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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한 하나님
1. 캐서린 모리 라쿠나의 「우리를 위한 하나님」
그녀는 “삼위일체 교의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 삶에 아주 중요한 실천적 교의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 삶의 목적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신학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령의 활동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구조 속에서 사랑, 관계, 인격성, 연합의 신비를 탐구하는 가장 탁월한 관계의 신학이다.”
라쿠나는 “어째서 삼위일체 교의가 밀려난 것일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라쿠나의 연구는 이 문제들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하고, 바르트의 통찰을 실천적 영성으로 확장하는 구성적 제안을 하고 있다. 라쿠나는 바르트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라너의 규정을 이용하여 구원의 역사적 경륜을 기초로 하나님의 영원한 삶을 이해하기 위한 건설적인 제안을 전개하고 있다.
라쿠나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하나님의 신비(theologia)와 구원의 신비(oikonomia)가 나누어졌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의가 밀려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1] 우리가 경세적 삼위일체라는 용어에서 보듯이 경세 혹은 오이코노미아(oikonomia)란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기소통(self-communication)을 의미하고 구원의 역사 안에 나타난 성령의 활동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경세적인 활동 때문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간의 인식인 테오올리기아(theologia)는 원칙상 하나님의 경륜 속에 나타난 계시로부터 우리가 배운 것과 같은 줄기여야 한다.
라쿠나는 우리가 삼위일체 교의를 재인식해야 하고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들과 구원의 경륜이 갖는 원초적 관계를 되살려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하나님은 본성상 자기-소통적이라는 라너의 개념이 삼위일체를 재인식하도록 하였다고 지적한다. 신비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고 공유하는 활동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활동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계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가 절대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구원의 역사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 실제로 진짜 하나님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여기서 라너의 규정이 중심이 된다. 곧, 경세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이고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세적 삼위일체이다. 라쿠나는 “신학이란 구원론과 나뉘지 않으며, 구원론 또한 신학과 나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라쿠나는 유출(emanation)과 회귀(return)라는 교차대칭 모델(X, a chiastic model)을 구상한다. 경세적 삼위일체나 내재적 삼위일체가 존재하기 보다는 시간, 공간, 역사, 인격성의 구체적인 사건들 안에 나타난 테올로기아의 신비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출생하며, 아들로부터 성령을 발현하고 그리고 나서 세계를 발현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연합 안으로 세계를 완성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려드린다. 라쿠나의 교차대칭 모델이란 하나님께서 창조, 구속, 완성으로 나아갔다가 다시금 아버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운동이다. 이 운동 과정의 어떤 시점에서 멈출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론이나 성령론 사이를 구분할 이유가 없고, 하나님의 경세적 관계들과 내재적 관계들을 구분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입장은 영성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의 구분을 없앰으로써, 하나님의 내적 삶은 더 이상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으로 볼 수 없게 되었고, 더 이상 고립된 하나님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삶은 또한 우리의 삶이 된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내재적이고(ad intra) 외향적인(ad extra) 두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의 삶만이 존재하며, 하나님의 삶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함함을 알 수 있게 된다.
라쿠나는 경세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이고 내재적 삼위일체가 경세적 삼위일체라고도 하고 혹은 하나님의 활동(energies)이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한다고 고백하면서, 우리와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곧 하나님의 인격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라쿠나는 이것이 하나님 존재를 하나님으로 완전히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인격”이란 용어를 “한 본성이나 세 위격들” 중 어디에 적용해야 할까라고 물음을 할 수 있다. 라쿠나의 대답은 우리에게 충격이 될 수도 있다. 그녀는 바르트와 몰트만 혹은 다른 학자들 어떤 누구도 편들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 양태들 안에 있는 한 인격이라고 말하든 혹은 세 인격들 안에 있는 한 본성이라고 말하든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두 주장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의가 갖는 본래적인 주체적 문제는 구원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들의 만남이다.”
2. 로버트 젠슨의 「삼위의 정체성」
하나님은 영원하다. 하지만 젠슨은 하나님의 영원성이 시간을 담고 있으며 시간적 사건들을 하나님의 삶 속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젠슨은 현대 삼위일체 논의에 두 가지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1) 그는 시간과 영원성의 관계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를 확장시켜 내재적 삼위일체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난 후 2)본체(hypostasis)와 인격(persona)을 영어의 “정체성”(indentity)이라는 용어로 번역해 낸다.
바르트와 이 시대의 여러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젠슨도 성서에 기초한 사유는 헬라적 형이상학에 불가지론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주된 이유는 헬라의 사상가들이 시간적 운동을 완전의 상실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달랐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를 영원으로 경험하였고, 그 영원함은 시간을 통해 신실하게 드러난다고 이해하였다. 야훼는 시간을 초월하지 않고 시간과 관계한다. 야훼의 정체성이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미래를 행해서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여기서 시간의 연속성(continuity)은 존재의 항구성, 곧 존재론적 불변성이 아니다. 오히려 젠슨이 “인격적”이라고 표현한 연속성이다. 시간의 연속성은 야훼의 말씀과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며, 야훼께서 처음에 약속한 것을 후에 신실하게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젠슨은 히브리의 야훼가 시간을 통해 신실하게 나타났다면, 그리스 신들의 영원성은 본래적으로 그의 피조물들과의 관계와 연관된다. 반면 그리스 신들의 영원성은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부정한다.
