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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

-신적 삶 안에 있는 관계성과 시간성-

 

 

1.     삼위일체 담론의 과제 입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하나 됨과 분화로, 일치와 다양성으로, 영원성과 시간성으로 생각한다. 삼위일체의 근본 논제는 하나님의 셋 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적 삶을 자기-분화(self-separating)와 재-연합(reuniting), 죽음과 부활로 재정의할 수 있는 역동성에 있다.

 

1)     삼위일체 담론의 과제

삼위일체 담론의 일반적인 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 이해를 탐구하는 것이며, 왜 우리가 하나 안에 셋’(three-in-one)셋 안에 하나’(one-in-three)라는 다소 어색한 용어를 사용하는지 그 이유를 살피는 일이다. 이 책에서는 그 역사적 과정을 자세히 다루지 않을 것이다 대신 삼위일체 고백이 하나님께서 세계와 어떻게 관계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구성적 대답이라는 구성적 가설을 시험해 보고자 한다.

 우리의 영원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시간적인 세계와 관계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구성적 대답을 추구하면서, 나는 시간과 영원성 사이에 철저한 분리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문제 삼고자 한다. 만일 하나님이 순수 무시간적으로 정의된다면, 분명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세계와 관계될 수 없을 것이다. 영원성이 무시간적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이 세계의 창조자와 구원자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성이 시간성과 단절된 것으로 정의할 이유가 없다. 성서가 하나님의 역사적인 활동에 대해 보고하고 있듯이, 이스라엘 하나님에 대한 히브리 족속과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은 시간적인 경험이었다. 내 생각을 종합해본다면, 하나님은 영원하고 시간적이며, 또한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성은 종말론적으로 시간을 이해하고 포함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삼위일체의 논제는 개체성과 관계성의 연결에 대한 새로운 통찰들과 관계된다. 이 시대 인간의 인격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회 심리학적 개념인 관계성(relationality)은 신적 삶의 새로운 이해를 푸는 열쇠가 되고 있다. 신학자들은 인간의 인격을 관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삼위일체 세 위격의 관계를 해석하였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자리(identity)는 점차 상호 의존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적 자리는 역동성, 운동, 변화, 그리고 통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관계적 자리가 시간을 함유하는지 물어야 한다.

 삼위일체와 종말론이 밀접한 관계로 얽혀 있다고 보는 헤겔과 몇몇 신학자들의 유산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자기-분리를 수행하는 한 분이신 하나님의 삶은 종말론적인 재-연합을 요청한다. 여기서 재-연합은 예수뿐만 아니라 우리와 창조의 전체 세계를 포함한다. 삼위일체 삶이란 그 자체가 구원의 역사이다. 강조해서 말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완전은 종말론적인 미래에 완성될 실재이다.

2)     잘못 인도된 가설들

잘못 인도된 가설은 삼위일체 교의 자체가 하나의 신비라는 개념과, 근본적인 문제는 셋 됨과 하나 됨의 관계와 관계한다는 가설이다. 이 두 가설 가운데 하나에만 관심하게 되면 잘못된 삼위일체 논의에 빠질 수 있다.

첫 번째 전통적인 교의학 책들은 성 삼위일체 교의가 인간의 정신으로 결코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곁길로 빠지게 한다.

여기에 신학적 오류는 하나님의 본래적 신비와 하나님에 대한 교의적 사유의 차이를 간과하는데 있다. 바울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판단과 찾을 수 없는길을 지닌 하나님의 신비를 노래한 것이다( 11:33).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음(inscrutability)과 찾을 수 없음(unsearchableness)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성찰이다. 삼위일체 교의는 찾을 수 없음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만일 신학자가 충분히 납득이 가도록 설명한다면, 삼위일체는 이해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1] 신학적 오류는 하나님의 신비에 호소함으로써 교의적 모호성을 변명하는데 있다.

삼위일체 교의를 신비라고 했던 전통은, 카파도키아 교부신학자들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칼 라너와 같은 신학자도 삼위일체 교의는 언제나 신비라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신비이기 때문에 교의도 신비가 된다.

