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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인간론-후크마-요약

훈나겸 2018. 5. 18. 05:00

인간론

후크마는 인간은 피조물인 동시에 하나의 인격체, 곧 피조된 인격체라고 말한다. 그는 성경에서도 사람이 피조물됨과 인격체됨을 동시에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피조물됨은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인격체됨은 로봇처럼 수동적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선택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p15-16)

 

구약의 가르침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성경 구절

1) 창세기 1:26-28(성경 본문도 쓸 것)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형상”(image)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첼램(צֶלֶם)이며 모양”(likeness)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데무쓰(דְּמוּת)이다. 창세기 1:26에서 형상이란 단어와 모양이란 단어가 창세기 5:1에는 모양이란 단어만 사용되고 있다. 창세기 5:3에서는 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으나 그 순서만 바뀌어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창세기 9:6에 다시 형상이란 단어만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통하여 이 두 단어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두 단어가 나타내고자 하는 사상은 사람은 어떤 점에서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며,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p26-28)

 

창세기 1:26로부터 온 땅과 동물들을 다스리는 일이 하나님의 형상의 한 측면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다. 이러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점에서 사람은 하나님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땅에 대하여 궁극적인 통치권을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27절로부터 추출해 낼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의 또 다른 측면은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는 참 의미는 첫째로, 남자는 여자와의 동반자적 관계가 필요한 존재이며 둘째로, 사람이란 사회적인 존재라는 의미이며, 셌재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서로 보완한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로이 홀로있는 존재가 아니라 교제 가운데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축복하시고 그들에게 사명을 위탁하셨다는 사실로부터(28) 우리는 사람이 인격을 소유한 존재이며 동시에 책임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책임적인 존재라는 뜻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반응을 하는 존재이라는 말이며 궁극적으로는 창조주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에게 대해서 반응하는 책임적 존재라는 사실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p28)

 

2) 창세기 5:1-3

인간이 죄로 타락할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후크마는 창세기 5:1을 통하여 타락 후에도 아담을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로 부르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하나님의 모양이 아담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p30)

 

3) 창세기 9:6

사람이 타락하여 부패하고 악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9:6에서 살인은 금지되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사람은 아직도 그분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p33)

구약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타락 이후에도 아직도 하나님이 형상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신약의 가르침

신약성경 중 한 구절이 타락한 인간이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1) 야고보서 3:9

하나님의 형상을 지음 받은이라는 문구에서 지음받았다는 동사는 게고노타스(γεγονότας)인데 이 되다혹은 만들어지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헬라어 동사 기노마이(γίνομαι)의 완료 분사형이다. 헬라어에서 완료시제는 계속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과거의 행동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묘사되고 있는 사람은 과거의 언젠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그리고 아직도 그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다. (p38-39)

히브리서 1:3절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정확한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발견되어짐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시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의 주요한 관계성을 바라보게 할 것이다. 삼위 중 두 번째 인격자이신 분이 사람의 본성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과 닮은데가 전혀 없는 그러한 성품을 어찌 성자께서 취하실 수 있었을 것인가? 이처럼 성육신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교리를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p42-43)

 

후크마는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삶의 중심부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한다.(p44)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

1) 로마서 8:29

이 구절은 사람이 좀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갈 때 일어나는 과정으로서의 도덕적, 영적 갱신을 묘사하고 있다. 즉 그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한 사람의 타락으로 인하여 몹시도 부패해졌으며 따라서 사람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원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p44-45)

2) 고린도후서 3:18

이 구절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주의 영광을 반영할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반영하고 있는 영광의 주인이신 그분,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3:18은 이러한 변화가 이생에서 계속되어지는 과정이며 이러한 변화는 성령의 역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타락의 희생물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닮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p46-48)

 

구속의 목적이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p48-53)

후크마는 하나님의 형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종말론적 목표라고 말한다. 이 목표를 향해 우리는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p53-54)

 

후크마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구속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새로워지는 일은 우리 자신들의 노력이기도 하다고 신약성경은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분명히 새로워지는 일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분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몇몇 신약성경은 하나님을 따라 닮아 새롭게 되는 일이 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하다. (p54)

 

후크마는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닮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화의 궁극적 목표도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온전히 닮는 것이라고 말한다.(p56-59)

 

하나님의 형상: 역사적 개요

1. 이레니우스

이레니우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합리적이고 자유스런 성품이다. 다시 말해서 타락시에도 상실되지 않는 성품을 의미한다. (p63)

