히 은혜로의 예정을 수반한다. 따라서 선택은 예지된 신앙이나 예지된 선행 때문에 발생하지 않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선택은 궁극적 목적을 위한 선택이며, 따라서[이 목적의 실현을 위한] 방편들의 선택이다. , 그리스도 자신도 예정되었고, 이와 같이 부르심, 세례, 신앙, 견인의 은사가 선택되었다. 예정은 은혜에 대한 준비다. 따라서 선택된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길을 따라 반드시 천상의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많은 추종자들은 나중에 이중 예정 교리에 이르렀다. 사망으로의 예정이 영광으로의 예정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러나 사망으로의 예정은 영광으로의 예정과 동일한 의미에서 이해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소극적[선행적] 유기와 적극적[후행적] 유기로 구별되었다. 그래서 소극적 유기는 타락에 선행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 이것은 선택과 마찬가지로 응보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이러한 타락전 선택설의 유기는 전적으로 소극적[선행적]으로, 일부의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고, 그 사람들의 타락을 허락하고, 그 타락 후에적극적[후행적]유기 영벌의 운명에 처하게 하는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해되었다. 본질적으로 루터, 츠빙글리, 칼빈 그리고 모든 타락전 선택설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바로 이것을 가르쳤다.

종교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의 가르침에서 수정했던 사항들은, 구원의 확신 교리 외에, 부차적인 것으로, 문제의 본질은 손대지 않았다. 그들처럼[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처럼] 종교개혁자들은, 선택이란 예지된 공로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선행의 원천이며, 영광으로의 예정은 반드시 은혜로의 예정을 수반하며, 소극적[선행적]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의 행위로 해석될 수 없고, 다만 반드시 죄에 선행하는 주권적 행위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이 소극적 유기는 결과적으로 죄를 허용하며, 어떤 이들을 자신들의 타락 상태에 그대로 내버려 두는 작정을 포함하고, 적극적[후행적] 유기는 이 죄와 연관된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에 자주 덧붙이기를, 예지와 허용의 개념들은, 비록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닐지라도, 순전히 피동적으로 이해될 수도 없으며 그렇게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이해될 경우, 최소한의 해결도 제공하지 못하기에 소극적 유기와 적극적 유기의 구별은 거의 가치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로 인해 세 명의 개혁자들 모두 소위 예정론의 타락전 선택설에 이르렀는데, 이것에 의하면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타락, ,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에 관한 작정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로 여겨져야 했다.

칼빈은 특별히 타락후 선택설의 방식으로 추론하면서 자주 의도적으로 계속 구원과 저주의 직접적인 원인들을 주목하였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칼빈은 이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죄가 유기의 가까운 원인을 수는 있으나, 그것이 궁극적 원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이 먼저 계획도 없이 인간을 창조하기로 작정하고, 그 뒤에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지켜보고 기다렸다가, 그 다음 이것을 미리 알고 난 뒤에서야 선택과 유기를 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지와 허용은 그 어떤 해결도 제공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미리 알고서 그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원하여 타락을 허용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이것을 좋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 일반적으로 죄와 모든 악은 단지 하나님이 예지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원하고 결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을지라도, 왜 하나님이 타락을 원했는지에 대한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타락에 선행하는 더 높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그래서 칼빈의 입장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인간의 타락에 선행하는 택자들과 유기자들 사이의 구별이 있다고 피기우스가 반대했을 때, 칼빈은 피기우스가 가까운 원인들과 먼 원인들을 혼동하며, 모든 유기된 자는 가까운 원인을 반드시 자기 자신의 죄에서 찾아야 하며, 다른 입장에서도 동일한 반대들이 계속 존재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칼빈은 타락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감추인 계획이 있다는 피기우스의 결론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유기의 궁극적이고도 가장 심오한 원인은 선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에 있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타락전 선택설의 견해와 타락후 선택설의 견해가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이것은 타락전 선택설을 취했던 후기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거의 언제나 그러했다. 그들은 타락전 선택설이 허용된다고 생각했지만, 타락후 선택설을 정죄하거나, 자신들의 견해를 유일하고 참된 견해로서 고백서에 표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타락후 선택설을 대신하는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타락후 선택설과 더불어 자신들의 견해의 정당성을 변호했다.

타락전 선택설에 의하면, 모든 가능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 단순한 지성의 지식이 모든 작정에 선행한다. “궁극적으로 수행되는 것은 최초의 목적이다.”라는 규칙에 따라 하나님은 자신의 첫 번째 작정에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이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린다는 사실을 확정했다. 이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미덕들을, 구체적으로 그의 자비와 그의 공의를, 창조되고 타락할,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징벌 가운데서 계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덕들이 계시될 수 있도록, 두 번째 작정으로, 비탄과 비참한 형편에 빠져, 그 자비와 공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인류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반드시 확정되어야만 했다. 그러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반드시 결정되어야만 하는 세 번째 작정, 하나님의 형상과 인류의 머리로 장식된 사람이 창조되고, 그 사람은 유효한 허용으로 타락하고, 그의 모든 후손들은 그의 타락에 함께 이끌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작정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그의 자비가 선택된 자들에게 중보자의 제공, 신앙의 은사, 마지막까지의 보존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그의 공의가 유기된 자들로부터 자유롭게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고 그들을 죄에 넘겨줌으로써 나타나게 되는지를 지시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하나의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리스도의 선택과 교회의 선택은 서로 관련된 단 하나의 작정 가운데 발생하기에, 신비로운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 확립된 개혁파 교리였다. 하지만 타락전 선택설의 순서에서 교회의 선택은 창조와 타락의 작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선택과 분리되고 그리스도와 결별되었다. 이 반대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콤리는 택자들이 창조와 타락의 작정 이전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선택되었다고 가르쳤다. 이 연합은 아주 내적이고 깨질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다음에 작정된 대로 택자들이 타락할 때, [교회의] 머리로 선택된 그리스도는 이제 또한 화해의 중보자로 선택될 것이다. 따라서 콤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선택과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의 선택은 분리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콤리는 이 두 선택을 창조와 타락의 작정 이전에 두었다. 따라서 이제 장차 존재 가능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차 존재 가능한 그리스도 역시 선택의 대상으로 삼았다.