아타나시우스보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을 선호하였던 젠슨은, 그레고리우스의 작품과 다른 카파도키아 교부들을 연구하면서, “시간적 무한성”(temporal infinity)이란 이름으로 미래에 기초한 시간의 개념을 전개하였다. 젠슨에 의하면 하나님의 시간성이 갖는 본질적인 양식은 무한한 미래성이다. 이 말은 시간이란 직선적이거나 순환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재를 지속하는 실체들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 시간을 창조하는 미래의 도래로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이 현재의 실재로 하여금 실재 그 자체를 넘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실재가 우리를 시간화한다. 또한 종말론적인 미래의 구조가 우리의 현재 경험 안에서 시간과 생성의 성격을 결정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지속은 존속하는 실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미래가 과거의 모든 사건들에게 수여하는 재해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적인 사건의 운동이 본래 하나님의 관계성 속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이것이 변화를 가져오는 성령의 계속적인 역사이다.
하나님 삶의 시간화는 젠슨이 하나님의 실체론적 개념을 극복하고 관계적 이해를 주장하는 통로가 된다. 때문에 젠슨은 몰트만과 같은 맥락에 서있어야 한다. 그러나 젠슨이 하나님의 주체를 다루고 “인격”이란 용어를 다룰 때에는 몰트만보다는 바르트와 라너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인다. 젠슨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하나님은 근대적 의미로 인격적이라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참인 것은 아버지를 단순히 아버지로서가 아니고 삼위일체 사건으로 볼 때이다. 의식하는 인격은 삼위일체이다.” 젠슨은 아버지 하나님보다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삼위일체 자체가 홀로 하나님이다.”라고 강조하는 그의 반-군주론적(antimonarchian)이며 반-양태론적(anti-modalist)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란 용어를 사용했을 때, 로고스와 성령은 아버지의 표현 양태일 뿐이고, “하나님”은 단순히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삼위일체가 바로 하나님의 주체이다.
인격 개념은 인간 개체들 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 관계의 실재를 나타내주고 있다. 하나님의 인격은 예수의 세례시 성서에 표현된 대로, 서로에게 또 서로에 관하여 말한다는 면에서 셋이다. 하나님의 인격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상호 고유 이름들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또한 셋이다. 세 인격의 연합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델로 인식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상호 일치가 하나의 실재인 “한 몸”을 만든다.
이들 세 위격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한 본질(ousia)은 어던가? 젠슨은 본질과 본체(hypostasis)가 둘 다 그리스 철학의 전통으로부터 내려온 것임을 주목한다. 니케아 이전에 본질과 본체는 존재하는 것(what-is)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유로이 상호교환적으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삼위일체를 해설하는 과정에서 용어 사용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예컨대 본체(hypostasis)는 개체와 동일시되었고, 본질(ousia)은 정체성을 갖는 개체를 의미하였다. 본체는 개체들의 차원에 속하고 본질은 개체들의 집단이 공동으로 공유하는 것을 뜻하였다. 성서의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하며 불변하는 하나님이라 생각하는 어떤 무시간적이며 관계를 갖지 않는 본질 혹은 존재로 한정될 수 없다.
그러면 본체는 어떤가? 오늘날도 본체라는 말을 여전히 사용해야 할까? 아니면 영어로 “인격”이란 말로 바꿔 사용해야 할까? 젠슨은 “인격”이란 말을 사용하여 자기-반성적 작인이란 근대적 의미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젠슨의 공헌은 “정체성”(indentity)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젠슨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만 세 정체성, 세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한 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름은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 본질에 대한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본체 각각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판명될 수 있다. 하나가 아니고, 세 정체성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셋은 하나의 실재이다.
그러므로 젠슨은 라너와 입장을 같이한다. 라너는 우리를 위한(외향적, ad extra)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전체 삼위일체의 사역과 나뉘지 않는다는 입장에 반대하였다. 젠슨은 이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이 삼위일체론의 파산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신약성서에서 “아들”이나 “로고스” 등은 역사 안에 일어난 구원 사역 때문에 예수에게 붙여진 칭호들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와 이 칭호들을 관계시키지 못하고 순수 형이상학적인 실재로 만들어 버렸다. 영원한 로고스와 역사적 예수의 연대가 무너진다면, 세 위격들은 각각 어떤 의무가 따라오든 타당하게 된다. 구원 사역은 세 위격 각각의 사역이 되기도 하고 모든 위격의 사역이 되기도 한다. ‘우리를 향한 삼위일체의 사역이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규정을 적용해보면, 예수와 교회는 ‘우리를 위한’ 사역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젠슨은 “초자연적인 실재인 수육 이전의 로고스가 아니라 예수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제2위격이며 객관적인 자리이다.”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젠슨은 단일한 신적 주체를 주장하면서도, 성부 수난설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인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젠슨도 수난 너머 불변한 하나님으로의 회귀를 주장한다. 그러나 젠슨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특별히 삼위일체의 제2위격에 의해 고통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젠슨은 한 분 하나님께서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 세 위치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죽음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위해 본질적이며, 예수의 신성과 아버지의 신성에도 본질적이다. 예수는 죽음 때문에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죽은 것이다. 하나님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삼위일체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놀랍게도 몰트만이 성부 수난설을 받아들이는 것은 실체론적 유일신론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젠슨은 분석한다.