후크마는 이레니우스가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이후에도 보존된 측면과 아울러 상실된 측면으로 구별하는 것에는 높이 평가하지만 형상과 모습의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하여 이 두 단어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p64-65)

2.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로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에서 찾고 있다. (p66)

후크마는 타락 후에도 보존되는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죄로 인해 부패되고 그후 신의 은총을 받은 자 안에서 다시 회복되는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구분지어 말한 토마스의 입장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오늘날 인간은 하나님을 올바로 닮을 수 없다는 토마스의 주장을 환영한다. 그러나 다섯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토마스적 이해를 반대한다. (p71-72)

첫째로,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전적으로 인간의 지성적 본성에서만 찾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견해는 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보다는 희랍사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지성을 가리켜 신적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형상을 일차적으로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 속에서 찾으려는 것은 형상에 관한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 즉 하나님과 다른 동료인간을 향한, 인간의 관계성을 매우 약화시키는 경향을 띠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얕잡아 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말이다.(p72)

둘째로, 인간 창조의 첫 순간부터 인간 본성 속에는 저급한 본성고급한 본성사이의 갈등이 있다고 주장하는 토마스의 견해는 결국 인간의 원래적 본성의 선함을 격감시키고 있다. (p73)

셋째로, 토마스에 의하면, 인간은 타락 전이나 타락 후나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단지 한 가지 다르다면 초자연적 은총이라는 선물의 차이다. 이 선물은 타락 전에 인간이 받은 것으로, 인간 본성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후에 추가로 부여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타락이 인간에게 미친 영향이란 고작해야 추가로 부여된 은총의 상실만을 의미할 뿐이다.(p73)

네 번째로, 이성과 저급한 세력들간의 마찰은 결국 인간의 육체를 저급한 본성의 장소로 격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 속에는 저급한 세력들과 고급한 세력들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 (p74)

다섯 번째로, 타락 후에도 인가은 은혜와 협력하여 자기의 공로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은 결코 힘들여 버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라고 가르친다. (p75)

 

3. 존 칼빈

하나님의 형상은 정신의 빛 아래서, 순수한 마음 안에서, 모든 건강한 각 기관들 안에서 보여 질 수 있었다. 또한 골로새서 3:10과 에베소서 4:24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원래 참된 지식, 의로움, 거룩성을 포함하고 있다.(p77)

1) 본래적 하나님의 형상의 온전성-초자연적으로 덧붙여진 은총에 의해 점검될 필요도 없이, 인간은 처음부터 아무런 결함없이 지음받았다는 사실, 처음 창조되었을 당시의 인간은 마땅히 그들이 할 수 있었듯이,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할 수 있었다.

2) 인간 속의 하나님의 형상에 미친 타락의 파괴적 결과들-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단지 무엇인가를 박탈당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부패한 존재이다.

3)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 점은 칼빈의 신학과 윤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점이다.

4) 형상과 모습을 구별하기를 거절한 점이다.

5) 하나님의 형상이 새롭게 되는 것은 인간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그 하나님에 대한 인가의 책임적 반응이다-하나님의 주권사상과 인간의 책임성을 합친 생산물이다.

6) 하나님의 형상이 새롭게 되는 것은 점진적이고도 동적이며, 장차 오는 삶이 도래하게 될 때에 비로소 완성된다.(p87)

4. 칼 바르트

이전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자리잡고 있는 인간 속의 구조들과 특성들에 대해 정확히 조사하려고 힘써왔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는 그들의 시도는 철저하게 잘못이었다고 바르트는 결론짓는다.

우리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대면의 가능성이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가에게 부여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바르트는 주장하다. 바르트는 이러한 대면적 관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왜냐하면 이와 동일한 대면적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로적 유사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 유사성이 있는 것이라고 바르트는 말한다. (p89-90)