[239] 아르미니우스는 예정을, 선행적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결과적 은혜로 인해 인내할 하나님의 예지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지만, 믿지 않거나 인내하지 않을 다른 이들은 징벌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으로 이해했다. 아르미니우스는 은혜의 필요성과 선물로서의 믿음을 여전히 견지하고자 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동일한 것을 자신들의 1610항변서’ 3조와 4조에서 변증했다. 하지만 이 은혜는 항상 저항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고4,5,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보편적 뜻, 그리스도의 보편적 속죄, 은혜의 충분한 방편들에 대한 보편적 제공에도 불구하고, 누가 믿을 것이며 믿지 않을 것인지에 관하여 언제나 확정된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반대는, 갈수록 그 결정을 더욱 사람의 손에 내려놓게 만들었다. 항변파는 합리주의의 길을 마련했다 그것은 물론 도르트레흐트 총회에서 정죄되었으나, 정신적 경향으로서 17세기와 18세기에 갈수록 더욱 모든 교회들과 나라들에 확대되어 수용되었다.

19세기 자연, 역사 그리고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이신론적 펠라기우스주의가 견지될 수 없음을 밝혔다. 그래서 범신론적 또는 유물론적, 보다 윤리적 또는 보다 자연적 경향을 띤 결정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물론 이러한 결정론과 예정론이 서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원리적인 차이가 있다. 범신론과 유물론에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여지가 전혀 없고, 단지 일종의 무의식적 운명, 맹목적 자연, 비논리적 의지의 여지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예정론을 이러한 결정론적 의미로 이해하고 해석했다.

[240] 하나님의 경륜이 지닌 성격은, 때가 되면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강력하고, 불변하며, 독자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외적인 사역이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정과 수행은 구별된다. 하나님의 작정은 내적인 사역, 즉 신적 존재 안에 있는 내재적, 영원한 그리고 시간 밖에 존재하는 사역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과 내용과 대상은 시간 속에서 존재하고 발생하게 될 모든 것들로서, 한마디로 말하면, 세계 관념, 정신적 세계다. 이러한 세계 관념은 하나님의 존재와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와, 따라서 성자 로고스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 세계 관념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세계의식이 하나님의 자기 의식에 대해 갖는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갖는다. 그러므로 세계 자체와 관련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은 유효적 원인이자 동시에 예시적 원인이다. 그것이 유효적 원인인 까닭은, 모든 피조적 존재는 명백히 오직 하나님의 작정과 의지를 통해 그 결과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만사의 모태다. 만물의 궁극적이고 가장 심오한 근거는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에 있다. 만물이 왜 존재하며,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은 하나님이 원하셨다.”라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가운데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은 또한 존재하고 발생하는 모든 것의 예시적 원인이다. 우리는 사물들이 존재한 이후에서야, 그리고 존재하는 그대로 그것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생각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서야 사물들은 그와 같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은 오로지 단일하고 단순한 작정으로만 여겨져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작정이라는 용어를 오로지 단수로 사용한다. 진실로 신적 의식의 세계 관념은 단일한 개념이다. 하지만 예술가가 자신의 착상을 단지 점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기 경륜의 단일한 생각을 시간 속에서 자기 피조물들에게 하나씩 펼쳐 보인다. 만일 하나님 안에 있는 작정의 단일성과 모든 특별한 작정들 사이의 불가분의 연관이 견지되고 인정된다면, 이렇게 복수로 말하는 것이 거부될 수는 없다.

[241]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제일 먼저 작정이 구별될 수 있는데. 이는 과거에 일반적으로 섭리라는 명칭으로 지시되었다. ‘섭리라는 용어는 원래 다름 아닌 미리 내다봄, 미리 준비함, 미리 숙고함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초기 신학에서도 이런 식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는 작정들로 여겨졌고, 하나님의 의지에서 논의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는 종말을 위한 사물들의 배열의 방식”, 즉 자신의 확정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영원부터 만물을 정돈했던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의 행위로 정의되었다. 이런 배열의 방식으로서 섭리는 물론 시간 속에서의 시행, 즉 보다 구체적으로 통치라는 명칭을 지닌 배열의 집행과는 구별될 수 있다. 그래서 섭리는 많은 로마교 신학자들과 초기의 개혁파 신학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섭리는 하나님이 본보기에 따르듯, 계획이나 작정을 따라 시간 속에서 만물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섭리라는 명칭은 보존과 통치 행위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사용되어, 이미 츠빙글리, 칼빈, 폴라누스, 순수신학통론등은 이런 의미에서 창조 뒤에 섭리를 취급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작정이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단지 이성적 피조물들의 영원한 상태에 대한 결정예정뿐만 아니라 차별 없이 만물의 배열과 우열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과거에 섭리라는 명칭으로 지칭되었다. 따라서 예정은 그 자체로 격리된 것이 아니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과 연관되었고, 단지 그 작정의 특별한 적용일 뿐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프로노이아섭리, 선견로 표현하지 않기에, 개혁파 신학자들은 성경적 용어와 긴밀한 연관을 갖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경륜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따라서 일차적으로 세상 전체와 관련된다. 무의식적인 자연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존재하고 발생한다.

[242] 펠라기우스주의는 여기서 예정을 예지로 대치했고, 예정을 하나님의 작정으로 정의했는데, 하나님은 이 작정에서 인내하는 신앙, 또는 불신앙을 미리 내다보았던 자들에 대한 영원한 구원 또는 징벌을 정했다. 현재 이러한 견해가 얼마나 보편적으로 기독교회에서 수용된다고 할지라도, 성경에 의해, 그리고 종교적 경험과 신학적 사유에 의해 단호하게 부정된다.