라너의 진술은 내게 조금 염려가 된다. 정말 신비로운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이다. 삼위일체 교의는 교의일 뿐이다. 다른 교의와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교의는 신앙을 이해하고,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복음적 해설을 분석적이며 종합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해설하는 과정에서 간혹 논리의 장애를 만난다고 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음(ineffability)을 하나님의 특성(virtue)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잘못된 발걸음은 첫 번째 잘못된 발걸음에서 비롯되는 지류로서, 삼위일체 사유의 중심 논제는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되는대수와 관계된다는 가설이다. 종종 삼위일체는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 일원론적 유일신론과 일치를 인정하지 않는 삼신론의 양극적 논쟁으로 표현된다. “삼위일체 교의의 중심 문제는, 어떻게 세 위격의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인지∙∙∙어떻게 일치 안에 삼위일체와 삼위일체 안에 일치가 동일한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전개하는 것이 오히려 불필요한 혼돈을 야기한다고 생각한다.[2] 또한 신학자들은 결코 삼신론을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다신론을 지지한 적이 없다. 다음으로 유일신론에 대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유일신론은 너무 단순하다.

이제 우리는 하나 안에 셋과 셋 안에 하나가 복잡한 개념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개념이 복잡하다 해서, 논의를 하나님의 신비로 돌린다든지 서로 모순이 되는 수학으로 물음을 재정의할 수는 없다.

3)     너머와 내밀

삼위일체 개념은,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께서 너머이면서 내밀이어야 한다는, 역설적 의미에서 일어난다. 너머의 하나님은 궁극적인 하나님이다.

그러나 너머로서 충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밀하신 분이다. 신약성서는 하나님을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로 보도한다. 너머와 내밀의 역설적인 조화가 가장 의미 있게 표현된 곳이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사건이다. 이 구원사건은 우주 전체를 통해 나의 가장 내밀한 자아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휩싸이게 하는 사건이다.

나는 너머와 내밀의 근본적인 감응이 삼위일체 사유와 관련하여 개념적 문제를 구성하게 하는 추진력이었다고 생각한다. , 하나님의 절대성과 상대성을 함께 묶는 논리적 문제의 뿌리가 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 곧, 하나님의 영원성과 세계의 시간성을 함께 묶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을 시간 너머의 영원한 분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밀한 분으로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내밀함은 시간의 경계 안에서만 경험될 수 있다.

어쩌면 시간의 경계 안이란 말은 너무 강한 표현일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영원성이 인간의 시간성의 영향을 경험하였고, 이 영향이 하나님의 삼위일체 삶에 내면화 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듯싶다. 영원성은 시간의 우연성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것이 십자가 사건에서 이루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자신을 복종시킨다. 그 결과 예수는 고통을 당하고 죽게 된다. 죽어가는 아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는 무한한 아픔을 겪는다.

4)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성과 상대성이 가장 첨예한 긴장관계를 이루는 때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의 관계를 논하는 경우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 논의들은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에 관심한다.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란 종종 본질적삼위일체(essential Trinity) 혹은 존재론적삼위일체(ontological Trinity)라 불리는데,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 순환(상호 침투, mutual penetration, perichoresis)의 관계를 말한다. 초기에 테르툴리아누스가 소개한 경세(economy, oikonomia)의 개념을 확장하여, 니케아 후기 신학자들은 창조 세계 안에서 경세적 삼위일체(혹은 공현삼위일체” Trinity of Manifestation)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를 나눠 생각하면 몇 가지 이점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나누다 보면 예기치 않은 분리가 생긴다. 특별히 제2위격인 예수 그리스도를 다룰 경우가 그렇다. 시간적 역사의 흐름 안에서 일어나는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경세에 속한다. 그러나 영원한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영원한 로고스만이 내재적 삼위일체에 속하기 때문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시기의 신학자들은 영원한 로고스와 시간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속성이 인간의 속성과 교류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속성이 하나님의 속성과 교류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수육하신 예수가 두 본성을 지닌 하나의 본체(인격 혹은 위격 person, hypostasis)라고 보았다. 여기서 하나의 본체는 하나님의 본체이지 인간의 본체가 아니었다. 예수는 인간의 본성을 지닌 것이지 인간의 본체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시간의 변화,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신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예수가 고통을 당하여 죽을 수 있었지만, 신성은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이러한 구분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경세가 본래적 하나님의 존재 밖에 있는 우리를 향한 것이라는 의미를 해설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구조에서 보면,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황에서 가현설과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에 직면하여 진지하고도 본래적인 그리스도의 의미를 찾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삼위일체 그리스도론들은 너머의 제단위에서 내밀하신 하나님을 희생시키는 모험을 겪어야 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고대 신학자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해준다. 니케아는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주장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주었다. 거기다가 경세적 삼위일체는 아버지 하나님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 전체가 세계와 관계한다는 성서적 통찰을 다시 고백하게 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임마누엘론(emmanuelism)이 내재적-경세적 삼위일체의 구분으로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았는지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 요컨대 경세적 삼위일체의 개념이란 보다 실제적이고, 중요하며, 시간과의 관계를 넘어선 영원적 삼위일체의 시간적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여기서 우리는, 시간적 경세적 삼위일체가 영원적 내재적 삼위일체에 종속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관계성을 희생하고 하나님의 절대성을 보호하고자 은밀히 종속성으로 복귀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두 계기를 통해서, 최근 삼위일체 담론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육의 역사가 하나님의 경험 속에 시간성을 통합시킨다고 한 칼 바르트의 주장 속에 나타난다.