후크마는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바르트의 이해가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적 측면으로써의 인간의 구조, 특별히 인간의 합리성에 지나친 강조점을 두고 있는 일반적 경향에 대해 전반적인 교정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향한 사랑이다. 형상에 대한 바르트의 역동적 이해는 이러한 중요한 강조점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p93)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는 성경의 자료를 부적당하게 재생산해 낸 결과라는 측면에서 그는 마땅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면, 형상은 순전히 관계적이며 따라서 순전히 형적이다. 대면과 만남을 위한 역량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단지 역량과 능력 그 이상임에 틀림없다. 사탄과 귀신들도 서로끼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대면하고 만나는 존재가 아닌가? 중요한 사실은 만남과 대면의 역량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대면하는 방법이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인간의 -의 관계의 가능성이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측면이라는 점은 충분히 납득되고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닮음은 단지 형식적 행동 능력과 역량 안에서가 아니라, 구체적 행위들과 태도들을 통하여서 분명하게 나타나야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순전히 관계성으로만 이해하려는 바르트의 입장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에 미친 타락의 엄청난 영향려고가 그 형상의 갱신의 절실한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하나님의 형상론은 성경적 인간론과는 많은 거리고 있는 것이다. (p93-94)

5. 에밀 부른너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성의 모든 영역,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 하나님과의 교제의 가능성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부른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형식적 의미와 실질적 의미로 나눈다.(p95-97)

하나님의 형상의 형식적측면이란, 인간의 책임성,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능력, 하나님께 대해 대답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인간존재의 궁핍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답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을 때에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의 이러한 형식적 측면은 단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성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동료 이웃에 대한 관계성도 포함하고 있다. “형식적 형상이란 용어가 추상적 개념처럼 들리지만, 부른너에 의하면 이 형식적 형상은 그 내용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말하기를, 자유성, 이성, 양심, 언어 등과 같은 것들은 내용적 측면에서 이 형상에 속한다고 한다.(p97)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식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될 수 없다. 심지어 죄를 지었을 때에도 인간은 그것을 상실하지 않는다.(p98)

하나님의 형상의 실질적측면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존경하는 반응, 경외하는 동시에 감사하는 사랑을 갖고 드리는 반응, 말로만 하지 않고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쳐 드리는 반응을 말한다. (p99)

부른너는 실질적 의미의 형상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상실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구속의 전 과정을 통해서 다시 인간속에 회복되어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형식적 형상은 상실되지 않았다고 말한다.(p101)

후크마는 형상에 대한 부르넌의 해석에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점에서 동의한다. 첫째로, 형상에 대한 그의 역동적 이해, 인간존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의 빛 아래에서 형상을 이해한다는 점;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의 중심부는 이성이나 지성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 셋째로, 하나님의 형상에 미친 죄의 파괴적 영향력들을 강조하고 있는 점; 넷째로, 형상의 이중적 측면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점; 다섯째로, 타락한 인간은 아직도 실제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 있어서 후크마는 부른너에 견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로,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부른너는 결국 첫 아담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배력하는 것이며 따라서 제 2의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제기하게 된다는 점이다. 둘째로,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그의 입장은 결국 그가 주장하고 있는 창조와 죄 사이의 구분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도록 한다. 만일 역사의 특정한 시간에 첫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역되고 죄에 빠지게 된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인간에게 죄가 있게 되었겟는가? 창조될 때에 무엇인가 모자라는 불량품처럼 지음받았기 때문이란 말인가? 셋째로, 부른너는 인간의 죄악성에도 불구하고 형식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주장한다. 비록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 잘못된 반응을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존재로 남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부른너에게 있어서 형식적 형상은 그 내용을 갖고 있었다. 자유성, 이성, 양심, 언어 등이 그것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식적 형상들이 완전히 보존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온전한 상태로 오염됨이 없이 보존되어 있다는 말인가? 이 형식적 형상에 죄가 미친 영향력은 없단 말인가?(p102-105)

6. 벌카워(G. C. Berkouwer)

바르트나 부른너처럼 벌카워도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 속에 발견되어진다는 사상을 반대한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인간의 이성 속에서 찾으려는 노력들이 성경과 상치되는 것으로 간조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견해들은 인간의 독특한 특성으로서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이다.(p105)

개혁주의 학자들은 타락을 통해서도 아직 상실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데 과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결국 죄로 인해서도 상실되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의 한 측면이 남아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 벌카워는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적 측면과 협의적 측면으로 나누려는 시도와 그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저서 인간론의 두 번째 장에서 그는 소위 이중적 형상개념에 대해 다섯 가지 문제점들을 제시한다.

1)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적 의미로 묘사하려는 시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일차적으로 인가의 존재론적, 심리학적 구조로 이해하도록 이끌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성, 도덕성, 자유등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고 정의하려 할 때에 우리는 곧 성경적 근거가 없는 사색적 추상에 빠지게 된다.