첫째, 성경은 신앙과 불신앙, 구원과 멸망이 단지 하나님의 단순한 예지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의 대상이기도 함을 명백하고 선명하게 가르친다. 예지는 수동적으로 미리 아는 그 어떤 의식의 상태가 아니라 히브리어 야다처럼, 자기 예지의 대상들에 대한 특정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역사의 실현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자기 결정이다. 예지는 계획이나 목적, 예정, 선택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의 행위다. 둘째, 신앙은 자연인에게서 나올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따라서 선택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전제하고, 그 열매와 결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셋째, 구원은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 모두에 있어서 오로지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모든 종교적, 기독교적 경험이 만장일치로 증거한다. 넷째, 하나님의 예지와 성격은 그 대상을 미리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아는 것이며, 그래서 그 예지는 예정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대상이 전적으로 우연적이고 자의적이라면, 예지도 역시 견지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회의 고백에 의하면, 모두 구원받을 자들의 수효는 형식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논쟁의 여지없이 확정되어 있다. 하지만 만일 신학자들이 이것을 인정하고 숙고한다면, 예지는 섭리와 예정과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누가 믿을 것인지를 미리 알고, 그 사실을 영원히 그리고 변함없이 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또한 시간 속에서 확실히 그리고 틀림없이 신앙과 구원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연과 독단적이라는 의미의 자유에 대한 여지는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예지는 예정을 포함한다.

[244]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이것은 다름 아닌 예정 개념을 좁게 보느냐 아니면 넓게 보느냐에 따른 정의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용어를 이중적인 의미로 제한했다. 첫째, 그는 예정의 작정을 창조와 타락의 작정에 뒤따르게 했다. 둘째, 그는 이 용어를 일반적으로 좋은 의미로 취하여, 예정을 선태과 동일시하고, 유기의 작정을 예지라는 명칭으로 지시하기를 선호했다. 예정은 하나님이 행하는 것, 즉 선을 말하는 반면, 예지는 인간이 행하는 것, 즉 악을 가리킨다. 이러한 용례는 일반적으로 스콜라주의, 로마교 그리고 루터파의 고백서에 표현되어 있다. 개혁파 가운데 타락후 선택설의 지지자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창조와 타락의 작정을 선택과 유기의 작전에 선행시켰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유기도 예정 가운데 둠으로써, 타락 이후의 이중 예정을 반대하지 않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예정이라는 용어를 선택에 제한하고, 유기는 예정과는 별도로 자체의 명칭아래 취급하는 것이 더 낫다고 평가한다. 이제 만일 예지란 용어가 후기 로마교와 루터파 신학자들처럼 펠라기우스주의적 의미로 이해되지 않고, 유기가 하나님의 의지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명칭상의 차이일 뿐 내용 자체의 차이는 아니다. 하지만 타락후 선택설 입장의 특징은 창조와 타락의 작정이 선택과 유기의 작정에 선행한다. 다른 한편으로, 타락전 선택설은 예정을 매우 확대시켜, 창조와 타락을 궁극적 목적, 이성적 피조물들의 영원한 상태에 이르는 방편들로서 예정 가운데 포함시킨다.

예정에 대한 이 두 가지 견해,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은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에서 지속적으로 동등하게 인정되었다. 네덜란드 신앙고백 표준문서들은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지만, 그 어떤 교회 회의도, 도르트레흐트 총회도 타락전 선택설 지지자를 정죄한 일이 없다. 타락전 선택설의 지지자들은 타락후 선택설의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가르치기를,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닌 반면, 죄의 원인은 인간의 의지에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전능자로서 타락을 결정할 수도 있었고, 또한 죄 가운데서 그리고 죄를 통하여 자신의 통치를 행사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여전히 거룩하고 의로운 분인 반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죄에 빠져 범죄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한 대로 타락하지만,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타락한다.” 또한 타락전 선택설의 지지자들은 철학적 사변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에 이른 것이 아니며, 자신들의 견해가 성경과 더 잘 조화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것을 제시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바울 연구를 통해 자신의 예정론에 이르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타락전 선택설에 이르렀다. 칼빈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타락전 선택설에서 철학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진리를 가르쳤다. 다른 한편으로, 타락후 선택설 지지자들이 전적으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은 단순한 예지를 통해 타락과 죄 그리고 많은 사람의 영원한 형벌을 미리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정 가운데 포함시키고 결정한 것이다. 따라서 작정 자체와 그 내용에 대하여 전혀 차이가 없다. 이 두 견해는 자유의지를 부인하며, 신앙이 선택의 원인이며 죄가 유기의 원인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한다. 궁극적으로 이 두 견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기뻐하는 뜻에 기초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작정의 순서에 관한 것이다. 타락후 선택설 지지자들은 역사적이고 인과적인 순서를 선호한 것이다. 전자는 예정 개념을 좁은 의미로 이해하고 창조, 타락, 섭리를 예정에 선행시킨 반면, 후자는 예정 아래 다른 모든 작정들을 포함시킨다. 타락후 선택설에서는 작정의 다수성이 강조되는 반면, 타락전 선택설에서는 작정의 통일성이 강조된다. 전자에서는 모든 작정이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의 독자적 의미를 지닌 반면, 후자에서는 선행하는 모든 작정이 최종적 작정에 종속된다.

[245] 타락전 선택설이 지닌 올바른 요소들은, 모든 작정들이 합해져서 통일성을 이루고, 모든 것이 종속되고 사용되는 최종 목적이 있으며,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을 하나님이 생각하지 못했다거나 예기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원했고 결정했으며, 창조는 이미 곧바로 재창조를 의도했고,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있어서 이미 그리스도가 고려되었다는 사실이다. 타락후 선택설이 지닌 올바른 요소들은, 작정들이 비록 단일할지라도 그 대상들에 대해 구분되고, 그 작정들 가운데 단지 목적론적인 순서만이 아니라 인과적인 순서도 드러나며, 창조와 타락은 단지 최종 목적을 위한 수단들로서만 여겨질 수 없으며, 죄는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 창조의 파괴였으며, 하나님은 단지 그 자체만을 원했던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37장 인간의 기원

 

[282] 드 라 페이레는 1655년에 아담 이전의 존재들 가설에서 비롯된 신학 체계라는 부제를 지닌 아담 이전의 존재들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저자, 인쇄자, 장소를 밝히지 않고 출판했다. 이 소책자에서 그는 창세기 414, 16~17, 62~4절에 호소하여 아담이 있기 오래전에 이미 사람들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람들은 창세기 1장이 소개하는 피조된 첫 번째 쌍으로부터 유래했다. 반면에 창세기 2장에서는 유대인들의 조상이라는 아담과 하와의 창조가 이야기된다.

