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하나님 형상에 대한 역사적 고찰

 

 

. 하나님 형상에 대한 역사적 고찰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교회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에 관한 문제는 각 시대마다 다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사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합리적 도덕적 성품”, “인간 본성의 탁월성이나 순정성”, “하나님과의 동형성”, “거룩과 의와 지식등과 같은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본 장에서는 초대 교부시대, 중세 교회시대, 종교개혁시대, 현대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로 나누어서 살펴보겠다.

 

1. 초대 교부시대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

 

초대 교부시대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에 있어서 이분법적인 이해를 가졌던 이레니우스의 견해를 설명하고, 이레니우스의 이분법적인 이해를 거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살펴보겠다.

 

1) 이레니우스(Irenaeus)의 견해

 

초대 교부시대의 신학자인 이레니우스는 하나님 형상에 대하여 이분법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다. 형상‘Imago’모양‘Similitudo’로 번역하였다.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 ‘Imago’란 인간의 이성을 말한며 타락과 관계없이 상실되지 않는 성품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지게 된 것은 희랍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모양은 성령께서 아담에게 입혀 주신 신성의 의복”(robe of sanctity)을 의미한다.

이레니우스의 하나님 형상 이해의 특징은 타락시에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을 잃는 반면 하나님의 형상은 그대로 보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실되었던 모양은 구속의 과정을 통해서 성령을 받아들임으로써 회복되어진다고 보았다.

후크마는 이레니우스가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이후에도 보존된 측면과 아울러 상실된 측면으로 구별하는 것에는 높이 평가하지만 형상과 모습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하여 이 두 단어 형상모양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2)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Aurelius)의 견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레니우스의 이분법적인 인간 이해를 거부한다. 그는 형상이나 모양이란 단어가 두 사물들간의 유사한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나 동의어는 아니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형상을 로고스와 인간으로 구분했다. 로고스는 성부와 동일시 될 수 있는 완전한 형상인 반면에 인간은 그 형상의 실체가 유사하기는 하나 불완전한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하나님과 닮은 점을 영혼 즉 정신에서 찾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정신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세 측면으로 분류했다. 첫째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둘째는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모양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참여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볼 때 초대 교부시대의 신학자인 이레니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헬라철학의 이분법적 사고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의 실체적인 견해만을 강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2. 중세 교회시대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

 

중세 교회시대를 대표하는 신학을 스콜라신학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스콜라주의적 인간론은 이레니우스의 이분법적 인간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은 중세의 스콜라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창조된 인간은 자연적 능력에다 부여된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 부여된 은사를 가지고 최고선을 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 때문에 원의(original righteousness)가 상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교회시대 신학자들은 타락후에도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여된 은사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부여된 은사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회복되는 것으로 보았다.

중세 교회시대를 대표하는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를 통해서 중세 교회시대의 하나님 형상 이해를 살펴보겠다.

 

1)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견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성에서 찾았다. 그에게 있어서 지성은 신적 특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타락 후에도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간에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좀더 높은 의미에서는 신자들에게만 있고 최고의 의미에서는 영화롭게된 자들에게만 발견된다고 말한다. 토마스는 이레니우스와 같이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은 남아있다는 견해를 가진다. 그러나 이레니우스와 같이 형상모양을 구분하지는 않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타락 전의 인간의 원래적 상태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로,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사람 안에는 이성과 저급한 세력들”(inferiores vires)간의 갈등이 있었다. 둘째로 인간은 원래 창조되었을 때에 자기의 이성으로 이러한 저급한 세력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초자연적인 은총을 선물로 받을 필요가 있었다.” 다시말해서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자기의 능력으로는 자기의 저급한 세력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저급한 세력들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초자연적 은총의 선물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는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초자연적 은혜를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토마스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상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성을 통하여 인간은 저급한 세력들을 통제할 능력을 소유할 수 없다고 말한다.

토마스는 타락한 인간이 초자연적인 은혜를 필요로 하게 된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한다.