젠슨은 카파도키아 교부 신학자들을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중심이 된 실체 중심의 서방 전통과 대비시키고 있다. 서방 전통은 요컨대 위격 안에 나타난 관계의 차이가 실체의 차이를 낳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의와 분석의 독특한 입장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하나님께 내재적이란 점이다. 그러므로 세 위격의 실체적인 일치가 아니고 이들의 관계적인 일치를 강조해야 한다. 서방 전통이 카파도키아 교부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좀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각각의 위격이 공유하고 있는 신성은 그 자체가 세 위격들의 관계로 이루어졌음을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연합하여 신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다른 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젠슨이 라너의 규정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젠슨은 라너의 규정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젠슨은 두 규정 사이에 어려운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난점은 경세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이고 내재적 삼위일체가 곧 경세적 삼위일체라는 라너의 규정이다. 젠슨은 라너의 규정이 구원 역사의 과정에서 결정된 삼위일체의 정체성과 정의를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라너의 규정을 따른다. 그러나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를 구분하는 신학적 이유는 하나님의 자유 때문이라는 두 번째 규정에 있다. 창조 안에 하나님의 창조나 구원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본질상 하나님은 지금 현존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난점이 존재한다. 곧 이 두 규정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다. 이 물음에 대해 존슨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젠슨은, 우리가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일치를 종말론적으로 생각한다면, 즉 내재적 삼위일체가 단순히 경세적 삼위일체의 종말론적인 실재라면, 이 두 규정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젠슨은 자신의 시간화된 영원성(temporalized eternity)을 다시 한 번 사용한다. 수난당할 수 없는 실체인 그리스화된 무시간적 하나님 개념은 로고스이신 예수에 적용될 때 문제가 된다. 무시간적 하나님 개념은 수육되지 않은 로고스를 언제나 하나님 안에 존재하였고 육체를 입고 우리에게 보내어진 아직 수육되지 않은 말씀인 아사르코스(asarkos)로서 과거 속에 위치시켰다. 아들의 출생은 무시간적이고 영원하기 때문에, 처음 크리스마스에 탄생한 아기 예수의 탄생과 일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들레헴 여물통에서 한 인간으로 오신 아기와 선재하는 존재를 이중적으로 만난다. 그런데 젠슨은 이러한 구성은 전체적으로 바꿔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언제나 존재했던 하나의 분리된 실재로서 해석하기 보다는 궁극적인 결과로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궁극적인 결과로서 영원하게 되었다. “진정 삼위일체는 아버지와 인간 예수와 신앙 공동체의 성령이다. 여기서 경세적 삼위일체는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자신인 내재적 삼위일체이다. 그리고 이 주장은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으로서 스스로 종말론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성서의 구절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성령은 아버지와 더불어 원리이며 근거가 됨을 알 수 있다. 아들과 아들의 구원 사역에 대한 성령의 증언도 똑같이 하나님에 기인한다.
여기서 젠슨은 세계 역사와 하나님의 자기 구성의 관계가 갖는 전체성 안에 하나님의 인격성을 위치시킨다. 그는 인격이 관계가 없는 단지일 수 있다는 근대의 이해를 부정한다. 인격이 갖는 내적인 역동성은 본래 다른 자아와의 관계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공동체적인 성격을 갖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성과 우리의 인격성이 갖는 공동체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젠슨은 몰트만을 너머 바르트, 융엘, 라너와 같은 입장에 선 것처럼 보인다. “비록 삼위의 정체성들이 근대적 의미의 인격들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존재한다. 그리고 각각의 정체성이 하나님이라면, 정체성은 각각 또한 인격적이며, 세 인격들은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1] 실제로 테올로기아와 경륜은 4세기까지는 하나였었다. 그런데 니케아 신경을 문서로 완성하는 과정에서 신론과 구원론이 분리되었고, 테올로기아는 구원의 사역과 관계없는 하나님의 삶의 내적인 사역을 의미하게 되었다.(p215)
아리우스주의와 신-아리우스주의에 대한 논쟁과 관련하여 니케아에서 시작된 행보를 따라, 신학자들은 점점 테올로기아 그 자체의 본성, 곧 하나님의 세 위격이 갖는 상호 관계성에 주목하였다. 그 동기는 처음부터 구원론적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경세는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들에 대한 결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했다∙∙∙그 결과 하나님의 내재적인 차원만을 강조하는 신학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경륜과 관계가 없게 되었고, 수육과 은총과도 상관없게 되었으며,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과도 무관하게 되었다.(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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