쉘링은 다른 종류의 다원 발생론을 가르쳤다. 그는 또한 아담 이전의 많은 인종들을 가정했는데, 이 인종들은 낮은 동물의 처지에서 스스로 발전되고 승화되어, 결국 비로소 인간성을 드러내는 존재를 산출했기에, 그 존재는 정당하게 그 인간이라는 명칭을 지닐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1860년 이후에 다윈주의가 등장했는데, 다윈의 변이성 이론 때문에 상당히 단일 발생론적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의 많은 추종자들은 다원 발생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다윈주의의 입장에서 인간의 발생과 연대에 대한 질문은 대답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전이는 아주 느리게 발생하기에, 사실상 첫 번째 사람은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의 가운데 다양한 민족들과 종족들의 실재는 매우 분명하게도 중요한 문제로서, 그 해결책은 아직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리와 분열 가운데 여전히 통일성이 보존되었다. 언어학은 과거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인간] 기원의 연관성과 통일성을 발견했다. 그래서 창세기 10장 역시 모든 다양성 가운데 인류의 통일성을 견지하고, 폰 밀러는 모든 역사는 반드시 이 장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바르게 지적했다.

 

38장 인간의 본질

[284] 인간의 본질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두 단어 형상צלם, είκων모양όμοιωσις은 분명히 동일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둘 사이에 본질적이고 내용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이 단어들 외에 하나님 형상의 내용에 대해 다음 정보를 제공한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을 따라 창조되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이 창조는 그 어떤 면에서도, 즉 원형의 측면에서도 모사의 측면에서도 제한되지 않는다. 인간은 단지 신적 존재의 몇 가지 미덕들이나 심지어는 한 위격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언급되지 않고, 또한 인간은 단지 부분적으로만, 즉 오직 영혼이나 지성 또는 거룩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지닌다고 언급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 전체는 신성 전체의 형상이다. 셋째, 성자와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인간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물론 성자는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고, 인간은 상대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영원한 독생자인 반면, 후자는 하나님의 피조된 아들이다. 전자는 신적 존재 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반면, 후자는 신적 존재 밖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창세기 126절은 그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통치 가운데 드러난다고 분명하게 가리킨다. 창세기 1~2장의 낙원의 상태에 대한 묘사는,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래서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따른 재창조란 일차적으로 새 사람을 입는 것인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다.

[285] 알렌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등과 같은 어떤 학자들은 지적하기를, 진실로 창세기 126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하기를 원했으나, 27절에 따르면 사실상 단지 자신의 형상만을 따라, 즉 합리적 본성을 따라 창조했다. 이는 인간 자신이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과 같은 모양을 얻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손에서 상급으로 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자유의지론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 자유의지론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거룩을 인간에게 즉각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로서 생각하지 못했고, 단지 인간 자신이 도덕적 노력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선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 역시 인간은 실재적인 거룩의 상태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죄 없는 무죄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쳤다. 나중에 이러한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이 오로지 인간의 통치에 있다고 생각한 소시누스파, 유한한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인 첫 번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었으나, 중생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던 재세례파, 그리고 항변파, 합리주의자들과 초자연주의자들, 그리고 많은 현대신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는데, 이들 모두는 완전한 상태를 어린아이와 같은 죄 없는 상태로 여긴다.

[287]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 자연주의적 견해와 나란히 대립되어 나타난 다른 견해는 초자연주의적 견해라고 불릴 수 있다. 이 사상은 4세기 이후 기독론적 논쟁에서 전면에 부각되어,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 되심은 특히 성자와 성령이 인간의 신성화를 위한 장본인들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주장되었다. 그리고 이 영광의 상태에 대한 교리에 또한 공로적 선행의 교리가 덧붙여졌다. 이 두 가지 사상, 즉 인간의 궁극적 목적과 선행의 공로성이라는 신비적 견해로부터 로마교의 추가된 선물의 교리가 생겨났다.

[288] 첫째, 이 교리는 인간의 목적에 대한 그릇된 견해 위에 수립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현세와 내세에 참여하는 은혜의 상태와 영광의 상태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녀 됨, 신적 본성과의 교제, 하나님을 대면함, 영생, 하늘의 복 등으로 가장 아름답게 묘사되었다. 여기에 대해 로마교와 우리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다. 하지만 로마교는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된 이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신플라톤주의적인 하나님과의 대면과, 영혼의 하나님과의 신비적 용해로 이해한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위해 획득한 그 모든 은혜들은 단지 영광의 상태에서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이미 이 지상에서도 주어졌다.

둘째, 성경은 지상의 은혜의 상태에서 이미 시작된 이 영광의 상태가 로마교적 의미에서 초자연적이며 추가적인 것이라고 그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분명히 이 은혜와 영광의 상태는 인간의 모든 생각과 상상을 훨씬 초월한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사실은, 고린도전서 2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 은혜들이 감추인 것은 이 세상의 지혜, 이 세상의 영, 육에 속한 사람에게 숨겨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에 속한 이 사람은 단지 짐승의 본능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영이 없기에, 그의 지성이 어두워진 사람이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사실은,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주고 또 장차 줄 것들은 신자들로 하여금 항상 다시금 경탄하고 경배하게 만드는 공로 없는 은혜의 선물로 머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는 단지 아담이 잃은 것뿐만 아니라 또한 아담이 순종으로 얻게 될 것까지도 획득했다는 사실이다.

셋째, 로마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은혜의 유익들로부터 타락 이전의 아담의 상태에 대해 도출하는 결론은 그릇된 것이다. 로마교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만일 회복된 인간의 영광의 상태가 하나님을 닮은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틀림없이 첫 번째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영광의 상태가 이제 신자들이 오로지 은혜의 상태를 통해서만 달성된다면, 이것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로마교에 따르면, 영광의 상태와 은혜의 상태 사이의 연관은 인간의 칭의 가운데 주입된 은혜를 받으며, 그 은혜의 힘으로 충분한 공로에 의해, 마땅히 영생을 얻을 만한 선행을 행한다는 사실이다. 로마교의 이러한 추론은 회복된 인간의 하나님 형상에서 첫 번째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결정하는 한 올바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진실로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아담의 궁극적 목적이 다름 아닌 신자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영생이라는 사실을 수용하는한, 로마교의 추론은 올바른 것이다.

