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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사론

성령 은사론

-리차드 개핀-

-이 책은 신약성경의 성령은사론을 다룬 책인데 시종일관 성경에 의존하여 사색한 책이다. 체험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성경 말씀에 기준하여 성령은사 중에서 특별히 예언과 방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이다.

 

1장 약속과 부탁

 성령께서 말씀과 더불어 자유롭게 역사하신다는 것이 필자의 첫 번째 확신이고, 필자의 두 번째 확신은 체험 자체가 기독교 지식과 교리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2장 성령선물

 성령이란 단어의 분포도가 신약 후반부에 쏠려 있음을 얼른 볼 수 있다. 80퍼센트가 사도행전과 서신서와 계시록에 나오고, 나머지 십여 퍼센트만이 복음서에 나온다.

 그러나 성령이란 단어의 분포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신약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중점이 다르다는 점이다. 성령의 현재적 사역을 놓고 볼 때 전반부(복음서)의 중점은 예수님 자신과 그의 활동에 있다. 즉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집중적으로 역사하셨고, 제자들에게는 미래에 받을 선물, 즉 약속의 문제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중점은 교회와 신자들에게 있다.

 성령사역의 중점이 오순절 사건을 계기로 전환되었다. 신약의 성령론은 오순절 사건을 축으로 하여 돌고 있는 것이다(여기서 오순절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 및 부활과 직결됨). 따라서 우리가 고찰해야 할 것은 오순절 사건의 역사적 의의인 것이다. 즉 성령선물(성령세례)의 의의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두 기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두 기둥은 1. 오순절과 그리스도, 2. 오순절과 교회이다. 여기서 오순절과 교회를 다루려면 반드시 개개신자의 경험도 빼놓을 수 없으므로, 3. 오순절과 개개신자의 경험도 아울러 다루고자 한다.

 1. 오순절과 그리스도(기독론적 차원)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베푸신 자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를 요약하면, 성령선물(성령세례)을 확보하신 다음 그것을 오순절 교회에게 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기본적 명제를 다음의 두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약속의 관점과 (2) 성취의 관점에서 그것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1) 요한의 역할은 잠정적예비적인 것이다. 그의 회개요청은 준비적인 것이다(3:4; 7:27이하 참조). 따라서 그의 사역 전체는 물세례로 표현되었다. 이에 비해 예수님의 사역은 예비가 아니라 성취이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 전체는 요한의 예비사역이 실제로 성취되어 나타난 성령과 불세례로 요약되는 것이다.

메시아의 성령불세례는 세상이란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대분리작업인 것이다. 메시아의 성령불세례는 이상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종말론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 점을 이해해야 오순절 사건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이 종말적 의의를 이해해야 누가복음 전체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누가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한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속된 메시아 세례가 당장 일어나지 않고(심지어 요한까지도 그것이 당장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 기대와는 달리 눅 7:18이하 참조), 메시아 세례가 있기 전에 먼저 예수님 자신이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시고 바로 뒤이어 성령을 받으신 사건( 3:21 이하와 마 3:13-17; 1:9-11에도 거의 동일한 말씀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 받으셨다는 기록이 요한의 성령세례 예언에 바로 뒤따라 나온 것으로 되어 있음)이 선행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불세례가 오순절에 드디어 실현되었는데, 그것이 메시아의 백성에게 멸망세례가 아니라 축복세례가 되기 위해서는 메시아 자신이 그들의 죄를 담당하신 대속자로서 먼저 그들과 동일시되어야 하고(요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사건은 예수께서 자기 백성과 똑같이 되신 사건임, 3:14참조), 또 먼저 성령을 받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죄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를 받아야 했는데, 이 진노와 정죄를 제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들보다 먼저 세례 받으시고 먼저 성령을 받으신 것이다.

누가복음 3:15이하에 기록된 세례가 심판과 관계된 것임을 더욱 밝히 이해할 수 있다. 즉 누가복음 3:15이하의 세례기록은 표시로서의 심판(예수께서 요한에게 받으신 세례를 포함한 요한의 물세례)이나 혹은 실재로서의 심판(성령불세례)을 언급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십자가로 절정을 이룬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하나의 세례 시련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사역 전체는 메시아세례(성령불세례)를 베푸시기 위해 친히 종말심판(정죄)을 당하신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2)요단강 사건은 성령이 성부에 의하여 성자에게 내림( 3:22). 예수님 앞에 놓여 있는 메시아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성령부여, 즉 교회의 구원성취를 인한 성령부여이다. 오순절사건은 예수께서 성부로부터 받은 성령을 성부의 약속된 선물로 교회에 주심, 이것은 이미 완성된 구원사역에 대한 보상으로 받으신 선물이다. 이렇게 이 두 사건을 비교해 볼 때, 오순절 사건의 삼위일체적 의의가 명백하게 밝혀진다.

고린도전서 15:15절은 그리스도가 부활시리즈에서 최초 모형이라는 사실 외에,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신 자로서(47-49절에 하늘하늘에 속한이란 말 참조) “살려 주는 영이 되셨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는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 세 가지 점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 내가 판단하기로는 고린도전서 2:10 이하(특히 13절 이하)와 고린도후서 3:3 이하(특히 6)에 나타난 바울의 어휘사용법과 신령한이란 형용사의 사용법( 1:11; 고전 12:1; 6:1; 1:3; 1:9)을 볼 때, 고린도전서 15:44, 46의 프뉴마티콘과 45절의 프뉴마는 각기 성령의 사역과 인격을 가리키는 용어임이 분명하다.

 둘째, 바울이 그리스도를 살펴 주는 영”(즉 성령)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삼위일체를 혼동하고 있다고 보면 안 된다. 바울은 여기서 삼위 상호간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지금 역사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 즉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두 번째 사람, 47)으로서 어떤 신분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경륜적기능적종말적 동일시이다. 바울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사람으로서 승귀(부활승천)하심으로써 성령을 100퍼센트 영구적으로, 100퍼센트 완전하게 소유하셨으므로 그리스도와 성령은 그 사역에 있어서 동일시된다는 점에 있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교회에 생명을 주는 종말적 사역에 있어서 하나가 되었으므로 바울이 동일시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에서 첫열매로 나타나 보인 부활생명을 가리킨다.