2)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본질혹은 존재라고 묘사하기 시작한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성을 일종의 부록으로 전락시킬 수밖에 다른 길이 없게 된다. 그러한 시도는 성경과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게 된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성을 그 중심부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3) 만일 협의적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되었고 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만이 남아있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상반된 형상론을 취급하게 되는 결과가 된다. 협의적 형상이라 할 때, 우리는 순종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합치되는 일을 의미하고, 광의적 형상이라 할 때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이란 분과 유사성이 있다는 의미를- 이성, 의지, 그리고 그밖의 특성들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 나타낸다. 그렇다면 형상론에 관한 이러한 두 가지 개념들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의미있게 하나로 묶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4) 협의적, 광의적 형상으로 구별짓는 일은 죄로 인한 인간의 파격적 부패를 가볍게 생각하는 위험성 속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별, 특히 광의적 의미의 형상론은 인간 속에 아직도 죄로 인해 영향을 받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5) 광의적 협의적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는 일은 특히 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속에 속한 것과 속하지 않은 것을 임의적으로 결정짓도록 유도하게 된다. 광의적 형상에 속해 있다는 특성과 성품들에 대해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이것을 잘 반영해 준다. 광의적 형상에 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서로가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러한 결론들이 성경으로부터 추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해 주고 있다. (p106-109)

벌카워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형상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형상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이성이나 이지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쳐다보게 될 때 가장 강력한 영상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은 그의 놀라운 사랑이기 때문이다.(p112)

후크마는 인간은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향한 그의 피할 수 없는 관계성을 떠나서 자기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벌카워의 주장에 대해 동의한다. 더욱이 타락한 인간의 현재적 상태에 대한 그의 균형잡힌 견해-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없이는 오늘날 인간은 철저하게 부패되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거듭나지 못한 사람 안에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통하여 죄의 억제력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공감한다. 특별히 벌카워의 위대한 공험이라 할 수 있는-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능동적으로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는 갱신을 하나님의 형상의 한 측면으로 보는 일-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역동적 견해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후크마는 몇 가지 점에서 벌카워의 견해에 대해 주저한다. 특별히 이중적 형상론을 부정하는 그의 입장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갖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중적 의미로 보도록 인도하며, 타락한 인간도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의 보유자라고 간주하고 있다. 성경 중 두 구절, 창세기 9:6과 야고보서 3:9은 타락한 인간이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또 골로새서 3:10과 에베소서 4:24과 같은 구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은 본문들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한 인간 속에도 계속 보유되고 있다는 성경의 분명한 선언을 부정하거나 무효화 시키지는 않는다. 위에서 언급된 두 가지 종류의 본문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이해하면, 한편으로는 타락한 인간이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유하고 있으나, 또다른 의미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별하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성경적 자료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단순히 어떤 기능을 작동하는 이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기능)에 관한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인가(존재)에 관해 관심을 갖게 한다. 벌카워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사은 오직 동사적의미만을 갖고 있다.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닮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구절은 하나님의 형상이 명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시말해서 형상”(image)은 인간 실존의 독특성을 말하는 것이며 이 형상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간되어 감이라는 사실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가리킨다.

벌카워는(타락 후에도)인간은 계속적으로 인간으로 남아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벌카워에 의하면 타락을 통해 전적으로 상실됨)을 구별지어 말한다. 이러한 구별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본질로부터 어느 정도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벌카워의 이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마치 자동차에 붙여진 악세사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존재에 반드시 필수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도 계속적으로 인간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인간만이 갖고 있는 유일한 독특성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보유하는 일이 인간 존재의 필수적인 일이지 결코 부수적인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가?(p114-116)

 

하나님의 형상: 신학적 요약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상은 인간은 마땅히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투영하고, 하나님을 대표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첫째로, 인간은 하나님을 투영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땅 위의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은 보여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인가이 진정으로 자기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 있을 때에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을 대표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표하고 대신한다면 이것은 마치 외국에 나가 있는 대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대사가 자기의 본국을 대표하여 본국의 권위를 나타내듯이, 인간도(남자와 여자)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리자들로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들을 해야 한다.(p119-122)

1. 구조적 측면과 기능적 측면

후크마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구조성과 기능성의 양면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한다.(p124-125)