하지만 이 추론은 은혜와 영광을 공로와 연관짓고, 더 나아가 이것을 또한 아담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다. 비록 인간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로마교의 견해가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은혜를 적합한, 초자연적 의미로 이해할 권한을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일정한 사역들에 일정한 약속들과 은사들을 연관시키는 것이 또한 가능하기 때문에, 이 은사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충분한 공로에 의해, 마땅히 그 사역들을 통한 공로로 여겨지지 않는다.

[289] 초기에 몇몇 루타파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본질과 영혼의 실체라고 여겼다. 하지만 루터파 신학은 다른 생각에서 출발했다. 루터파 신학의 주관적, 구원론적 성격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오로지 첫 번째 인간이 받았던 도덕적 속성들과 동일시했는데, 그 속성들의 상실은 인간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면에서 [무감각한]목석으로 만들었다. 루터는 종종 은사들을 매우 강조했고, 그 은사들을 하나님의 형상과 동일시했다. 물론 루터파 신학자들이 인간의 본질이 또한 어떤 신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고유한 형상은 오로지 원의이며, 이와 연관된 불멸, 무고난, 통치, 가장 복된 상태다. 왜냐하면 오로지 성자만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 형상은 인간 내부의 부수적 완전으로 상실될 수 있고 상실되었으며, 오로지 신자 안에서만 갱신되고 회복되었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자들은 처음부터 인간의 본질 역시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켰다. 칼빈은 과연 영혼의 실체와 그 천부적 소질들을 구분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살아 있는 종류들 가운데 인간의 본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모든 탁월함이며, 그래서 더 나아가 완전성이라고 명백하게 말한다. 개혁신학자들은 주로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와 협의로 언급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을 따라, 인간이 한편으로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불리고 또 반드시 그와 같이 존경을 받아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하나님 형상의 가장 중요한 내용, 즉 지식, , 거룩을 상실했고, 이 속성들을 다시금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되돌려 받았다고 가르친다.

[290] 종교개혁적 교리가 한편으로 원의를 자연적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상실될 수 있고 부수적인것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모순에 빠지는 것이라는 반대가 제기된다면, 이러한 반대는 단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의가 자연적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어떤 실체나 본질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 속성이나 성질이기 때문이다. 건강이 인간의 본성에 속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과연 상실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도 마찬가지다. 로마교와 종교개혁 둘 다 원의는 마니교가 가르치듯이 그 어떤 물질, 그 어떤 정신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부수적인 것, 하나의 속성이라는 것에 대해 일치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자연적으로 부수적인 것인지, 최소한 부분적으로 초자연적으로 부수적인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로마교는 단지 자연적 의에 대해서만 그것이 자연적으로 부수적인 것이라고 가르치는 반면, 종교개혁은 원의 전체에 대해 자연적으로 부수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은 죄로 인해 그 어떤 실체도 잃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심지어 타락 후에도 여전히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원의의 상실을 통해 조화, 자기 본성의 건강을 상실했고, 전적으로 죄인이 되고 말았다. 그의 본성은 실체, 본질의 의미에서 그대로 머무르지만, 그에게 본성상 고유한 도덕적 성질들은 상실되었다.