 셋째, 신자들은 재림 때, 육체적으로 부활하면서 이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의 부활생명만이 아니라 현재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어떤 신분으로 어떤 사역을 하시는가 하는 점도 이 구절에 암시되어 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2:14-39)와 바울의 해석(고전 15:45)을 종합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순절에 성령선물을 교회에 쏟아부어 주셨다는 점과 그리스도께서 살려 주는 영으로서 교회에 직접 임하신 사건이 바로 오순절 사건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절대적전폭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약의 기독론과 성령론의 가장 기본적인 주요원리 중의 하나이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약간 첨가하는 사역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행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보충하는 보충사역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분리되는 독자적인 사역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기초 위에 덧붙여 주는 보너스가 아니다. 오히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살아 께셔서 어떤 일드을 행하셨는가를 밝히 보여 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종말 생명의 근원으로서 교회 안에 살아 계셔서 활동하심을 밝히 보여 준다. 이렇게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계속 살아계심을 보여 주는 공개된 비밀”, “계시된 신비이다.

 2. 오순절과 교회(교회론적 차원)

오순절은 바로 하나님의 새 언약민이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창설을 의미한다. 오순절 성령은 하나님께서 영으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몸( 2:22),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몸(고전 3:16)을 이루었다. 따라서 성령세례 받은 그 몸 속으로 연합되어 들어가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누구나 성령선물을 누린다(고전 12:13).

3. 오순절과 개개신자(경험적 차원)

 (1) 여기서 본인의 입장은 오순절 사건은 구원의 서정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구속역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오순절 성령세례는 오늘날도 계속 적용되는 사건의 일부가 아니라, 단회적으로 성취된 구속역사의 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구원의 서정과 구속역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 둘을 혼동하면 그리스도의 사역이 절대충분성과 완전성을 위태롭게 한다. 본인이 누차 강조한 대로 오순절 성령세례는 구속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이고 독특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개개신자의 경험의 표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부활승천이 반복될 수 없고 경험의 표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오순절 사건도 역시 반복될 수도 없고 경험의 표본이 될 수도 없다( 2:32 이하 재참조).

 사도행전 8:14 이하: 10:44 이하(11:15-18) 19:1 이하를 전형적인 예로 삼고 이상의 결론에 반박하면서 제2의 축복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을 어떤 관점으로 읽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특별히 누가의 행전 기록 목적 중의 하나는 복음이 초창기에 이스라엘로부터 이방 여러 나라들로 전파된 것을 기록하는 데 있었다. 즉 복음의 사도적 전파 기록이 그 목적이었다. 그는 사도들과 그들과 관련된 자들의 사역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새 언약 교회의 최초 단회적 설립을 기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여기서 강조해 두고 지나갈 것은 사도행전 1:8이 시간과 공간과 관계없이 모든 신자들에게 차별 없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다만 사도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점(2절의 너희 8절의 너희와 같이 분명히 사도들을 가리킨 것임), 복음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까지 전파하는 창설사역을 사도들이 완성했다는 것을 1:8이 보여 준다는 점이다( 1:8, 23참조). 사도행전 1:8은 물론 오늘날도 적용된다. 그러나 단지 파생적으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도들의 토대 위에 기초하고 있고 사도들의 복음전파의 기초사역을 사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파악하지 못할 때 뜻밖에도 흔히 이 구절을 오용하게 된다. 서구세계에서 현재 선교사역의 기지로 쓰이는 개교회나 기타 크고 작은 선교부가 예루살렘인가? 물론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복음전파의 기초가 다져진 이후에 복음이 전파된 땅끝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사도행전 8, 10(11), 19장에 기록된 사건들은 거기에 관련된 두드러진 현상들( 8장에 방언이 언급되어 있지 않음을 주목하라)과 함께 무한히 계속될 사건 시리즈의 하나, 즉 오순절 사건의 반복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건들은 복음의 최초의 기초적 전파에 속한 요소들로서 사도행전 2장의 사건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건들이다. 즉 그 사건들은 독특하고 반복 불가한(즉 비모형적, 비표본적) 사건 복합체의 일부인 것이다.

 그 사건들은 오순절 사건의 연장, 성령세례 폭의 확장 내지 확대의 일부분, 혹은 오순절 약속의 단계적분할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연장이나 확장이니 단계니 하는 용어들은 그 용법에 있어서 사도들의 창설사역을 통하여 단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의하여 제한 내지 규정된 용어들이다. 본인이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8,10,19장 중 그 어느 하나도 개인 신자들의 경험 자체에 초점이나 주안점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도행전 8장의 내용은 14절 이하에 기록된 사건들의 의의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다”(14)는 사실에 있음을 보여 준다. 10(11)에 고넬료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의 의의도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다”(11:1; 8:14의 구조와 유사함을 주목하라)는 사실과 이방인들도 성령선물을 받았다는 사실(10:45; 11:15-8; 15:7 이하: 여기서 성령선물을 중생 후의 경험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생명 얻는 회개와 동일한 것으로 받았음을 주목하라, 11:18)에 있다.

 사도행전 19:3-7은 많은 난제를 안고 있는 구절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이 사람들이 세례 요한 때에 살았고 세례 요한의 사역과 운동에 직접 참여한 자들이었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핵심을 두고 있다. 즉 이 사건의 의의는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 곧 그들이 그 당시 요한의 제자들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이 바울을 만남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요한의 사역에 반응을 보였고 그의 물세례의 표를 받았다. 그러면서 그 물세례가 가리킨 것이 예수님의 사역으로 성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취된 사역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거기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이것이 그들이 처해 있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바울은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 바로잡아 준 것이다. 바울의 주 관심은 예수님의 사역의 실재를 그들에게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임을 보여 주는 데 있었다(4절 이하). 아무튼 사도행전 19:1-7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나타난 구속사적인 특수한 제한성을 파악해야 한다.