 

순결한 본성의 상태에서 인간은 은혜를 통하여 그의 자연적 능력에 덧붙여질 또 다른 능력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초자연적 선을 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부패된 본성의 상태에서는 인간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초자연적 은총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하나는 치료받기 위해서이고 또다른 하나는 초자연적 덕을 얻기 위한 공로적 선행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후크마는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는 토마스의 주장을 동의한다. 그리고 보존되는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다시 회복되는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구분지은 토마스의 입장을 높이 평가한다.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인간은 하나님을 바르게 닮을 수 없다는 토마스의 입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후크마는 토마스의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이해를 다섯 가지로 반대한다.

첫째로, 토마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지성적 본성(intellecture nature)에서만 찾은 점이다. 이러한 견해는 성경 보다는 희랍사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 이해가 추상적이고 정적인 개념으로 나타나서 성경적 언어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둘째로, 인간 본성을 저급한 본성고급한 본성사이의 갈등이라고 주장하는 토마스의 견해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결핍되어 있는 존재였다는 결론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처음 창조된 인간은 자기가 마땅히 해야할 것을 해내기 위해서 초자연적으로 추가된 은총의 선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창세기 1:31절의 가르침과 합치될 수 없다.

셋째로, 토마스의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이해는 타락의 심각성을 약화시키게 된다. 토마스의 의하면 타락 전이나 타락 후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단지 한 가지 다른 점은 초자연적 은총이라는 선물의 차이다. 이 선물은 인간이 타락 전에 받은 것으로, 본질적인 아니라 후에 추가로 부여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타락이 인간에게 미친 영향은 부여된 은총의 상실만을 의미할 뿐이다.

넷째로, 이성과 저급한 세력들간의 마찰로 보는 토마스의 견해는 결국 인간의 육체를 저급한 본성으로 격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육체가 죄의 주요한 원천이 된다는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전인격인 사람이 하나님을 불순종하려는 태도와 순종하려는 태도 사이의 갈등이라고 말한다. 또한 성경은 육체는 저급한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봉사를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할 선한 창조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다섯째로, 토마스는 타락 후에도 자기의 공로로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이상과 같이 중세 교회시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성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은 중세의 스콜라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창조된 인간은 자연적 능력에다 부여된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대표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를 살펴보면서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는 주장을 볼 수 있었다. 반면에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인간이 처음 창조 되었을 때 결핍이 있는 존재로서 추가된 은총의 필요성을 가르침으로 공로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름을 후크마의 비판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3. 종교개혁시대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

 

종교개혁자들은 스콜라주의의 형상모양을 나누는 도식을 거부하고 인간을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서만 이해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형상모양은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분리시킬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루터와 칼빈도 형상모양을 분리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였다. 하지만 그들 간에도 하나님의 형상 이해에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1)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견해

 

루터는 중세 교회시대의 신학자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능력과 같은 인간의 자연적인 재능에서 찾지 않았다. 오직 원의 안에서만 찾았다. 그러므로 루터는 인간이 타락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된 것으로 보았다.

루터는 하나님의 형상을 공적인 형상사적인 형상으로 나눈다. 공적인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의 자취들이다. 즉 죄로 인한 부패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것으로서 동물들과 구별되게 하는 이성과 자연을 다스리는 모습을 지니게 하는 것으로서 이해하였다. 반면 사적인 형상은 타락 전에 아담이 소유했던 근본적으로 의로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루터에게 있어서 선()과 의()와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본성을 반영하게 되는 특징이다.

루터는 중생되지 못한 자들의 형상은 사회적인 질서를 지킬 수 있지만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덕을 이룰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죄인의 자연적 의지와 지성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마귀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 이성은 죄로 인해 부패되었으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뢰를 두어야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루터는 본래적인 의로움에서만 형상의 의미를 찾는 협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루터는 성경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시도는 하였으나 균형적인 성경의 해석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본질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2) 존 칼빈(John Calvin)의 견해

 

칼빈은 루터와 같이 형상모양을 구분하지 않는다. 루터는 타락 후에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된 것으로 보았지만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인간 본성의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용어는 아담이 부여받은 완전성을 지칭하는 바 명료한 이성, 이성에 복종하는 지성, 적절히 통제된 감성, 창조주가 부여한 모든 탁월하고 찬탄할 만한 재능들을 가리킨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는 정신과 마음, 혼과 그 능력이지만, 육체의 모든 부분 가운데 다소라도 영광의 빛이 비취지 않은 부분은 있을 수 없다.”