[291] 첫째, 하나님 안에 있는 일부, 다른 것을 제외한 어떤 미덕과 완전이 아니라, 심지어 하나의 위격도 아니라, 예를 들어 성부와 성령을 제외한 성자도 아니라, 하나님 자신, 신성 전체가 인간의 원형이다. 그러므로 비록 인간 존재 내의 삼위일체적 요소들에 대한 심리학적 추적을 매우 조심해야 할지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간의 원형이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낫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교리로부터 흘러나오는 사실은, 이 형상이 인간 전체에 걸쳐 확대된다는 것이다. 인간 내부에 있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흔적을 드러내는 반면,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래서 그는 전적으로, 즉 영혼과 육체, 모든 능력과 힘, 모든 처지와 관계들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지만 우주가 하나의 유기체이기에, 하나님의 미덕들이 어떤 피조물에는 더 분명하게 계시되고, 다른 피조물에는 덜 분명하게 계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기체로서의 인간 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부분보다는 여기서, 즉 육체보다는 영혼에서, 물리적인 힘보다는 윤리적인 미덕들에서 더 분명하게 계시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 사실이,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진리를 전혀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영혼 가운데서 지시될 수 있다. 창세기 27절에 따르면, 인간은 흙으로 조성되고, 생기를[그 코에]불어 넣음으로 생령이 되었다. 생기는 삶의 원리며, 생령은 인간의 본질이다. 성경은 이 둘을 통해 인간에게 고유하고 독립적인 위치를 제공하고, 범신론과 유물론을 회피한다. 인간은 영이다. 왜냐하면 그는 동물들처럼 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생기를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삶의 원리를 위로부터 하나님에게서 갖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과는 구별된 자기 자신의 영을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혼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영적인 요소는 처음 순간부터 천사들과는 달리 몸에 적응되고 몸을 위해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몸으로 인해 지상에 매이고 또한 자신의 더 높은[정신적이고 영적인] 삶을 위해 감각적이고 외면적인 것들에도 매여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의 능력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영이 인간 삶의 원리이고 혼이 그 주체인 반면, 마음은, 성경에 따르면 그 생명의 기관이다. 마음은 먼저 육체적 생명의 중심이며, 더 나아가 은유적 의미에서 모든 정신적 생명, 즉 감정들과 욕망들, 욕구와 의지, 심지어 사고와 지식까지 그 토대와 근원이다. 그래서 마음에 근원을 둔 이 생명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으로, 이 생명은 모든 인상, 의식, 개념, 관찰, 의논, 생각, 지식, 지혜를 포함하고, 특히 그것의 더 높은 형태인 정신 기관을 가지고, 말과 언어로 구현되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감정, 욕망, 충동, 성향, 집착, 욕구 그리고 의지 결정은 마음에서 비롯되며, 반드시 정신의 지도를 받아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292] 셋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맨 처음 창조되었던 지식과 의와 거룩의 미덕들 가운데서 나타난다. 질서 정연한 취급을 위해서 위에서 먼저 영혼의 본성과 능력들에 대해 따로 언급되어야 했으나, 이것은 단지 논리적 구분만을 의미한다. 인간은 순전히 중립적인 능력들을 지닌 중립적 존재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육체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지성의 지식, 의지의 의, 마음의 거룩을 지닌 성인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을 위한 선이란 도덕적 완전, 하나님의 율법과의 완전한 일치, 하나님 자신처럼 거룩하고 완전한 것이다. 이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이며 동일하다. 성경은 두 종류의 인간, 두 종류의 도덕법, 두 종류의 도덕적 완전과 목적을 말하지 않는다. 만일 인간이 선하게 창조되었다면, 그는 반드시 원의를 지닌 채 창조되어야 했다. 이 원의는 한편으로 어린이 같은 순진무구함으로 이해될 수 없고, 또한 완전한 상태가 이미 영광의 상태와 같았던 것처럼 과장되어서도 안 된다. 아담의 지식은 순수했을지라도, 제한적이고 증가될 수 있었다. 그는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했다. 그는 직관적 지식만 아니라 또한 추론적 지식도 지녔다. 그는 오로지 특별 계시를 통해서만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의 의와 거룩도 마찬가지다. 그는 처음부터 그것들을 소유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그 어떤 선행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본래부터 존재하는 의와 거룩은 인간에 의해 반드시 보존되고 개발되고 행위로 바뀌어야 했다. 이것은 마치 필요한 은사들을 갖춘 아담 스스로가 이제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일해야만 했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원의는 하나님의 거저 주는 은사로서, 매 순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인간 안에 보존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는 한순간도 생각할 수 없다. 성자가 이미 타락 전에 연합의 중보자였던 것처럼, 성령 역시 그때에 이미 인간 내의 모든 지식과 의와 거룩과 장인이었다. 물론 죄가 있기 전과 죄의 상태에 빠진 인간 안에 성령이 내주하는 것은 크게 차이가 난다. 이제 이러한 내주는 결국 [인간의] 본성을 초월한 것인데, 왜냐하면 성령은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다가와야만 하고, 인간의 죄된 본성 전체와 정면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에게 있어서 이러한 전체적인 대립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본성은 거룩했고, 따라서 신자들의 경우처럼 거룩하게 될 필요가 없었다. 그의 본성은 처음부터 성령이 내주하기에 적합했다. 따라서 아담에게 있어서 이러한 성령의 내주는 또한 자연적인 것이었다. 성령의 교제 없이는 그 어떤 참으로 선하고 완전한 인간도 생각할 수 없다. 타락하고 범죄한 인간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완전한 인간 사이에는 로마교적 의미의 자연적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넷째, 인간의 육체 역시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신적] 계시를 알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철학은 언제나 다시금 경험론이나 관념론, 유물론이나 유심론에 빠진다. 하지만 성경은 이 둘을 조화시킨다. 인간은 영을 지니는데, 이 영은 정신적으로 통합되었고, 그 본성에 의해 반드시 몸에 거주해야만 한다. 육체적으로, 감각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그의 육체는, 시간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먼저 땅의 흙으로부터 형성되고, 그 뒤에 생기가 불어넣어졌다. 그는 자신이 지음 받은 흙을 따라 아담이라고 불렸다. 그는 티끌이며 그렇게 불린다. 육체는 감옥이 아니라 전능한 하나님의 놀라운 예술 작품이며, 영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 육체는 비록 죄로 인하여 영혼으로부터 심하게 갈라졌지만,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속하여 부활 시에 다시 영혼과 결합될 것이다.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갖는 속성은 이해될 수는 없으나, 우인론이나 예정 조화, 또는 영향 체계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긴밀하다. 그것은 윤리적이 아니라 물리적이다. 그것은 아주 친밀하여 단일 본성, 단일 인격, 단일 자아가 그 둘과 그 모든 활동의 주체다.

무엇보다도 육체가 영혼의 기관으로서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형상에 속하기 때문에, 육체는 원래 불멸에 속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다. 그러나 아담에게 있어서 이 불멸은 여전히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 불멸의 생명이 아니라 단지 순종의 경우에 죽지 않을 수 있는, 죽지 않게 될 상태였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이며, 그것은 윤리적 조건에 의존했다. 이제 인간은 이 육체로 말미암아 땅에 매여 있었으나, 또한 땅을 통치할 수도 있었다. 땅에 대한 통치는 불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형상의 한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속하는 것은 또한 낙원에서의 거처다. 거룩과 복은 서로에게 속한다. 우리 모두의 양심은 미덕과 행복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증거한다. 세상에서의 윤리적인 차원과 물리적 차원, 도덕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 존재와 현상, 정신과 물질은 결코 대립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저주 아래 있는 땅은 타락한 인간에게 어울린다.

[293] 인간은 하나님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미덕들을 선포하는 선지자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과 더불어 자신을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바치는 제사장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공의로 이끌고 다스리는 왕이다. 인간은 이 모든 것 가운데 여전히 더 고상하고 풍성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형상인 한 분을 가리키고, 성부의 독생자이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난 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39장 인간의 목적