(2) 사도행전 2, 8, 10, 19장에서 세대적인단회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오순절에 참여한 자들의 경험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회심 후의 경험인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경험은 전체적으로 독특한 것이었다. 그들은 때가 찼을( 4:4), 즉 구속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단회적으로 완성되었던 시대의 사람들이다. 사도행전 2장과 기타 그 밖의 본문에서 성령은 이렇게 받아야 한다는 식의 영원한 표본을 찾는다면 대답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에 대한 최초 신앙과 동시에 받는가, 아니면 그 후에 받는가? 동시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10장과(아마도 다소 논란의 대상은 되겠지만) 19장이고, 그 후에 바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2장과 8장이다. 성령세례는 물세례 받기 전에 받는가, 아니면 물세례 받은 후에 받는가? 물세례 전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10장이고, 그 후에 받는 것으로 나타난 곳은 8장과 19장인데 2장은 그 전후표시가 없다. 성령세례는 안수와 함께 받는가, 아니면 안수 없이 받는가? 안수와 함께 받는 것으로 된 곳은 8장과 19장이고, 안수 없이 받는 것으로 된 곳은 2장과 10장이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 2, 8, 10, 19장 사건을 성령세례의 표본으로 볼 때에, 이와 같은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성령세례의 표본으로 보는 것은 누가의 의도 속에 없는 것을 억지로 집어 넣어 해석하는 것이 됨을 알 수 있다.

 베드로가 부활 이전에 했던 신앙고백( 16:16; 8:29; 9:20)과 또 다른 고백( 6:68) 이렇게 심령에서 성령이 감동하여 우러나온 고백은 아브라함의 표본적 믿음( 4장 갈 3:6 이하)과 같은 구원적 믿음, 의롭다 함을 얻은 믿음이요, 따라서 베드로가 언약민 속에 가입되어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베드로의 회심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오순절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11:17)라고 말했을 때에, 그가 여기서 구원적 신앙의 최초 행위를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암시한 것은 신자의 생활에 어떤 시점에서든지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사도행전 8장은 해결하기 힘든 몇 가지 난제를 안고 있다(가령 13절에 기록된 시몬 마구스의 신앙은 진짜 신앙이냐 가짜 신앙이냐? ).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와 기도하고 안수하여 성령을 받기 전에는 회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를 뒤집어엎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하여간 이렇게 보는 견해에 큰 문제점이 있다는 것만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그 문제점이란 누가가 사마라이에서 일어난 일(5-13)을 요약하여,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14)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이와 똑같이 요약한 표현이 11:1에 나온다(“∙∙∙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그렇다면 8:14의 내용도 역시 진정한 회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당하다. 이렇게 볼 때에 8:14-15의 경험은 사도행전 2장의 경험과 같이 회심 후의 경험인 것이다.

 오순절 사건이 제자들의 경험에 어떤 의의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누가가 누가복음을 끝맺으면서 한 말에 의거하여 평가해야 한다. “그들이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4:53). 여기서 첫째, 그들이 찬양한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불붙은 마음과 열린 눈을 가지고(32, 45)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참 의의를 발견하고 그것을 집중적으로 찬양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와 부활을 핵심으로 한 복음이 그들의 찬양이 내용이었다. 둘째, “성전에서란 말은 이 찬양이 어떤 의미에서 공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즉 적어도 그들이 고의적으로 숨어서 찬양한 것은 아니었다. 셋째, “이란 말은 그들이 꾸준히 찬양하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누가는 이 마지막 한 구절을 통해 제자들이 부활 후 오순절 전에 변화를 받아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복음증거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흔히 스쳐버리는 이 구절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오순절 사건이 제자들에게 미친 강력한 영향을 부인하지 않는 범위에서, 오순절이 비겁한 제자들을 백절불굴의 용사들로 변화시켜 힘을 주는데 가장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고 보는 통념을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즉 오순절의 경험적 의의에만 급급하면 방향이 비뚤어지기 때문에, 오순절의 의의를 경험적인 데서 앞서 언급한 기독론적 교회론적 의의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오순절과 기타 다른 경우에 경험된 현상들(가령 바람, , 방언)과 성령선물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선물은 승귀하신 그리스도 자신, 즉 교회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생명을 주는 성령이다. 성령선물이 특별한 경우에 구체적으로 나타났는데, 이때에 이 나타난 현상들을 성령선물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성령선물에 반드시 뒤따라는 것으로 보아서도 안 된다.

(3) 한 성령으로(with), 혹은 성령 안에(in) 세례받는다는 표현이 신약성경에 일곱 번 나온다. 그 중에 여섯 번은 오순절과 구체적으로 관계된 말, 즉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앞서 분석한 단회적 오순절 사건복합체와 관련된 말이다( 3:11; 1:8; 3:16; 1:33; 1:5; 11:16). 일곱 번째 경우는 고린도전서 12:13에 나오는데, 그것은 오순절에 참여하지 않았던 신자들(오늘 우리들처럼), 따라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획기적인 몇몇 사건들을 경험하지 못한 신자들에게 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고린도전서 12:13의 경우는 오순절(성령세례, 성령선물)을 신자들의 경험과 관련시킨다. 즉 그것은 구속의 계속적인 적용면에서 성령세례가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전체에서 바울은 성령의 사역, 특히 신자들 속에 역사하는 영적 은사들의 다양성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깊은 근본원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원리이다(특히 12-27). 그러나 바울이 성령의 활동에 대해 말한 모든 내용의 뿌리는 보다 기본적인 실재,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성령이 다양하게 활동하시는 영역이라는 실재 사실에 있는 것이다.

 전치사 εν(13절 상반절)은 흔히 도구적으로 사용된다(“한 성령을 통해[by]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번역하는(“통해서라고) 것은 문법적으로 불필요한 일일 뿐 아니라, 12장 전체의 문맥을 볼 때 문맥에 어긋나는 일이다. 바울의 요점은 세례 때에 나타나는 성령의 한몸 되게 하는 사역이 아니라 몸의 모든 지체가 한 성령을 반드시 공유한다는 점이다. 성령은 여기서 그 몸의 창조자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몸 속에 있음으로 모든 지체에게 주어지는 선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이 분명히 13절 하반절의 요점이다. 13절 하반절은 13절 상반절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에 나타난 사상은 로마서 8:9과 비슷하다. 즉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은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라는 사상( 8:9)과 일맥상통하다. 또한 그것은 주님과 합하는 자는 주와 한 성령이라는 고린도전서 6:17과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문맥상 13절은 단일성과 다양성 중에 단일성에 초점을 기울이고 있다.