인간 예수의 실존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고, 창조자가 피조물이 되었으며, 영원성이 시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시간을 입고 시간을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 하나님 자신이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 시간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 일을 행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성과 연합하고 교류하면서 시간적이 된다.

최근 삼위일체 담론에서 주목해야 할 두 번째 계기는, 경세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가설을 탐구하는 일에서 찾아진다. 이 형식은 칼 라너가 내놓은 것인데, 우리는 이 형식을 라너의 규정(Rahner’s Rule)이라고 부른다. 이후 융엘과 물트만 같은 학자들이 라너의 규정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라너의 규정은 복음서에 보도된 임마누엘론의 심오하고도 철저한 관계성을 해설하는 가운데 탄생되었다.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하는 관계는 아버지와 예수의 사랑하는 관계이다. 관계성은 타자성을 요구한다. 사랑은 타자성을 긍정하고 독려한다. 사랑으로 타자를 묶는 것이 영이다. 이 경우 우리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사랑이 시간적인 역사의 구조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수를 바라볼 때, 시간과 단절된 영원성 안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사랑의 망상이 아니라, 우리가 실재하는 존재를 바라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 아버지-아들의 관계가 하나님의 삶에 내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사랑으로 모든 존재를 묶는 능력인 성령과 연합하여 아들과 세계의 관계를 로고스-창조자-구원자로서 인정한다면, 창조와 구속의 전체 역사가 하나님의 삶에 내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이것이 구원의 경세라면, 구원의 경세가 하나님의 내면적 삶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는 것일까? 어디까지 경세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순한 어떤 등식을 구성하기 전에, 우리는 내재적-경세적 구분이 가져온 소중한 가치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곧 내재적-경세적 구분은 하나님의 자유를 보호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를 경세적 삼위일체와 완전히 동일시 해버리면, 하나님을 정의할 때 철저히 세계에 의존된 유한한 하나님으로 전락하게 된다. 내밀한 임마누엘론을 다시 고백하기 위해서, 너머의 초월적인 하나님을 희생할 수는 없다.

지난 20년 동안, 몇 명의 신학자들은 종말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일치를 찾아보자고 제안하였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신학자는 로버트 젠슨이다. 젠슨은 그 동안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리스 형이상학이라는 지성적 감옥에 갇혀 바빌론 포로 상태였다고 주장한다. 그리스 형이상학은 시간적 역사보다는 무시간적 영원성에 존재론적인 우선권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구조에서 우리는 영원한 아들을 선재하며 수육하지 않은 로고스(preexistent disincarnate logos, logos asarkos)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이와 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젠슨은, 시간적 운동의 역동성을 하나님의 본질적인 삶으로 통합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영원성으로부터 동 떨어져 나간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피조물이 결합한 궁극적 결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영원성은 시간의 완성을 하나님의 실재인 종말로 통합하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지금과 그때 사이의 미래가 열려지고, 하나님의 활동의 자유가 확보된다. 종말론적으로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을 자유롭게 구성해 가는 활동이 된다. 그러므로 경세적 삼위일체가 성취한 현실적인 구원 사건들은 궁극적으로 시간의 종말론적 초월로 고양되어 내재하게 될 것이다.