이 두 가지 측면을 묘사하기 위하여 다양한 용어들이 사용되어 왔다: 광의적, 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과(헤르만 바빙크와 루이스 벌코프), 형식적 측면과 실질적 측면의 하나님의 형상(부른너), 본체성과 관계성의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형상(헨드리쿠스 벌코프), 부여된 측면과 창조해 나가는 측면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데이빗 케언), 이 두 가지 종류의 측면은 하나님의 형상이 갖고 있는 근본적 측면들이라 할 수 있다.(p125)

광의적, 형식적, 구조적 측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이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성과 소명들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것을 행하도록(기능)하게 하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상태를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다.(p126-127)

그러면 협의적, 실질적, 기능적 의미에서 본 하나님의 형상이란,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성을 그속에 포함시킨다. 그들의 성경적 근거는 주로 다음의 두 구절에 두고 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3:10).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4).

여러 신학자들이 이런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술해 왔다: 사람이 하나님께 바른 응답을 하는 것으로(부른너);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으로서(오토 웨버); 사람이 하나님과 이웃들과 다른 피조물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으로서(헨드리쿠스 벌코프); 혹은 구체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성화로서 묘사했다(벌카워). 그렇다면 협의적 의미에서 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어 작동하는 인가의 올바른 기능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p127-128)

후크마는 하나님의 형사의 구조적 측면과 기능적 측면 사이의 구별을 통해 인간의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를 말한다. 사람이 피조될 당시에는 그가 하나님께 완전 복종하여 살았기에 구조적 혹은 광의적 의미에서 본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기능적 혹은 협의적 의미에서 본 하나님의 형상도 생생하게 나타냈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사람은 구조적 혹은 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그대로 보유하긴 하였으나 기능적, 협의적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하게 되었다.(p129-130)

후크마는 인간의 구조를 이차적인 것으로, 그의 기능을 일차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기에 우리는 어떠한 임무를 수행하거나 어떤 사명을 완수하거나 혹은 어떤 소명을 추구해 살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재능들-그의 위대하심과 그의 영광의 얼마간을 반영해 주는 재능들-을 부여해 주셨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는 것은 주어진 임무와 재능들을 함께 본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어진 임무가 일차적이요 재능들은 이차적이다. 재능들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p130)

 

2.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그리스도

후크마는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것, 둘째로 온전히 이웃을 향하여 서 있는 것, 셋째로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p132-133)

 

3. 삼중적 관계성 속에 놓여있는 인간

1) 인간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예속된 피조물이며, 하나님에 대해 우선적 책임이 있는 피조물이다. 이것이 인간의 첫째되고도 가장 중요한 관계이다.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는 이 관계에 예속되거나 이 관계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p135)

2)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동료 인간을 향하여 있다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 1:27절이 말하는 바는 인간은 홀로서는 완전하지 못하며, 따라서 고립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떠나서는 완전치 못한 존재이기에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p136-137)

3)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만물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1:26-28역시 사람을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과 지배권을 갖고 있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과 인간과의 이러한 관계가 의미하는 바는 위로 하나님을 모신 인간은 동시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자연의 신비를 발견하며 자연의 모든 자원들을 찾아내도록 명함을 받은 자연의 지배자로, 자연 위에 서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인간-즉 우리는-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섬기는 자와 같은 자세로 자연을 지배하여야 한다.(p139-142)

 

우리 인간은 이 세 관계 중 어느 하나를 떠나선 존재할 수도 없으며 바르게 기능을 할 수도 없다. 더 나가서 이 관계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져 있다. 사람은 하나님과 피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관계는 가장 우선되는 관계이며 따라서 가장 중요한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관계 역시 다른 두 관계없이는 존재하지 아니하며 다른 두 관계를 떠나선 그 관계가 실현되지 못한다. 우리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땅에서 구현되는 많은 관계 중의 하나이다. 성경이 종종 말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웃에 대한 사라으로서 나타낸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비록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더라도 그는 거짓말쟁이다. 더 나가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또한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지배와 돌봄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책임성있게 돌볼 때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p143)

 

4. 본래적 형상

타락 이전 아담과 하와가 존재했던 원상의 상태는 완전하거나 불변의 완성단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인간은 최초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결정체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성장과 연단의 필요성을 갖고 있는 존재였다.(p146-147)