 성령으로 세례받은 자는 누구인가? 바울의 대답은 명료하게 강조되어 있다.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세례받았다. 물론 여기서 모두라고 해서 누구나 무분별하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모두는 한몸인 교회의 모든 구성원을 가리킨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다 이 모두에 속한다. 바울이 분명히 말한 것은 교회 안에 어떤 특수 그룹이나 어느 부분이 아니라, 교회 전체, 몸 전체가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는 것이다. 13절 하반절에서 모두란 말이 반복된 것을 보면 여기서 바울은 그 보편성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언제 성령세례를 받았는가? 얼른 보면 이 구절이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ειζ)란 전치사 속에 대답이 있다. 성령세례의 경험은 각 지체가 한몸 속으로 하나되어 들어가는데, 즉 언약민 속에 구원적으로 포함되는 때에 일어난다. 이 구원적 연합 이후의 어떤 때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속적용의 기본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실재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경험의 알파와 오메가는 우리가 그리스도, 즉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연합되는 경험이다. 또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그의 몸인 교회와 연합되는 경험이다. 이 경험적 연합은 사죄(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가져올 뿐 아니라 새 생명 및 죄책과 오염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며, 또 이런 혜택들과 아울러 모든 다른 구원의 혜택들을 계속 누릴 수 있게 해 준다. 바울이 표현한 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단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참여하고 그 혜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구조로 제시된 13절 상반절의 요점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경험(그의 몸 속으로 하나 되어 들어가는 경험)은 그가 오순절에 교회에 세례주었던 성령선물을 경험적으로 누리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마치 이 연합이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특히 롬 6:3 이하; 2:20; 2:5 이하 2:12이하 ; 3:1-3 참조)에 경험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이미 살펴본 대로( 2:32 이하) 오순절 사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의 단회적 사역의 모든 다른 측면과 같이 개개신자가 교회, 즉 그의 성령세례 받은 몸 속으로 연합되는 순간에 체험하는 것이다.

 위의 두 문단에서 고린도전서 12:13에 나오는 연합의 경험적 측면을 강조하였거니와, 이 측면은 영원한 구원계획( 1:4)에 있어서나 구원의 단회적 역사적 성취(바로 위에서 인용한 일련의 성경 구절들을 보라)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으로부터 동떨어진 사실도 아니고 그 연합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경험적 연합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13절 상반절을 이렇게 이해할 때에 13절 끝에 나오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 병행구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성령으로 세례받은 자들, 즉 성령이 그 위에 쏟아부어진 한 몸의 지체들이 된 자들은 성령을 마시게 된 자들(이제는 그들이 받은 것을 강조함)이다. 13절 상반절은 기독교 물세례를 가리키고 13절 하반절은 성찬을 가리킨다는 견해는 설득력이 없는 견해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도 성찬은 계속 반복해서 거행하는 의식인데 어째서 부정의 과거시제로 마시게 되었다고 묘사되었을까 하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러나 13절 상반절은 물세례를 가리키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물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 연합이 가져오는 모든 혜택들을 표시하고 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 혜택 중에는 성령세례, 즉 성령선물이 포함됨).

 따라서 13절이 명백히 교훈하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성령선물을 받는다는 것과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되는 순간에 그것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구절(고전 12:13)은 성령세례를 부가적인 회심 이후의 제2의 축복 경험으로 보는 모든 이론들을 부숴버리는 단단한 반석이다. 이런 이론들이 대부분의 경우는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데 교회 안에서 가진 자들못가진 자들”, 천국의 일등시민과 이등시민을 갈라놓고 만다. 다시 말해서 그런 이론들은 성령세례를 받아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고 꾸준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성령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재촉받는 자들, 그래서 성령세례 받기까지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자기가 비참하다고 느끼는 자들을 갈라놓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13절 상반절에 성령이 도구적인 의미(“성령을 통하여”)로 언급되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할지라도(, 성령이 그 몸을 창조한다는 의미), 13절 하반절은 역시 우리의 기본적인 결론을 뒷받침해 준다. 즉 모든 신자들은 예외없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됨으로써 성령선물을 받고, 교회에 쏟아부어진 오순절의 갈증해소의 강물을 마시게 되는 것이다(특히 요 7:37-39을 보라). 여기서 사도행전 2:38을 잠깐 주석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12:13과 같은 방향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그의 몸 속으로 하나되어 들어가는 것)이 사도행전 2:39에서는 그 기본적인 혜택 면에서, 즉 회개(신앙)도 얻고 물세례로 인쳐지는 사죄(칭의)와 성령선물(새생명)의 관점에서 묘사되었다. 따라서 38절의 관점이 1-13절의 관점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1-13절의 관점은 구속의 단회적 성취의 일부분으로 성령주는 것과 관련된 것이고, 38절의 관점은 개인이 계속 구속을 적용하는 일부분으로서의 성령선물에 관계된 것이다. 흔히 이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해서 성령사역을 상당히 혼동하게 될 수 있다.

(4) 모든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신자의 성령사역 경험에 있어서 계속적인 성장과 개인적인 변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후에 회심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주는 성령의 변화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다는 말도 아니다. 성령이 개인에 따라 다르게 계속 역사하시는 사실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성령충만이다. 에베소서 5:18만이 신약에서 성령충만하라고 명령하는 유일한 구절인데, 이 구절을 여기서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현재 명령형은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충만 받을 것을 명령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회심 때 단회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성령충만은 신자의 생활에서 계속되는 과정 혹은 활동이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이 명령은 모든 신자들에게 일생토록 적용되는 명령이라는 점이다.

첫째, 19-21의 분사절들은 문법구조상 18절의 명령에 종속되는 것으로서 그 주어를 수식해 주는 것이다. 즉 이 구절들은 성령충만을 설명하는 구절들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성령충만하면 반드시 이런 결과들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 그 결과를 일일이 하나도 빼지 않고 언급한 것은 아니다. 그는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주요한 결과들을 언급하였다.