칼빈은 타락 전에 하나님의 형상은 정신의 빛 아래서, 순수한 마음 안에서, 모든 건강한 각 기관들 안에서보여질 수 있었다. 즉 타락 전에 인간은 완전한 상태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칼빈은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형체가 알아 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말한다. 타락 후에도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칼빈은 하나님 형상의 흔적”(lineaments) 혹은 잔여물”(remnant)이라 부른다. 또 그는 자연적 은사들이라고 불리는 이성과 의지도 타락 후에도 여전히 인간 속에 남아 있고 전적으로 상실되지는 않았고 죄로 인해 부분적으로 부패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음을 인정한다면 마땅히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인간의 타락의 파괴력에 대하여는 토마스 아퀴나스나 대부분의 스콜라주의적 신학자들의 의견을 거부한다. 그들은 타락 후나 전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이러한 견해를 배격한다. 그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의 성품과 은사들이 철저하게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죄로 인해 변질되고 부패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칼빈은 가르친다. 즉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렇다고해서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지는 않는다. 칼빈은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 응답은 오직 우리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와 같이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인간의 책임을 균형있게 가르치고 있다.

 

4. 현대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

 

현대에 이르러서는 관계적 측면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해석하고 동시에 인간의 외형과 관련시켜 해석하려고 경향이 나타난다. 관계적 측면을 강조하는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와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자인 벌카우워의 주장을 살펴보겠다.

 

1) 칼 바르트(Karl Barth)의 견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지성과 이성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고 인간 속의 구조, 성향, 특성들에 조사하려는 시도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바르트 초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은 전적으로 파괴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학후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직은 남아 있다고 했다.

바르트는 성경본문(1:27)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연구하던 이전의 신학자들이 연구가 실패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의 본문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가르치는 내용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의 형상과 모습은 인간존재가 대면(confrontation) 속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과 인간 즉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연결은 대면의 관계를 말한다.

 

이와 같이 바르트는 창 1:27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대면적 관계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면적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대면적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사성을 존재론적으로 보지 않고 관계론적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관계 속에 있는 인간하나님의 형상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만남의 차원에서 관계적으로 파악했다. 바르트는 만남의 존재,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서의 인간다움이 창조주 하나님을 닮은 것이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인류타락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바르트는 대면적 관계로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인간 실존의 근본적이고도 상실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바르트는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의 역사가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과 함께 하나님과의 교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타락의 의미를 바르트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바르트는 타락 전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어떤 교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크마는 바르트가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적 측면으로써 인간의 합리성에 지나치게 강조하려고 했던 이전의 경향들을 교정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바르트가 하나님의 형상을 명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동사적으로 보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정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닮아야 함을 더욱 강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후크마는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을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바르트의 역동적 형상 이해가 이러한 중요한 강조점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후크마는 바르트의 형상 이해에 있어서 관계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역량과 능력만을 강조한 측면에 있어서 불균형이라고 말한다. 또한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바르트의 견해는 형상의 갱신의 절실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2) 헤리트 벌카우워(Gerrit Cornelis Berkouwer)의 견해

 

칼 바르트처럼 벌카우워도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 속에서 찾으려는 사상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의 독특한 특성으로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벌카우워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존재이며, 항상 전능자의 면전에 서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상관성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상관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인간의 참 존재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적 측면과 협의적 측면으로 나누었다. 반면 벌카우워는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저서 인간론의 두 번째 장에서 이중적 형상개념에 대해 다섯 가지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광의적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할 때 이성, 도덕성, 자유 등과 같은 개념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사색적으로 빠지게 된다.

둘째, 성경은 항상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성을 중심부에 놓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본질또는 존재라고 묘사하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성이 약화된다. 이러한 시도는 성경과 조화될 수 없다.