5. 변질된 형상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은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변질되어 일그러져 버렸다. 구조적 측면의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존속했으나-인간의 재능, 재질, 역량 등은 타락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았다-이제 인간은 이러한 재능들을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에 우상들을 섬기게 되었다. 타락한 인간은 그의 교제의 역량을 타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사용하기 보다는 그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임의로 조작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한 순종 속에서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땅과 땅의 모든 자원들을 착취하게 되었다.(p147-150)

6. 새롭게 된 형상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능력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던 인간이 이제는 구속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그것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할 중요한 사실은, 형상이 새롭게 되는 것은 사람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책임성도 포함되고 있다는 점이다.(p151-157)

7. 온전케 된 형상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영화롭게 되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 또한 그리스도의 영화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형상의 종국적인 완성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어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그 모양이 완성될 것이다.(,p162)

그러므로 다가올 세상에선, 그 목적을 위해 인간이 창조된 삼중적 관계가 계속적으로 유지될 것이며 더욱 그 관계가 심화되며 무한히 풍요롭게 될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게 될 것이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되며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향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때에 인간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비로소 완전케 될 것이다.(p166)

 

여기에 리챠드 마워(Richare Mouw)박사의 논평을 덮붙여 들어보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위한 신학적 토의 과정 중에서 이루어진 괄목할만한 제안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집단적차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어느 한 개인이나 한 그룹이 하나님의 형상과 이에 포함되는 모든 것을 온전히 지니거나 그것들을 완전하게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집단적으로 소유되어 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이 땅의 사람들 가운데서 나뉘어 분배되어 진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개인들과 집단들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형상의 다양한 국면들을 어렴풋하게나마 보게되는 것이다.(p174-175 When the Kings, p. 47.)

자아상의 문제

후크마는 자신과의 관계가 하나님과 타인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바른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는 관계라고 말한다.(p178-179)

1. 자아상의 변질

후크마는 타락 후 자아상의 변질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하나는 자신에 대해 너무 높은 평가를 갖으려는 경향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그가 마땅히 이르러야 할 그 단계에 너무나도 못 미친다는 것을 알기에 종종 그 자신을 비하하거나 경멸하며 심지어 그 자신을 미워하는 경향이다.(p181-183)

 

2. 자아상의 새로워짐

 

후크마는 타락으로 인해 변질되어 버린 인간의 자아상이 구속의 과정을 통해 새롭게 되어진다고 말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실 때 그는 우리로 하여금 자아상의 첫 번째 변질인 죄된 자만심을 버리도록 하신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참된 겸손을 배양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우리에게 자신의 참된 이미지를 제공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의 장점과 약점에 대한 솔직한 인식을 하여야만 한다.(p185)

둘째로 부정적 자아상에서 긍정적 자아상으로 바뀐다.(186-187)

1)크리스챤은 그 자신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결정적으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지금 막 새 사람을 입은 자로-그러나 그 새 사람이 여전히 점차적으로 갱신되어가야 할 존재로-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토대로 하여 신자의 자아상은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이어야 할 것이다.(p188)

2)로마서 8:9절은 신자들은 육신에 속한(즉 육신에 노예된) 자들이 아니라 영에 속한(즉 성령이 자유케 하시는 제도 아래 있는)자들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신자들은 육신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며 억압당하는 대신에 이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에 이르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그러기에 여기서 다시 한번 긍정적인 자아상이 부각되는 것이다.(p189)

3)고린도후서 5:17은 현재시제로 쓰여져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지금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완전하게 완성된 새로운 피조물이란 뜻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의미에서이다. 신자로서의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을 이러한 식으로 바라다 보아야 한다.(p191)

크리스챤의 자아상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을 위한 삶, 다른 사람을 위한 삶,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존하고 개발하는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르 우리 자신들의 바깥으로 인도한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내어 자유롭게 함으로써 우리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한다.(p193)

 

죄의 기원

1. 아담은 실제로 역사적 인물이었는가?

인간타락의 이야기는 인간은 완전 무결의 상태로 지음 받았으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들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한 사건으로 인하여 타락의 상태로 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창세기 3장에 나타나는 이 사건의 이야기가 죄가 어떻게 들어 왔나에 대한 설명을 주진 않지만(이것은 결코 설명도어질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 그것은 시간의 어떤 지점에서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 왔다고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죄는 우연적 사건이었지 본질적인 사건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죄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하며, 인간은 다시 죄없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성이 있다는 것이 인간됨에 본질적 요소가 아니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죄없는 자였으나 참 인간이셨다. 첫 번째 머리인 아담을 통해 우리가 죄있는 자가 되었으며, 두 번째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죄없는 자가 될 수 있다.(p202)

 

2. 우리는 행위의 언약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가?