 둘째, 에베소서 5:18-6:9의 가까운 병행구가 골로새서 3:16-4:1인데(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전체적으로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 여기서는 성령충만하라는 명령 대신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병행구절을 볼 때, 성령충만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는 것은 기능면에서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 속에 거하는 말씀이란 교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만이 특별히 소유하고 있는 특수한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 28:20)을 충실히 믿고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령충만은 어떤 이상한 어마어마한 경험문제(때에 따라서 이런 경우도 있으나)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매일매일의 기본적인 대인관계와 생업에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성령충만 사역은 생명을 주는 성령인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더불어 계속 풍성하게 역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의 말씀, 즉 교회를 위하여 성문화된 그의 말씀 외에 어떤 다른 말씀을 찾는 것은 성령 외에 다른 영을 찾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1-3은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신자들, 즉 육적인 신자들과 신령한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구절이 아니다. 즉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두 종류의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내세울 수 없다. 이 구절을 얼른 읽어보면 우선 그런 인상이 드는 것은 사실이나 바울의 요점은 그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2장 끝부분에서 말한 내용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바울은 2장 끝 부분에서 인간을 절대 합할 수 없는 두 그룹으로 예리하게 구분했다(14절 이하).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도 역시 그렇게 구분했다. 모든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자연인”(성령 밖에 있는 사람)신령한 사람들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 사이에 중가 계층은 결코 있을 수 없다. 2장 끝부분에서 이렇게 사람들을 두 종류로 구분한 바울이 3장 초두에 와서 세 종류로 나눈다는 것은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바울이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 더욱이 여기에 쓰인 육적인” “세상적인등의 형용사는 성령과 육체를 대조시킨 바울의 용법에 비추어 볼 때(특히 롬 8:4 이하; 5:16이하), 2:14육에 속한”(자연인)이란 말과 동의어이다. 이 말은 성령이 없는 상태, 성령의 사역에 반대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3:1 이하의 바울의 책망은 고린도 교인들이 수준 낮은 이류 신자들로 행동한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신자 아닌 자들처럼 행동한다는 것, 즉 그들의 행동이 신자들로서의 신분과 고백에 모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1)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신자들 중에 영적인 신자들과 육적인 신자들이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2:6온전한혹은 성숙한신자들이라는 바울의 표현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성숙이란 일부 신자들만이 나타내 보이는 어떤 높은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1:24, 30 참조). 즉 그것은 모든 신자들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그것인 신앙생활의 출발점이다. 고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이란 말은 그들이 신앙이 어린 신자들이라는 말이 아니다. 즉 바울이 거친 말을 쓰는 대신에 그렇게 부드러운 말을 써서 그들의 상태를 지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은 고린도 교회의 형편이 비정상적이고 퇴보적인 것임을 보여 주는 말이다. 그 말의 뉘앙스는 철부지의 “, “유치한”, “저능아와 같은등의 의미이다( 5:12 이하). 물론 바울이 그들을 신자들로 보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한 요점은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신분과 도무지 맞지 않는 것이요, 그들의 신분을 파괴시키는 것이라는 데 있었다.

(5) 전체적으로 볼 때 신약성경은 신구약 신자들의 경험상의 차이면에서 하나의 분명하고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신약 신자들이 생명을 주는 성령인 그리스도와 신령한 연합을 누리고 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신자들(그의 몸인 교회의)과 연합을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연합은 승귀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서 구원의 모든 다른 축복들의 직접적인 근거요 기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전에는 이 연합을 누릴 수 없었다. 구약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미래의 사역에 근거하여 중생칭의성화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축복들을 체험한 언약적 교제의 방식이 잠정적인 것이었다. 고로 그것은 영화된 그리스도의 최종적영구적 연합이 없는 것이었다. 이 연합은 과거에 없었던 중대한 연합이므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연합은 언약을 체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포한다. 이 관계는 그 친근성과 완전성면에서 종말적인 관계이다. 이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나타난 왕국 축복들의 핵심이다. 이 축복들은 많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체험하기를 갈구했으나 체험하지 못한 축복들이다( 13:16 이하). 그리스도와의 이런 연합 속에 양자가 되는 것, 양자의 영인 성령을 받는 것이 포함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구약 신자들은 아주 대조적으로 종과 미성년자의 위치에 있었다( 8:10-17; 3:23-4:7). 이 연합은 살과 같은 새 마음을 주시겠다는 약속, 성령을 내주하게 하고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한 약속의 성취이다( 36:26-27; 31:33).

그러나 이 연합이 경험상 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점을 초래하는가? 여기에 대해 성경은 입을 다물고 있다. 신약시대에 성령의 새로운 역사를 파악하고 그것을 강조하려는 나머지 구약시대에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역사하신 것을 무시하거나 부인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구약에서 개개 신자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분명한 구절들이 아주 적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약시대에는 신정국가에 성령을 주셨고, 신약시대에는 개개 신자 속에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식으로 신구약의 차이점을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릇된 이론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온갖 경험들, 가령 아브라함의 대표적인 신앙이나 시편의 경건과 기도 등은 신약성경이 분명히 교훈하는 대로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사 마음속을 새롭게 하시고 인격을 변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의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당시의 표본이었고, 지금 신약시대에도 역시 표본인 것이다. 다윗이나 기타 시편 기자들이 읊은 하나님에 대한 숭고한 찬양과 깊은 헌신을 볼 때, 신약 신자들이 그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시편이 성경이니까 거기에 나오는 시편들이 독특하게 영감된 것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점만 강조하고 그 시편들이 동시에 그 저자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확신이었음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공감하여 읊은 시편들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는 자들로서 구약 신자들보다 더 깊은 안목과 이해심을 가지고 그 시편들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이상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신약성경은 성령이 개개신자들에게 역사하시는 것을 다룰 때에 더 광범위하게 기독론적교회론적 차원을 강조하고 나서 그 결과로서 개인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신구약의 차이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성령이 되셨다. 성령은 지금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의 결과로 나타나 역사하신다. 성령이 구약시대에는 예변적으로, “미리약속 면에서 역사하셨으나, 신약시대에는 때가 되매실제적인 성취에 근거하여(이 성취를 떠나서는 약속이 궁극적으로 무의미해짐)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7:39의 의미이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한편으로 이 구절의 의미를 깍아내래서 성령이 이제는 구약시대보다 더 충만히, 더 크게 역사하신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본문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전에는 없었던 것이 이제는 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구절을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절대화시켜 구약의 성령활동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과 충돌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그 구속역사적기독론적 핵심을 알게 될 때에 올바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둘째, 신약시대의 성령은 보편적인 성령이다. 성령은 지금 이스라엘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이스라엘과 열방,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 포괄하여 새 언약의 백성 속에 임재해 계신다. 구약과 대조적으로 성령은 현재 모든 육체에게 쏟아부어져 있다( 2:17). 성령은 이방인들에게 임한 아브라함의 축복이다( 3:14). 천국의 성령을 옛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아 열매맺는 새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21:43). 이 전례없는 성령(그리스도,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범세계적인 지배가 오순절의 기능이다. 오순절의 성령은 선교의 성령이다.