[296]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후,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의 목적과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여 주었다. 결국, 인간은 특별 계시 없이도 도덕법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그의 마음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험적 계명은 적극적인 것으로, 인간의 본성 자체와 더불어 주어지지 않았고, 오로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알려 줌으로써만 알려질 수 있었다 미찬가지로 그 계명의 준수가 영생을 주리라는 것도 자명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행위언약은 자연언약이 아니다. 맨 처음에 이것이 아직 그렇게 선명하게 이해되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은 그 어떤 면에서도 자신의 법을 준수하고, 더불어 오로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한 인간에게 하늘의 복과 영생을 줄 의무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하게 가르쳐졌다. 여기서 노동과 상급 사이의 자연적인 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로마교의 추가된 선물 교리에 담겨 있는 진리다 영생은 거저 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그렇게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로마교는 행위언약의 교리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 영생이라는 은혜의 선물로부터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역시 반드시 초자연적이어야 한다고 추론하고, 이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주어진 그 초자연적 능력을 통해 다시 충분한 공로에 의해, 마땅히 영생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로마교는 은혜를 존중한다는 구실로 다시 선행의 공로성을 도입한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자들은 한편으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자연적이었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초자연적 계시 없이 도덕법을 알고, 초자연적 능력 없이 그 법을 지킬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지상 낙원의 상태보다 더 나은 복의 상태는 일의 성격상 결코 공로로 얻을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섭리에 의해 주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두 가지 생각을 행위언약 안에 결합시켰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특별하며, 은혜로운 섭리에 기초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출발하고, 하나님은 언약의 모든 부분들, 조건과 성취, 준수와 상급, 위반과 형벌을 확정한다. 이것은 그 기원상 일방적이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창조에 덧붙여졌다. 인간 편에서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거기에 기초하고, 이 언약 안에 더 나은 복에 이르는 길이 열려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행위언약은 둘 다 즉, 피조물의 의존성, 즉 인간의 모든 노동의 비공로성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피조물에게 지상의 것보다 더 나은 복을 제공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정당하게 취급한다. 행위언약은 인간의 의존성과 자유 둘 다를 주장하며, 슐라이어마허와 칸트를 결합한다. 시험적 계명과 도덕법의 관계처럼, 마찬가지로 행위언약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인간의 창조와 연관된다. 도덕법 전체는 시험적 계명과 생사를 같이한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전체는 행위언약과 생사를 같이한다. 행위언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아직 타락하지 않은 인간이 하늘의 복으로 가는 길이다.

[298] 하나님이 창조 시에 자신을 단번에 계시한 것이 아니라 그 계시를 매일 그리고 세기를 거쳐 진전시키고 증대시킨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 역시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시공간의 형태로 확대되고 전개된다 하나님의 형상은 선물인 동시에 사명이다. 그 형상은 이미 창조 시에 첫 번째 인간에게 즉각적으로 부여된 과분한 은혜의 선물인 반면, 동시에 풍성하고 영광스런 발전 전체의 원리와 근원이다. 완전한 단일 유기체로서 단 하나의 머리 아래 요약되고 온 땅에 퍼지며,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왕으로서 땅과 온 피조계를 통치하는 온 인류만이 완전히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 가장 뚜렷하고 가장 현저한 하나님의 모양이다.

[300] 비록 영혼창조론과 영혼유전론 둘 다 해결 불가능한 난제들에 직면할지라도,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리스 정교회 신학자들, 로마교 신학자들, 그리고 개혁파 신학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전자의 견해를 수용했던 반면, 후자의 견해는 단지 루터파 신학자들만이 수용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틀림없이 지식, , 거룩의 미덕들이지만, 이 미덕들은 심지어 인간들에게 있어서조차 천사들에게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성격을 지녔다. 하나님의 형상은 단지 이 미덕들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인간적인 것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은 또한 인간의 영혼이 처음부터 육체와 결합되도록 구성되었고, 그의 육체는 본래 영혼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인간은 타락 이전과 이후, 완전한 상태와 타락한 상태, 은혜의 상태와 영광의 상태에서 본질적으로 천사와 동물과는 항상 구분되고 그렇게 구분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닐 때, 천사가 되지 않고, 그 형상을 잃을 때, 동물이 되지 않는다. 그는 항상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항상 그리고 영원히 사람으로 머문다. 이제 이것은 오로지 영혼창조론에서만 충분하게 견지된다. 오로지 영혼창조론만이 인간의 어떤 독특성을 충분하게 견지한다. 영혼창조론은 범신론과 유물론 둘 다를 피하고,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고려한다.

인간의 독틍성은 인간의 통일성이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윤리적이기를 요구한다. 원죄가 육체적이 아니라 단지 윤리적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단지 인류의 윤리적, 언약적 통일성 위에 수립될 수 있다. 육체적 혈통은 원죄를 설명하기에 불충분하고, 그것을 물질화시킬 위험에 빠진다.

루터파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로 인하여 인간의 목적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아담은 자신이 필요로 했던 모든 것을 가졌었다. 그는 반드시 단지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야만 했다. ‘범죄하지 않을 수 있음범죄할 수 없음사이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견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어진 더 높은 미덕이 아니다. 따라서 아담은 자기 후손들을 위해 더 높은 것을 획득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단지 그가 가진 것을 넘겨주기만 하면 되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영혼유전론으로 충분하기에, 행위언약과 영혼창조론을 위한 여지란 전혀 없다.

하지만 다시금 로마교와 개혁파 신학은 다른 생각에서 출발했다. 인간의 목적은 하늘의 복, 영원한 생명, 하나님을 대면함에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 목적을 오로지 순종의 길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 이러한 순종과 그러한 생명은 비례 관계를 갖지 않는다. 로마교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인간에게 부여된 초자연적 은혜가 그로 하여금 충분한 공로에 의해, 마땅히 영생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한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수립하고, 그에게 영생을 주기를 원하며, 그의 노동의 가치를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은혜로운 섭리를 따라 준다고 말한다.

 

40장 섭리

[301] 성경에서 섭리 신앙은 절대적으로 단지 자연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계시만 아니라, 훨씬 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에 기초한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공의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긍휼함과 자비 역시 그 토대로 삼는다. 그것은 이교도들보다 훨씬 더 깊은 죄에 대한 지식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하는 사랑에 대한 경험도 전제한다. 그것은 우주론적 사색이 아니라, 영광스런 신앙의 고백이다. 그래서 리츨은 올바르게 섭리 신앙을 구원 신앙과 긴밀하게 연계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은 나중에 구원하는 신앙에 기계적으로 덧붙여지는 자연식의 조항이 아니다. 하지만 구원하는 신앙은, 먼저 우리고 하여금 전심으로 세상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게 하며, 그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그 위로를 맛보게 한다. 다른 한편 구원하는 신앙은 섭리 신앙과 동일시되거나 거기에 용해되어서는 안 된다. 특별 계시는 일반 계시와 구분되며,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하는 신앙은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일반적인 신앙과는 다른 것이다. 신자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인생의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수수께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사랑이 풍성하고 자비로운 동일한 아버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했고, 자신을 자기 자녀로 삼았으며, 장차 자신에게 영원한 복을 상속하게 한다는 것을 굳게 붙들 수 있다. 그래서 이 신앙은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통과하여 다시 기쁨으로 미래를 바라본다.