종말론적인 제시는 바람직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종말론적 제시가 너머와 내밀의 역설을 주목함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제시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상대성의 긴장을 유지하려는 순수한 욕망의 표현이다. 이는 영원성과 시간성이 어떻게 상호 배타적이지 않고, 서로 보충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하나님과 세계 사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삶 안에서 관계성을 함축하고 있는 임마누엘의 복음을 적절하게 해설한다.

5)     삼위일체 담론의 미래

이제까지 논의한 것으로 삼위일체 논의의 방향을 제시할 수 이는 몇 가지 잠정적인 결론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삼위일체 교의의 구성에서 분명 숫자 3은 근본적으로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여겨진다. 삼위일체 개념으로 사유하는 이유는, 성령의 연합하는 사역이 없이는 분리될 위험에 처한 너머와 내밀의 역설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동일한 종류나 질서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위격을 정확하게 정의하고 이를 세 위격에 동등하게 적용해서 이들이 동일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다. 삼위일체란 각 위격의 민주적인 평등성을 보증하려는 문제로 촉발된 것이 아니다. 위격의 평등성이란 문제가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창조자요 구원자이면서 거룩하게 하는 자가 한 분 하나님의 현실적 사역임을 개념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영원성 안에 시간적 역동성을 긍정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존재보다 생성을 우선적으로 선호하려는 형이상학적 성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는 변하지 않는 신적 존재를 움직이려는 하나의 시도라기보다는, 수육과 완성을 진지하게 생각함으로써 얻어진 결론이다. , 예수의 부활에서 이미 실현되었고, 영원성으로 높여져, 우리를 위해 예정된, 도래하는 새로운 창조에 대한 선취적 약속에서 나온 것이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하나되어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과거에 예수에게 나타난 진리가 미래에도 우리를 위해 진리가 될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예수가 누리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약속이며, 시간적인 것이 영원의 세계로 높여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넷째,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는 여전히 열려져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은 종말론적인 미래에서뿐 아니라 역사 안에서도 미래를 갖는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 순환은 시간 속에서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삶에 담지된 시간성을 진지하게 대면하다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의 본성에 대해 묻게된다. 시간의 본성은 그 자체가 수수께끼이고 신비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의 시간성을 긍정하는 것은 저 세상적인 영원의 신비에다가 이 세상적인 신비를 더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에 대해 질문하자마자 시간에 대한 물음이 20세기 과학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음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문제를 정확하게 추적하기 위해서는, 신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

다섯째, 삼우일체 사유는 계속 유동하는 과정이다. 이는 역동적인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한 것이 아니고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도상의 신학(theology of on-the-way, theologia viatorum)이다. 철학자 푀글린은 더 이상의 사색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이유에서 그리스도교 교의의 본체화를 반대하였다.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과 그것이 지닌 역설적 성격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개념화에 만족할 수 없다. 근대와 새롭게 일고 있는 포스트모던 정신의 새로운 도전은 관계성과 시간성에 대해 묻게 끔 한다.

여섯째, 삼위일체 교의가 하나의 교의에 지나지 않지만, 부적절한 것으로 선반에 처박아 둘 필요는 없다. 삼위일체 교의는 복음을 보도하고 은총을 제공한다. 삼위일체 교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삶으로 우리를 초청한다.



[1] 라쿠나는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하나님이 측량할 수 없는 신비이긴 하지만, 삼위일체 교의 자체가 신비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2] 카스퍼는 구분을 확실히 함으로써 우리를 혼돈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1이 곧 3이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한 적이 없다. 하나의 인격이 세 인격이고, 하나의 실체가 세 실체들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오히려 인격과 실체를 구분함으로써 삼위일체 교의는 하나님 안에 하나인 실체의 일치와 세 위격으로 구성된 하나의 삼위일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와 셋은 전혀 다른 면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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