4. 요한복음 20:22에 대하여

 (1)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20장과 사도행전 2장의 기록이 서로 다른 것을 기록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누가가 왜 요한복음 20:22의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은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사건과 오순절 사건의 관계가 무엇인가? 그 관계는 천국도래의 특징인 단계원리 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예수님의 지상의 공생애 기간에도 하나님의 종말 왕국이 이미 임하였을 뿐 아니라( 12:28) 동시에 가까이와 있었던 것처럼( 4:17)-이 원리는 부활, 승천 및 오순절 등 근접 미래 사건들( 16:28)과 그 후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 25:31, 34)에도 적용됨-역시 하나의 종말 왕국의 성령선물도 부활 당일과 부활 후 50일이 지난 오순절에 단계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전자는 후자(오순절 성령강림)의 첫열매라 할 수 있다. 오순절도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무르익은 성령추수의 첫열매인 것이다( 8:23). 이런 관점에서 요한복음 20:22첫열매의 첫열매인 것이다. 요한복음 20장과 오순절의 관계는 23절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23절에 암시된 내용은 마태복음 16:19에 언급된 천국열쇠의 권세와도 거의 동일한 것이다. 또 천국열쇠의 권세는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18)과 연결된 것인데, 이 약속이 오순절에 성취된 것이다.

 요한복음 20:22의 사건은 또한 예수께서 부활을 통하여 성령(생명)을 주시는 분, 혹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 되신 것을 보여 준다. 그 사건은 누가복음 24:53의 찬양활동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가 숨을 내쉬었다는 동사(이것은 신약에서 딱 한 번 여기서만 나옴)는 창세기 2:7의 메아리라고 말한 자들도 있는데 그럴듯한 지적이다. 70인경(구약의 헬라어 역본)에서 이 동사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동작을 묘사한 말이다. 성육 이전의 말씀이 창조시에 활동했고 태초부터 생명의 근원이었듯이( 1:3 이하), 이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새 창조의 시작이며 근원인 것이다(이 동사가 겔 37:9; 왕상 17:21에 하나님의 소생사역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고, 41:21, 21:31; 22:21 등에 하나님의 파괴사역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에스겔 21:31 22:21에서는 그것이 진노의 불과 연결되어 있다. 소생사역 파괴사역은 오순절에 성취된 세례 요한의 예언( 3:16이하)에 암시되어 있다.

 제자들이 이미 중생한 자들이었다는 전제( 6:68 이하)와 요한복음 20:22이 사도행전 2장과 다른 사건을 묘사한다는 전제하에서 볼 때, “2축복설이 이 구절( 20:22)에도 걸려 넘어지는 것이 분명하다. 이 사건은 매 시대 신자들이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모델의 하나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당시에 살았던 자들의 독특한 경험의 한 측면인 것이다. 즉 초창기 교회의 첫 세대의 독특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3장 성령은사 개요

 1. 성령선물과 성령은사

(1) “보편수여의 원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성령, 즉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체험하는 성령사역(성령선물)상이분배의 원리에 의하여 주어지는 성령, 즉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르게 분배되는 성령의 역사들과 구분되어야 한다. 이 두 원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보편수여의 원리는 12:13에 나타나 있다. 즉 한 성령으로 모두 세례받고 한 성령을 모두 마시게 된다는 것이다. “상이분배의 원리는 12:29-30에 나타나 있다. 즉 모두가 사도가 아니며 모두가 예언자들이 아닌 것이다.

 (2) 성령선물(단수)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경험(생명에 이르게 회개, 11:18)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것은 종말 새명의 실제적 시식이며, 미래의 부활추수를 기대하는 첫앨매이며( 8:23), 최후에 얻을 기업의 예약금”(예약으로 전체를 소유하는 다운 페이먼트”, 고후 1:22; 1:13 이하)이다. 이와 반면에 성령은사(복수)는 여러 사역에 관한 구체적인 역사들로서(고전 12:4-6) 그 자체가 잠정적반 종말적이다(여기서 반종말적이란 말은 완전한 종말, 즉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천국이 완성되는 때는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의미에서 쓰여진 말이다. 즉 성령은사는 천국에 가서도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already-not yet의 기간에만 존속되는 것이다).

 모든 신자들이 누리는 성령선물은 새 언약의 종말적 본질, 성부의 약속성취, 부활생명의 예약금과 첫열매이다. 성령은사는 이 생명의 구체적인 표현이지만 잠정적인 표현이다. 성령은사는 지나가는 이 세상 형적”(고전 7:31)의 여건 때문에 필요하게 된, 그 여건과 관련된 그리고 그 여건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가 지나가는 것(고전 13:8-10의 요점)이다. 여기서 균형을 잡고 유지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러나 균형은 잡아야 하고 유지되어야 한다.

2. 은사적 은사와 비은사적 은사

 우선 여기서 핵심되는 카리스마란 용어를 살펴보자. 이 용어는 바울이 독특하게 쓴 말로써 거의 바울만이 썼다고 할 수 있는 말이다. 바울 외의 신약 저자들과 그 당시의 성경 외의 헬라문헌 저자들을 다 살펴보아도 이 말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이 말이 로마서 12:6과 고린도전서 12:4 이하(이 말이 쓰인 구절로 가장 유명한 곳)에 쓰여지고 있는데, 여기서 이 말은 교회의 회중 속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구체적인 은사들을 가리킨다. 그 은사들은 회중의 유익을 도모하는 데 그 기능이 있다. 그러나 로마서 1:11신령한 은사”(이 형용사와 명사가 함께 쓰인 유일한 곳: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는 로마서 12장이나 고린도전서 12장에 열거된 은사들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의 신자들 사이에 가서 활동함으로써 그들을 전체적으로 강하게 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음이 거의 분명하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2).