섭리라는 단어는 미리 내다봄’, 또는 미리 앎만을 의미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의 고백에 따른 섭리란 하나님이 만물을 매 순간 보존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단지 돌봄만 아니라, 또한 예견이기도 하다.

섭리는 (1) 더 나아가 여전히 다시 예지, 계획이나 목적, 통치로 구분되는 내적 행위, 그리고 (2) 정돈의 시행, 보존, 협력, 통치로 묘사되는 외적 행위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러한 섭리의 내적 행위는 이미 앞서 하나님의 속성들과 작정의 교리에서 충분하게 다루어졌다. 따라서 섭리는 여기서, 즉 창조론 후에 단지 외적 행위, 즉 외부로 드러난 하나님의 행위로서만 논의될 것이다. 비록 이제 이런 의미의 섭리가 내적 행위, 즉 예지, 계획이나 목적, 통치와 결코 분리될 수 없고, 그렇게 생각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정돈의 시행정돈자체와 구별되듯이 그것들과 구별된다.

[303] “우리는 모든 것이 운명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아무것도 운명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독교적 입장의 유일한 필연적 질서는 지혜롭고, 전능하며,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나중에 드러나게 될 것처럼 피조 세계에 인과관계가 존재하며, 확고한 법칙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연의 질서는 하나님의 뜻 배후에 있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초월한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존재한다거나 거스려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304] 하나님의 지식과 작정과 구별되고, 범신론과 이신론에 맞서 견지된 하나님의 섭리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단의 아름다운 해설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능하고 편재한 능력으로,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마치 자신의 손으로 하듯이 하늘과 땅, 게다가 모든 피조물을 여전히 보존하고 통치한다”[10주일, 27문답]. 따라서 섭리에 대한 교리는 그 범위가 대단히 넓다. 그것은 사실상 창조에 의해 한 번 발생된 세상에 연관된 모든 작정들의 전체적인 시행을 포함한다. 만일 창조 행위가 섭리에서 제외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지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작정과 마찬가지로, 시간 속에 존재하고 발생하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풍성하다. 그것은 교의학에서 창조론 이후에 취급되는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확대되고, 자연의 사역과 은혜의 사역 모두를 포함한다. 창조 이후에 뒤따르는 하나님의 모든 외적 사역은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이다. 섭리는 창조와 마찬가지로 크고 전능하고 편재한 하나님의 행위다. 그것은 지속적인 혹은 지속되는 창조다. 섭리와 창조는 모두 단일 행위이고, 단지 나타나는 양식에서 다를 뿐이다.

창조와 보존 사이에 차이가 있으나, 그 차이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조물에 대해 갖는 관계에 놓여 있다. 창조로 말미암아 사물들에게 발생하는 것과 보존으로 말미암아 사물들에게 발생하는 것은 각각 다른 것이다. 이 차이는 창조가 무로부터 나온 것이며, 보존은 기존의 것과 연관되는 것이라고 설명될 수 없다. 하지만 창조는 존재하지 않은 사물들, 즉 다름 아닌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있는 생각들과 작정들의 존재들을 실재하게 한다. 하나님은 보존을 통해 동일한 능력으로 자신의 존재와는 구별된, 실재를 획득한 사물들을 현존하게 하며, 이 사물들은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에게 돌아간다. 창조는 존재를 부여하고, 보존은 존재의 영속성을 부여한다.

[306] 성경 전체를 통해 확립된 사실은, 과연 하나님의 존재 전체는 죄를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는 율법과 양심 가운데 있는 죄의 금지를 통해, 율법과 양심의 판단과 심판을 통해, 이것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보여 준다. 하지만 성경 전체는 죄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신적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동시에 가르친다. 하지만 이러한 방지가 하나님이 죄를 다스리는 유일한 형태는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종종 죄를 허용하고 막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허용은 결코 소극적인 거이 아니기에, 죄 역시 그 최초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통치의 권세와 주권 하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고, 이를 통해 그들을 강하게 하고 확증하며, 또는 징벌하고 강퍅하게 하기 위하여 범죄의 기회들과 경우들을 창조하고 정돈한다. 비록 죄가 처음에는 다름 아닌 인간의 독단적인 행위로 여겨질지라도, 나중에는 하나님의 손이 그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죄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단지 죄의 시작만 아니라, 그 지속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전능한 힘으로 통치한다. 하나님은 죄를 자주 억제하거나 제한하며, 그 여세를 규제하고, 판단과 심판을 통해 종결짓는다. , 부정의 죄악과 마찬가지로, 고난, 징벌의 고통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 신앙은 이 엄청난 문제와 씨름했으나, 결국 거기서 다시금 승리의 머리를 들어 올렸는데, 이는 신앙이 그 문제의 해결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주의 왕권과 아버지 같은 사랑을 견고하게 붙들었기 때문이다. 악인들의 번영은 단지 외관상의 번영이고, 어쨌든 단지 일시적인 반면, 의인들은 심지어 가장 힘든 고난 가운데서조차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린다. 경건한 자들의 고난은 종종 그들의 개인적인 죄보다는 인류의 죄에 근거하고, 인류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그 목적으로 한다. 고난은 단지 보응만이 아니라, 또한 시험과 징계, 강화와 확증, 진리에 대한 증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사용된다. 그래서 섭리는 전능하고 편재한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번창할 때에 감사하고, 쇠락할 때에 인내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린아이 같은 복종으로 주의 인도하심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동시에 우리의 나태함을 깨워 최고로 활동하게 한다. 그리고 섭리는 우리에게 만사에 우리의 신실한 하나님이자 아버지가 육신과 영혼의 모든 필요한 것을 돌보며, 이 세상의 눈물의 골짜기에서 우리에게 보낸 모든 재난들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바꿀 것이라는 확신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는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그와 같이 할 수 있으며, 또한 신실한 아버지로서 그와 같이 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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