셋째, 만일 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되었고 광의적 하나님의 형상만이 남아있다고 한다면, 결국 상반된 형상론을 취급하게 되는 결과과 된다. 또한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넷째, 협의적, 광의적 형상으로 나누는 것은 죄로 인한 인간의 부패를 가볍게 생각하는 위험성이 있다. 왜냐하면 광의적 의미의 형상론은 죄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은 영역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광의적 형상에 속해 있다는 특징과 성품들에 대해 학자들마다 다르다. 서로가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결론들이 성경으로부터 추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벌카우워는 이중적 형상론을 배격하면서 하나님의 형사은 타락 후에 전적으로 상실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체계적 교리를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벌카우워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신약에 묘사되고 있는 새 자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것같이, 인간 속에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자아, 개인의 개성 혹은 자아의식에 대한 투영으로서의 유사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성이라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풍성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계성이야말로 구원의 실체인 것이다.

 

벌카우워는 이 새로운 자아의 삶을 사랑 안에서의 삶이며 내면적 마음의 새로운 성품이며 이러한 성품은 새로운 외형적인 행위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또한 벌카우워는 하나님의 형상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라고 말한다. 특별히 벌카우워는 사랑 안에서 거하는 삶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처럼 닮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벌카우워는 하나님의 형상이 갱신되는 것은 결코 개인 중심적인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 연관되어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란 스콜라주의적 존재의 유추안에서가 아니라 바로 사랑의 유추속에서이다. 벌카우워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성이나 의자가 아니라 사랑이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쳐다볼 때 가장 강력히 떠오르는 영상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기 때문이다.

후크마는 인간은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향한 관계성을 떠나서는 자기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벌카우워의 주장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성령을 통하여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역동적인 측면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려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중적 형상론을 부정하는 그의 입장에는 우려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해에 있어 벌카우워는 오직 동사적 의미로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만 강조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형상 이해는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기능)에만 관심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인가(존재)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벌카우워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도 계속적으로 인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존재에 반드시 필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5. 결론

 

초대교부 신학자들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 영향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특징들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레니우스는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형상모양으로 하나님의 형상 이해를 이분법적으로 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레니우스의 이분법적인 이해를 거부했다.

중세 교회시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성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은 중세의 스콜라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창조된 인간은 자연적 능력에다 부여된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대표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를 살펴보면서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는 주장을 볼 수 있었다. 반면에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인간이 처음 창조 되었을 때 결핍이 있는 존재로서 추가된 은총의 필요성을 가르침으로 공로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름을 후크마의 비판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종교개혁시대의 신학자들은 이분법적인 형상모양을 구분하는 것을 거절한다. 루터와 칼빈도 형상모양을 분리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였다. 하지만 그들 간에도 하나님의 형상 이해에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본래적인 의로움에서만 형상의 의미를 찾는 협의적인 경향이 강했다. 루터는 성경에 가까이 접근하려는 시도는 하였으나 균형적인 성경의 해석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본질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반면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인간 본성의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관계적 측면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해석하고 동시에 인간의 외형과 관련시켜 해석하려고 경향이 나타났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이해에 있어서 대면적 관계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후크마는 관계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역량과 능력만을 강조한 측면에 있어서 불균형이라고 말한다. 또한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바르트의 견해는 형상의 갱신의 절실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벌카우워도 하나님의 형상이해에 있어서 관계성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이러한 벌카우워의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 형상 이해에 있어서 동사적 의미 즉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만 치중하는 불균형을 지적한다. 또한 이중적 형상론을 거절하는 그의 주장에 우려를 표한다.

필자는 초대교부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형상 이해의 역사적인 고찰을 통하여 초대교부시대와 중세시대까지는 인간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라는 존재적인 측면을 강조한 특징을 볼 수 있었다. 반면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을 위하여 관계적인 측면을 강조한 특징을 볼 수 있었다. 종교개혁시대는 현대에 관계적 측면들을 생각할 수 있는 다리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번역서적>

 

Berkhof, L. Systematic Theology, 권수경이상원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Hoekema, A. A. CREATED IN GOD'S IMAGE,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0.

 

<논문>

 

임봉호. “하나님의 形象과 그 回復으로서의 聖化에 관한 硏究.” 박사학위논문, 칼빈신학교 대학원, 2013.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