 고린도전서 1:7의 용법도 이와 같이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 고린도후서 1:11(“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에서 이 말은 구체적인 사건, 즉 바울이 심각한 위기상황(10)에서 구출받은 사건을 가리킨다. 한편 고린도전서 7:7에서는(“각각 하나님께 받은 은사”) 이 말이 결혼생활도 가리키고 독신생활도 가리킬 수 있다. 디모데전서 4:14과 디모데후서 1:6에서는 이 말이 디모데로 하여금 목회자의 직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도록 하기 위해 안수함으로써 디모데에게 내려진 능력을 가리킨다. 로마서 11:29의 복수용법(“하나님이 은사들과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느니라”)은 이스라엘의 다양한 언약 특권들을 가리킨다(3:1-2; 9:4 참조).

 이 말의 보다 일반적인 의미는 로마서 5:15-16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이 성경 구절에서 비슷한 말들이 의도적으로 쓰였는데, 카리스마는 선물을 가리키는 다른 말들과 상호교체적으로 쓰였으며 의미상 은혜와 중첩되어 있다. 카리스마는 그리스도안에 은혜롭게 계시된 의와 생명을 포괄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로마서 6:23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카리스마는 영생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컨대 은사는 신축성이 있는 용어로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이 여러 의미가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이 여러 의미의 밑바닥을 흐르면서 그 의미들을 통합하는 것,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이 용어에 신축성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즉 모든 은사는 은혜의 현현이며 은혜의 현현은 어느 것이나 은사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어떤 은사는 은사적이고 어떤 은사는 은사적이 아니라고 봄으로써 은사적 은사와 비은사적 은사를 구분하는 것은 바울의 관점을 왜곡 내지 제한하는 위험을 범한다. 더욱이 좁은 의미의 은사적은사란 것이 흔히 은사, 진짜은사(“정말 중요한 은사”)와 동일시되고 있는데, 이렇게 될 때 그 결과는 한마디로 비참한 것이다.

 아물러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를 구분하여 성령의 열매는 은사가 아닌 것처럼 보는 것은 바울신학에 위배되는 쪼개기 작업이다. 물론 성령의 어떤 은사는 교회 안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도록 되어 있고 또 그들에게만 실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고전 12:29,30), 성령의 열매는 모든 신자들에게 나타나도록 되어 있고 또 실제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5:22 이하). 그러나 성령의 열매 역시 성령의 일부 은사 못지않게 성령의 은사이다.

3. 은사와 삼위일체의 관계

 (1) 그리스도께서 승귀하심으로부터 성령과 그리스도는 사역적으로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고전 15:45), 성자와 성령의 사역은 분리할 수 없다. 더욱이 성령은 아버지의 약속으로서 모든 활동을 하신다( 24:49; 1:4; 2:33). 어쨌든 고린도전서 12:4-6( 4:4-6 참조)은 성령은사를 주는 일에 있어서 분명히 삼위일체적 관점,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을 보여 준다. 은사는 성령의 것만이 아니라 성자의 것이요 성부의 것이다. 이 포괄적인 관점을 깨달을 때에 교회에서 은사문제를 다룰 때 성령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현대의 경향을 시정할 수 있다.

(2) 그러나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특히 성령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다. 은사를 주심은 성령의 나타남이다(12:7-9 참조). 성령은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다”(12:11).

4. 은사와 봉사

 은사는 철두철미하게 교회봉사를 위해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5. 성령세례와 은사

6. 은사와 직무

7. 은사목록( 12:6-8; 고전 12:8-10, 28; 4:11)

 (1) 이 많은 은사들은 칼로 두부 베듯 딱 갈라놓을 수 없다. 가령 지혜의 말씀지식의 말씀”(고전 12:8)을 예리하게 구분해 내는 데 성공한 주경학자가 있었던가? 또한 병고치는 은사능력 행함을 예리하게 구분하기도 어렵다(고전 12:9-10). 신약 전체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고린도전서 12:28의 목록(“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은 일종의 계층을 암시하는 듯하다. 여기서 계층이란 말은 뒤의 두 은사는 앞의 은사의 한 측면이라는 것, 즉 예언은 사도의 기능이요, 또 교육은 예언자와 사도의 기능이라는 의미에서의 계층을 가리킨다.

 (2) 은사목록은 얼른 보기에는 되는 대로 열거되어 있는 것 같아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기본적인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말씀은사와 행위은사가 그것이다. 이 두 범주는 물론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교회생활에 있어서 상호보완적이다.

 은사목록을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만한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베드로전서 4:10-11에 그것이 있다(카리스마가 바울서신 외에서는 여기만 나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 구절은 신약성경의 은사론을 전체적으로 간추려 요약하는 구절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지금까지 고찰한 여러 가지 사실이 이 구절에 종합되어 있음을 주목하라. 즉 교회 회중에게 주어진 은사의 다양성, 하나님의 은혜의 구체적인 현현으로서의 은사, 은사의 봉사적 성격, 말씀은사와 행위은사의 구분 등이 여기에 압축되어 나타난 것이다.

8. 내가 무슨 은사를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은사문제에 있어서 추상적기계적 접근방법은 피해야 한다. 여기서 추상적기계적 접근방법이란 로마서 12, 고린도전서 12, 에베소서 4장 등에 비추어 신령한 자기 점검을 한 다음 그 중에 원하는 은사나 부족한 은사를 위해 기도하는 식의 접근방법을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뜻밖에도 신약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영성보다는 전문적 영성(영적 세계에 있어서의 전문가상)을 좋아하는 현대 서구인의 의식구조를 잘 드러내 주는 것 같다. 이런 태도는 신약성경에 비추어 보면 잘못된 태도이다.

 (1) 이미 지적한 대로 은사목록이 하나부터 열 가지를 다 포괄하는 전체목록이 아니라 몇 가지만 골라서 열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하여 거기에 열거된 것을 자기가 못 받았으면 그것을 받기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너무 제한된 틀 속에 자신을 묶는 것이 된다.