헤르만 바빙크, 찰스 핫지, 로버트 대브니, 윌리암 쉐드, 게할더스 보스 그리고 루이스 벌코프는 행위 언약의 교리를 가려쳐 왔고 그것을 변호해 왔다. 하지만 후크마는 행위언약을 인정하지 않는다.(p204-209)

 

3. 천사들의 타락

죄는 인간세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영들이 세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영들은 그들 밖에 있는 어떤 힘이나 세력에 의해 죄를 짓도록 유혹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타락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는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이 외부로부터 왔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더 마귀에 의해 유혹을 받았다.(p211)

 

4. 말하는 뱀이 있었는가?

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의 뜻밖에 있거나 너머에 있지 않다.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심으로 심지어 악으로부터도 선을 가져오실 수 있기에 인간타락을 허락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뜻 밖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죄를 면제해 주거나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죄는 언제나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뿐이다.(p225)

 

죄의 퍼짐

로마서 5:12-21을 해석함에 있어서 나는 직접 전가론과 실재론의 접근 방법을 결합시키고자 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우리의 머리요 대표자였기에 그의 죄책이 우리의 셈에 계산되어진 것이다(직접전가). 또한 아담이 범죄했을 때, 우리는 아담 안에 있었기에 우리는 그의 죄에 연루되었고,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실재론).(p278)

 

죄의 본질

만일 죄가 하나의 본질이라면, 만일 그것이 말 그대로 지금 우리 인간성의 본질적 한 부분이라면 어떻게 이것이 정복될 수 있단 말인가? 죄가 우리 인간의 본성의 한 부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타락한 인간의 모습과 전적으로 다르지 않은 모습을 입고도 죄가 없으셨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죄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창조와 함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후에 온 것이다. 즉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의 기형적인 변태이다. 죄를 선의 상실라고 부른 것은 아마 죄의 본질에 대한 만족할 만한 정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단지 선의 상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능동적인 반항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정의가 죄의 본질에 대해 한 면의 중요한 진리를 부각시켜 주고 있음에는 틀림없다.(p281-282)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하는 것이며 하나닌에 대한 미움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285)

죄는 육체 안이나 인간의 여러 가지 역량 중 어느 한 곳에 그 근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중심적인 곳 곧 그의 마음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p286)

죄는 행실 뿐만 아니라 생각도 포함한다.(p287)

죄는 죄책과 오염을 둘 다 포함한다.(p288)

죄는 그 뿌리에 있어서 교만이라는 형태를 갖는다.(299)

죄는 일반적으로 가면을 쓰고 있다.

1)죄는 항상 어떤 그럴듯한 이유를 저질러진다. 2)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 3) 우리는 종종 우리의 죄를 숨기려한다.(p290-292)

 

죄의 억제

칼빈은 분명히 일반은총이 인간의 죄성을 제하지는 않지만 인간 삶에서 죄의 출현을 억제하며 비신자들로 하여금 많은 진리를 발하도록 하시며 많은 좋은 문화적 소산들을 산출케 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p316)

 

전인

인간은 단일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육체적인 측면과 정신적 혹은 영적측면을 갖고 있으되 우리는 이 둘을 분리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육체를 갖는 영혼 혹은 영혼을 갖는육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상이한 부분들의 복합체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전체성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하며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p359)

 

자유의 문제

인간이 참된 자유를 가진 상태로 피조되었건만 그들은 죄를 지음으로 이 자유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됨으로 인간은 선택에 대한 능력(이 능력은 인간본성과 분리할 수 없는 요소이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참된 자유인 하나님에 대한 절대 복종 속에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p382)

인간이 이제 참된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이제 죄짓는 일을 선택하여 기꺼이 죄를 범한다. 그래도 여전히 선택을 하고 있되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죄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다.(p384)

진정한 자유란 섬김이라는 개념과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유와 섬김을 대조적으로 생각한다. 섬기는 자는 결코 자유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로마서 6장으로부터 우리는 종노릇하게 하는 섬김-죄의 섬김-에 대해 배운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된 후에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섬김의 사태로 들어가게 된다. 즉 우리는 의와(18) 하나님께(22) 대해서 종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이 완전한 자유라는 것을 알면서 기쁨으로 그분을 위해 살게 된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p399-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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