 (2) 이런 태도는 혼란을 초래한다. 이제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어떤 은사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사도시대만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온 대로 은사 파악의 방법은 영적으로 나의 이 무엇이냐? 다른 신자들과 다른 나의 영적 특기, 나로 하여금 교회의 특수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나의 특기가 무엇이냐?는 식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약 전체는 그보다 훨씬 더 기능적 내지 상황적 접근방법을 제시해 준다. 즉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이 상황 속에서 말과 행동으로 다른 신자들을 봉사할 수 있는 특수한 일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벧전 4:10-11) “내가 봉사해야 할 구체적인 일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던져 보고 거기에 대해 효과적으로 응답할 때, 우리의 영적 은사를 발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하면서도 우리가 배우기에 가장 힘든 교훈은 영적 은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힘과 재질, 우리가 가지고 있는”(혹은 받아 가지고 있는)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연약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바로 그것이라는 교훈이다.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바울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신 것인데, 이 말씀이 영적 은사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신자의 존재에 기본률인 것이다.

4장 예언과 방언

 1. 고린도전서 14장 그 개요

(1) 14장 전체에 예언과 방언이 의도적으로 대조되어 있다. 은사론 전체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방언과 예언이다. 2절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한다고 했고, 3절에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한다고 했으며, 4절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했다. 39절에서는 예언방언은사론의 결론적 요약으로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다.

(2) 이상의 두드러진 대조를 통해서 볼 때 예언은 주요 요소 방언은 종속요소이다(특히 1, 5, 39절을 보라). 14장 전체를 통해서 방언은 예언의 상대적 중요성을 보여 주고, 반대로 예언은 방언의 상대적 열등성을 보여 준다. 바울은 방언과 예언, 이 두 현상의 차이점과 앞서 지적한 대로 예언이 방언에 비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밝히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3) 예언은 방언보다 더 우월한 것이며 더 사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은사를 행사할 때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행사해야 한다는 대원리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

   (4) 그러나 방언은 통역이 있어야 한다(13, 26; 5; 12:10참조). 그리고 방언이 일단 통역되고 나면 교회에 유익을 준다는 점에서 기능상 예언과 동등하다(5). 여하튼 방언이 예언보다 못하다고 하는 말은 통역되지 않은 방언에만 해당된다.

   (5) 예언과 방언은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기능이 상호 보완적이다. 바울이 다소 융통성 있게 예언을 마음으로하는 모든 말(19)과 연결시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육은사를 예언은사와 바꾸어 썼을 경우 혹은 교육(혹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는 기타 사역)은 교회에 유익을 주지만, 통역하지 않은 방언은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식으로 표현을 바꾸어 썼을 경우에도 바울의 의도 전달에는 사실상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바울의 관심사는 예언과 방언, 그 위치와 행사 그리고 그 상호관계를 다루는 데 있었다.

     예언과 방언의 상호 밀접한 관계는 14장의 주류로 흐르고 있는 예언과 방언이 대조를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예언행사와 방언행사에 관한 지침을 나란히 언급한 것(27-28절과 29-32)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면 방언과 예언이 어째서 이렇게 밀접하게 비교대조 되어 나타나는가? 어째서 그 기능이 동등한가? 그것은 방언과 예언이 둘 다 말씀은사이기 때문이다.

 2. 예언(신약의 예언자)

(1)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은 예언 전체, 즉 예언의 모든 국면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예언이 고린도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했나를 보여준 것이다.

(2) 물론 어떤 측면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느냐 하는 문제는 경우에 따라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고린도 교회에서의 예언은 바울서신과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에서 언급된 예언과 다른 현상이 아니라 동일한 현상이다.

  여기서 전체적인 균형을 잡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신야성경에 의하면 모든 신자들이 예언자들이라는 점, 즉 전 교회는 예언자들의 회중이라는 점이다. 종교개혁 때에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들이라고 강조한 것과 같이 우리는 새 언약민은 모두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신자가 예언자란 말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할 수 있고( 3:2), 성령의 역사를 통해 언약의 율법과 규례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록되어 있고 그들의 생활 속에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59:21; 31:33; 36:27; 고후 3:3 이하; 요일 2:27).

  그러나 신약성경이 예언자라 할 때는 이런 의미로 쓴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본 특징을 가진 은사 내지 기능이다.

예언은 교회 안에서 모두 받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사람들이 받는 은사이다. 그것은 상이분배의 원리에 의해 주어지는 은사이다.

  예언은 계시은사이다. 즉 예언은 교회에 일차적, 본원적 의미의 하나님 말씀을 전해주는 은사이다. 예언은 이미 존재하는 영감된 본문 내지 구전의 해석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영감된 일차적인(어디서 유래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예언의 필연적 특징 중의 하나이다.

(1)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예언은 교회의 일부 신자들에게만 주어진 은사이다(12:10, 28-29과 이 본문에서 나타난 기타 사실들을 보라). 이 점은 로마서 12:6과 에베소서 4:11에 나타난 예언에도 적용된다. 또한 예언이 계시은사란 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바울은 예언을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것과 연결시켜 언급했다(14:19; 6절에서 교육은사와의 관계 참조). 그러나 계시의 요소가 예언의 핵심으로 나타나 있다. 30(26절 참조)에서도 이 점을 볼 수 있다.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들은 잠잠할지니라.” 여기서 다른 이 29, 31절에서의 예언자이다. 구체적으로 30절에 비추어 볼 때 계시는 예언의 동의어다. 26절에서도 계시다음에 바로 방언과 통역이 뒤따라 나오는 것을 주목하라.

   14장 전체에서 예언과 방언이 서로 연결되어 나오는 것을 볼 때 위에서 계시는 예언을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6절에서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 4개의 개별은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지식”, 13:2, 8 참조)예언은 각기 서로의 의미를 규정해 주는 것이다. 하여간 26절과 30절에서 말하는 계시지혜와 계시의 땅”( 1:17)인 성령의 일반적인 역사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성령의 일반적인 역사로 나타나는 계시는 모든 신자들이 받는 것이다( 3:15 참조). 26절과 30절의 계시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영감을 통해 어느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구체적인 계시를 가리킨다.

  예언이 계시라는 사실을 예언과 모든 비밀을 아는 것(13:2)을 연결시킨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2절 상반절에서 비밀을 아는 것과 지식과 예언을 한 절로 묶은 것을 보면 비밀을 아는 것과 지식과 예언을 한 절로 묶은 것을 보면 비밀을 아는 것과 지식이 설령 별개의 은사라 할지라도 그것은 예언과 밀접한 은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정확한 해석은 비밀과 지식이 예언의 내용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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